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의 숫자와 귀여운 여인의 거울
사랑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린 한없이 순수하고 아득한 환상의 심연으로 기꺼이 들어가야 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바로 그 기나긴 여정의 경이로운 시작점이자,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투명하고 아름답게 비춰주는 작품이다. 저 머나먼 작은 별에서 온 어린 왕자의 맑고 순수한 시선은 근원적인 진리를 영혼의 자장가처럼 고요히 속삭여준다.
하지만 이 동화를 단순히 낭만적인 환상으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생텍쥐페리가 숨겨둔 서늘한 진실을 놓치게 된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을 떠나 긴 여행 끝에 도착한 이곳 지구는, 우리가 프롤로그에서 마주했던 ‘차가운 이성의 도시’, 즉 ‘숫자만이 진실이라 믿는 어른들의 세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숫자의 감옥
어린 왕자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본질을 보지 않고 오직 ‘숫자’로만 가치를 매긴다. “창가에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노니는 붉은 벽돌집”이라고 말하면 그 아름다움을 상상하지 못하다가, “수십억 원짜리 집”이라고 말해야만 비로소 “야, 참 근사한 집이구나!”라고 감탄하는 사람들.
단순한 동화적 풍자처럼 보였던 이 이야기는, 실상 인간을 데이터와 자본으로 환원시키는 우리 시대의 비극을 겨냥한 서늘한 예언이다. 오늘날 차가운 이성과 과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인간은 그저 단백질 덩어리이며, 80억 인구 중의 하나(1/N)일 뿐이고, 언제든 다른 부품으로 대체 가능한 존재라고. 사랑조차 호르몬의 작용이며, 유전자의 생존 전략일 뿐이라고. 이러한 ‘정량화된 세계’에서 개별적 존재의 고유함은 말살된다. 이것이 바로 신이 떠난 자리를 차지한 허무주의의 민낯이다.
길들임, 유일한 신의 창조
어린 왕자가 지구의 정원에서 오천 송이의 장미를 발견했을 때 느낀 것은 단순한 실망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사랑이,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해질지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였다.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가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지구에 와보니 그저 흔해 빠진, 언제든 대체 가능한 생물학적 개체에 불과했다는 사실. 이것은 모든 신비와 의미를 벗겨내고 나면 생명은 그저 물질에 불과하다는 ‘차가운 과학적 허무’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랑이 없다면, 너와 나는 그저 수많은 탄소 덩어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 절망의 순간에 여우가 나타나 ‘길들임’의 비밀을 알려준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는 거야. 너는 나에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고, 나도 너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지.”
이 말은 관계의 기술을 넘어선 존재론적 혁명이다. ‘길들임’이란, 흔해 빠진 공산품 같은 존재에게 ‘대체 불가능성’이라는 영혼을 불어넣는 창조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고 책임을 다하며 사랑을 불어넣을 때, 그 대상은 80억 인구라는 통계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우주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존재’로 부활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감정 놀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통계 숫자나 부속품으로 취급하려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에 맞서, 서로를 ‘유일한 신’으로 격상시키는 가장 강력하고도 성스러운 저항이다.
사막의 우물
여우는 다시금 속삭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오늘날 여우의 이 비밀은 점점 잊히고 있다. 과학의 정교한 현미경은 장미의 세포 구조와 잎맥의 무늬를 완전하게 분석해 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차가운 렌즈는, 장미를 위해 밤새워 바람을 막아주던 어린 왕자의 정성이나, 장미와 이별하는 순간 흘렸던 눈물의 온도는 결코 읽어내지 못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사실’을 건네지만, 사랑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속삭인다.
