안나와 자베르의 우상
깨진 거울
우리는 앞선 여정에서 사랑의 본질과 실천을 살폈다. 그러나 이성적인 독자라면 이런 질문을 던질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고 숭고한가? 사랑 때문에 파멸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이 질문은 정당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끔찍한 파멸 또한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숭고한 증인들의 맞은편에 놓인 ‘깨진 거울’과 마주해야 한다. 이 거울은 사랑이 어떻게 파멸의 얼굴을 하는지를 비춘다. 톨스토이가 그려낸 비극의 여인, 안나 카레니나가 내달렸던 파멸의 궤적을 우리 함께 따라가 보자.
에로스의 우상화
그녀의 사랑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불태울 것처럼 뜨거웠다. 유부녀였던 그녀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위해, 상류사회가 보장하는 사회적 명예, 남편이 제공하는 안정, 심지어 아들에 대한 애정마저 장애물처럼 뒤로하고, 오직 그 단 하나의 사랑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졌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깨진 거울’의 그 날카로운 조각들이 비추는 비극의 진짜 원인을 발견한다. 그녀의 파멸은 ‘사랑’ 그 자체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파멸은, 그녀의 사랑이 우리가 만난 ‘아가페(타인을 살리는 사랑)’가 아니라, 제4화(우상의 얼굴)에서 경고했던 ‘에로스의 우상화(나를 채우려는 욕망)’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브론스키라는 연인을, 자신의 공허한 삶을 구원해 줄 ‘유일한 신(우상)’으로 삼았다.
신이 아닌 우상을 신의 자리에 앉히는 순간, 비극은 잉태된다. 안나는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지만, 불완전한 인간인 연인은 그녀가 바라는 구원자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우상’이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절망하게 되고, 그녀의 사랑은 감사와 헌신이 아닌, 의심과 집착, 그리고 파멸적인 ‘자기 연민’으로 변질된다.
결국 그녀는 “모든 것이 거짓이고, 모든 것이 기만”이라 외치며,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던 그 사랑의 이름으로, 스스로 달리는 기차 아래 몸을 던진다. 안나의 죽음은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사랑이 아닌 것’의 실패였다.
비극의 역설, 어둠이 증명하는 빛
그렇다면 이 끔찍한 파멸은 무엇을 깨닫게 하는가. 안나의 비극은 우리에게 ‘아가페가 왜 필요한가’를 강력한 역설로 증명한다.
안나의 죽음은 웅변한다. “보라, 나를 채우기 위해 타인을 갈구하는 사랑(에로스)은 결국 나 자신마저 태워버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이 가장 선명하게 보이듯, 에로스의 파멸을 목격한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며, 집착이 아니라 헌신이라는 사실을. 안나라는 ‘깨진 거울’은 자신의 몸을 찢어 그 아픈 진실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은촛대가 비춘 길
어린 왕자가 사랑의 본질을, 올렌카가 그 역설을 보여주었다면, 사랑의 여정은 이제 가장 높고 험난한 봉우리 앞에 섰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삶을 파괴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가?
지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숭고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한때 빵 한 조각을 훔쳤던 죄수 24601번,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속 위대한 영혼 장 발장의 삶 속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19년의 감옥살이 끝에 세상에 나온 장 발장에게는 증오와 경멸만이 가득했다. 그에겐 늘 전과자라는 주홍글씨가 따라다녔고, 세상은 그를 짐승처럼 대했다. 그를 인간으로 대한 것은 오직 미리엘 주교뿐이었다. 하지만 장 발장은 그 마지막 온기마저 배신하고 주교의 은촛대를 훔쳐 달아난다. 그러나 그는 이내 경찰에게 붙잡혀 주교 앞으로 끌려온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절망의 순간, 주교는 태연히 거짓말을 한다. 자신이 그 은그릇을 선물로 주었으며, 왜 가장 값비싼 은촛대는 두고 갔냐고 오히려 장 발장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율법을 넘어선 사랑의 기적이었고, 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
장 발장은 두 갈래 갈림길에 섰다. 하나는 "그것으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시오"라며 주교가 건넨 은촛대가 비추는 '구원의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순간부터 평생 그의 그림자가 되어 그를 쫓는, 사랑 없는 정의이자 용서 없는 율법의 화신 자베르가 옭아매려는 '파멸의 길'이었다.
비록 가짜 신분이었지만 진정한 구원을 실현하려던 장 발장의 삶은, 주교가 건넨 은촛대가 비추는 사랑의 빛을 지키기 위해 자베르라는 율법의 그림자로부터 평생을 도망치는 숭고한 여정이었다.
사랑 없는 율법
주교에게서 받은 구원의 촛불은 장 발장 안에서 꺼지지 않았다. 그는 마들렌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고, 죽어가던 판틴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딸 코제트를 자신의 운명으로 껴안았다. 코제트를 구원하는 것은 그의 죄책감에 대한 ‘책임’이자, 받은 사랑을 되갚는 ‘순환’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순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세월이 흘러, 평생 자신을 추적해 온 원수 자베르가 눈앞에서 무력하게 사로잡혔을 때, 장 발장은 마침내 사랑의 마지막 관문에 선다. 그는 복수 대신 용서를, 심판 대신 자비를 선택한다. 자신을 또다시 파멸시키려 했던 그를 아무 조건 없이 놓아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미리엘 주교에게서 시작된 사랑이, 코제트를 거쳐, 마침내 원수에게까지 흘러 들어가는 ‘구원의 순환’이 완성되는 위대한 순간이었다.
이 거대한 사랑 앞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자베르였다. 그는 장 발장이 베푼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세계에서 죄는 반드시 벌을 받아야 했고, 법은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했다. 그러나 ‘용서’라는 비합리적인 기적 앞에서, 그의 굳건했던 율법의 세계는 뿌리째 흔들리고, 결국 그는 스스로 센강에 몸을 던진다.
그는 왜 죽음을 택했는가? 안나는 사랑을 갖지 못해(결핍) 기차에 몸을 던졌지만, 자베르는 사랑을 견디지 못해(충만) 강물에 몸을 던졌다. 자베르는 감옥 안에서 범죄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혈관 속에 흐르는 그 더러운 피를 부정하기 위해, 평생을 ‘법과 질서’라는 강철 갑옷, 즉 '율법'을 자신의 우상으로 섬기며 살았다. 그에게 있어선 ‘한 번 죄인은 영원한 구제 불능’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범죄자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이 저 타락한 무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정의의 수호자’임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 발장의 사랑이 그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죄인도 변할 수 있다”는 기적 앞에서, 그가 평생 쌓아 올린 우상(선과 악의 경계)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 장 발장의 용서는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끔찍한 혼돈’이었다. 그의 자살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거대한 진실 앞에서 자신의 낡은 세계가 붕괴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자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이렇듯 용서 없는 정의가 얼마나 공허하며, 사랑 없는 율법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그의 죽음은 증명한다.
사랑, 그 궁극의 힘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베르가 신봉한 차가운 법전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리엘 주교의 ‘조건 없는 용서’였고, 코제트를 향한 장 발장의 ‘성실한 책임’이었으며, 마침내 원수 자베르에게까지 베풀었던 그의 ‘숭고한 희생’이었다.
프롤로그에서 던졌던 가장 어려운 질문,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장 발장의 삶은 어떻게 사랑이 파멸 속에서 자신과 타인을 구원하는지, 그리고 마침내 어떻게 원수마저 용서할 수 있는지 온몸으로 증명한다. 그의 용서는 단순히 죄를 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증오와 복수라는 파멸의 법칙을 깨고 새로운 구원의 순환을 창조하는 신적인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