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숲은 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이다

세 개의 나침반

by 낭만적 반역자

이 책과 함께 떠나는 여정은 지적인 유희가 아니다. 우리는 곧바로 ‘의미의 상실’이라는 울창하고 위험한 숲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 숲은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이다. 한쪽에는 ‘신은 없다’며 모든 가치를 조롱하는 허무의 늪이 입을 벌리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나만 옳다’며 타인을 불태우는 광신의 벼랑이 아찔하게 깎여 있다. 준비 없이 이 숲에 발을 들였다가는, 길을 잃고 영혼이 질식하거나 그 벼랑 아래로 추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숲의 입구에서 공유해야 할 것은 안락한 관광 지도가 아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손에 쥐어야 할 세 개의 나침반이다. 이것은 정답을 알려주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추락하지 않기 위해 끝내 붙들어야 할 방향키이다.


첫 번째 나침반은 ‘신의 침묵’을 가리킨다.

우리가 숲에서 가장 먼저 마주할 공포는 ‘응답 없음’이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하늘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많은 이들이 절망하여 “신은 없다”고 단정 짓고 허무의 늪으로 투신한다. 그러나 이 나침반은 우리에게 멈추라고 경고한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거나 부재를 증명하며 조롱하는 것은 이 숲에서 무의미한 소모전이다. 이 나침반은 바늘을 돌려, 신의 ‘부재’가 아니라 ‘침묵’ 그 자체를 가리킨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신이 침묵하는 것이, 혹시 우리에게 마이크를 넘겨주기 위함이라면?” 이 질문의 전환만이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고, 침묵하는 신을 대신해 우리가 스스로 희망을 외치는 유일한 길이다.

두 번째 나침반은 ‘아가페(Agape)’를 향한다.

숲을 지나다 보면, 어딘가에서 우리는 분명 지치고 두려워질 것이다. 그때 우리의 본능은 속삭일 것이다. “너부터 살아라. 남을 짓밟고서라도 생존하라.” 이것은 중력처럼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두 번째 나침반이다. 이 나침반은 중력을 거스르는 방향, 즉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원수마저 끌어안으려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위험해 보이는 길, ‘아가페’를 가리킨다. 왜 굳이 이 힘든 길인가? 이기심이라는 중력에 몸을 맡기는 순간, 우리는 본능의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능의 노예가 아닌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이 숲을 통과하기 위해, 우리는 본능을 거스르는 이 고통스러운 방향을 고집해야만 한다.


세 번째 나침반은 ‘그리스도의 길’을 비춘다.

길을 잃었을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먼저 이 험한 길을 걸어갔던 선구자의 발자국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침반은 우리에게 특정 종교의 교리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인류 역사상 이 숲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가장 처절한 십자가를 지고 걸어 들어갔던 예수 그리스도의 등을 비춘다. 그의 삶은 숭배의 대상이기 이전에, 우리가 이 숲에서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생존 기록’이다. 그의 발자국이 찍힌 곳은 안전하다. 그곳에는 이미 그가 흘린 피와 땀으로 다져진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개의 나침반을 손에 쥐었다면, 이제 숨을 고르라. 숲의 초입에서 우리는 곧바로 이 시대가 마주한 가장 혼란스럽고 교활한 적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뿔 달린 악마나 흉악한 범죄자가 아니다. 너무나 성실하고, 너무나 예의 바르며,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한 ‘평범함’.

진리를 향한 이 위험한 여정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베어 넘겨야 할 덤불은, 바로 그 서늘한 ‘평범함’이라는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