그리고 이 진실은 ‘사막’이라는 배경 위에서 더욱 처절해진다. 생텍쥐페리는 왜 하필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을 무대로 삼았을까? 그곳은 신이 침묵하는 땅, 생존을 위협받는 척박한 현실 그 자체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어린 왕자의 이 말은 안락한 낭만이 아니다. 그 우물은 가만히 앉아서 기도한다고 주어지는 값싼 은총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와 비행사는 목말라 죽어가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밤새도록 걷고 또 걸어야만 우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우물은 단순히 목을 축이는 곳이 아니었다. 죽음의 사막을 함께 건너며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로 길들여진, 그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시간의 증거였다.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신이 침묵하는 이 건조한 시대(사막)에서, 의미(우물)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고 밤새도록 걷는, 즉 ‘책임’이라는 고통스러운 행군을 감내할 때 비로소 ‘발견’되고 ‘발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안락한 정원의 유희가 아니다. 메마른 사막에서 서로의 영혼이 말라 죽지 않기 위해 기어이 물길을 찾아내는, 인간의 가장 치열한 생존 투쟁이다.
삶이라는 증명
그리고 이 모든 진리는 비단 책 속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텍쥐페리 작가 자신, 그는 『어린 왕자』를 집필하던 때 혼돈의 전쟁 속에서, 침략과 폭력으로 인류의 존엄성이 위협받던 시대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자원 참전하여 행동하는 지성으로서 책임감을 다하며 인류애를 실천했다. 1944년 정찰 비행 중 실종되어 죽음마저 사랑의 신비로운 증명이 된 그의 마지막은, 수십 년 뒤 마르세유 앞바다에서 발견된 비행기 잔해처럼, 영원한 미스터리 속에서 그의 작품과 함께 인류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
사랑은 ‘길들임’과 ‘책임’이라는 행위 속에서 피어나는 상호적인 관계의 본질이며, 그것이 부재할 때 세상은 아무리 화려하고 풍요로워 보여도 메마른 사막일 뿐임을 어린 왕자와 생텍쥐페리의 이야기는 숭고하고 명백하게 증명한다.
결국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던졌던 ‘원수를 사랑하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불가능해 보이는 여정 또한, 숫자의 세계를 거부하고 상대를 유일한 존재로 길들이려는 이 작은, 그러나 위대한 반역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자아를 지우는 거울, 올렌카
어린 왕자가 보여준 사랑이 상대를 향해 나의 정성을 쏟아붓는 능동적인 '길들임'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정반대의 사랑을 마주해야 한다. 사랑이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은 때로 우리의 상식을 배반한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 ‘주체적인 나’와 ‘주체적인 너’의 당당한 만남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아가 확고하지 않은 사랑은 의존이거나 집착일 뿐이라고, 현대 심리학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경고한다.
그러나 여기, 그 ‘단단한 자아’라는 현대의 신화를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써 사랑을 완성한 기이한 여인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귀여운 여인』의 주인공, 올렌카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올렌카의 삶을 진단한다면, 그 결과는 처참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소위 ‘자기 자신’이라 부를 만한 것이 전무했다. 그녀는 마치 투명한 물과 같아서, 담기는 그릇에 따라 자신의 모양과 색깔을 송두리째 바꿨다.
극장주 쿠킨을 사랑할 때 그녀는 연극만이 세상의 전부라 믿었다. 그녀는 남편의 말투로 비평하고, 남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쿠킨이 죽고 목재상 푸스토발로프와 재혼하자,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연극을 “한심한 짓거리”라 비하하며 목재의 가격과 품질에 대해서만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또다시 수의사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가축의 질병을 걱정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바뀔 때마다 그녀의 영혼은 통째로 교체되었다.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의견, 자신만의 취향, 자신만의 세계가 없었다. 줏대 없고 수동적이며, 타인에게 기생해야만 살 수 있는 나약한 영혼. 이것이 바로 자아를 숭배하는 현대인들이 그녀에게 내리는 가차 없고 냉정한 평가일 것이다.
체호프는 자기 생각이라곤 하나 없는 이 텅 빈 여인을 조롱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귀여운 여인’이라는 사랑스러운 제목을 붙였다. 속이 텅 빈 껍데기를 ‘귀여운 여인’이라 치켜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체호프가 의도한 차가운 풍자이자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대문호 톨스토이의 눈은 달랐다. 그는 체호프가 풍자하려 했던 이 ‘주관 없는 여인’에게서, 작가조차 의도하지 못한 신성함을 발견했다. 톨스토이는 그녀를 두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줌으로써 사랑을 완성한 성녀(聖女)”라 극찬하며, 체호프의 아이러니를 뒤집어버렸다. 체호프는 ‘텅 빈 여자’를 썼지만, 톨스토이는 ‘가득 채우는 사랑’을 읽었다. 도대체 이 엇갈린 시선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톨스토이의 시선을 빌려, 체호프가 남긴 텍스트의 이면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텅 빔, 혹은 무한한 수용성
우리는 여기서 시선을 비틀어야 한다. 올렌카의 ‘자아 없음’을 ‘결핍’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능력’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이다. 현대인은 ‘자아(Ego)’로 꽉 차 있다. 내 생각, 내 취향, 내 이익, 내 자존심으로 내면이 가득 차 있어서, 타인이 들어올 공간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타인을 내 자아의 틈새에 끼워 맞추려 한다. 상대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내 취향과 다르면 배척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재료로 나의 자아를 확장하려는 ‘자기애’의 변형일 뿐이다.
반면, 올렌카는 철저하게 비어 있었다. 그녀의 내면에는 고집할 ‘나’가 없었다. 바로 그 ‘텅 빔’ 때문에, 그녀는 타인의 세계를 왜곡 없이, 저항 없이, 남김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가 극장주를 사랑할 때 연극에 몰입한 것은 연극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 남자의 세계가 그녀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것을 막아서는 ‘나의 자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동성이 아니다. 이것은 ‘급진적인 환대’이다. 자신의 영혼을 성벽이 없는 광장으로 만들어, 사랑하는 이가 마음껏 뛰어놀게 하는 능력. 타인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타인의 근심이 내 근심이 되기 위해 기꺼이 나를 지워버리는 ‘자기 비움’의 경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의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의견이 자신의 것이 될 때까지 경계를 허물어버린 것이다.
거울과 같은 사랑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졌을 때, 올렌카는 무너졌다. 그녀는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의존적이라 비웃지만, 이는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 ‘거울’이었는지를 증명한다. 거울은 앞에 선 대상이 사라지면 텅 비어버린다. 만약 대상이 사라졌는데도 거울 속에 어떤 형상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거울이 아니라 그림이다.
우리의 사랑은 대부분 ‘그림’이다. 상대가 떠나도 내 자아, 내 자존심, 내 계산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 후에도 나를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올렌카는 ‘거울’이었다. 그녀는 대상을 비추기 위해 존재했으므로, 대상이 사라지면 그녀의 세계도 멈췄다. 그것은 그녀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사랑에는 ‘보험’으로 남겨둔 자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할 남편들이 모두 떠나고 늙고 초라해진 그녀 앞에 수의사의 어린 아들 사샤가 나타났을 때, 이 텅 빈 거울은 다시 빛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제 사샤가 되어 학교 숙제를 걱정하고, 사샤의 미래를 위해 기도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를 위해 그녀는 다시 한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자아가 죽어야 사랑이 산다
올렌카의 삶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마주하게 한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자아가 약해서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아가 너무 강해서가 아닐까? ‘나’를 지키려는 그 단단한 껍질 때문에, 우리는 단 한 번도 타인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체호프는 어쩌면 그녀를 통해 ‘에고가 없는 인간의 허무함’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대한 텍스트는 때로 작가의 손을 떠나 스스로 진실을 말한다.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웅변한다. 사랑이란 내 세계에 너를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세계가 내 안에서 온전히 숨 쉴 수 있도록 나를 비워내는 일임을.
그러므로 그녀의 이야기는 의존적인 여성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Ego)’라는 현대의 우상 앞에서, ‘무아(無我)’를 통해 타인을 받아들인 한 영혼의 조용한 승리이다. 톨스토이가 간파했듯, 자신이 텅 비어있기에 누구든 채울 수 있었던 그녀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충만하고 강인한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