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살인마는 천국에 가고, 피해자는 자살을 택했다

당신만의 천국: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by 낭만적 반역자

사랑과 구원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참혹한 실패의 현장을 목격해야 한다. 율법은 있었으나 사랑은 없었던, 구원은 있었으나 인간은 없었던 한 여인의 비극이 여기 있다.

가장 거룩한 이름인 ‘용서’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채 ‘율법’으로 강요될 때, 그것은 그 어떤 욕망의 칼날보다 더 잔인하게 영혼을 난도질한다. 소설가 이청준이 그려낸 한 편의 잔인한 성화(聖畫), 소설 『벌레 이야기』(영화 <밀양>의 원작)는 바로 이 구원의 폭력이 자행되는 현장을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유괴 당한 뒤 결국 참혹한 주검으로 발견된 한 아이의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지옥 같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주변의 끈질긴 권유로 교회에 나간다. 그리고 신의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내며 원수를 용서하기로 결단한다. 하지만 그녀가 떨리는 마음으로 교도소 면회실을 찾았을 때, 철창 너머의 살인범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나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밀약, 피해자가 배제된 천국


그 순간, 그녀의 세계는 무너져 내린다. 피해자인 자신이 아직 피를 토하며 지옥을 헤매고 있는데, 가해자는 이미 신과 거래를 마쳤다며 천국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절규한다.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이 절규는 단순한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존엄성을 박탈당한 인간의 비명이다. 그녀를 절망케 한 것은 살인범의 뻔뻔함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죄를 인간에게 사죄하는 절차를 생략한 채, 하늘로 난 비상구를 통해 도망쳐버린 그 기만적인 구원의 방식이었다. 그는 피해자의 고통을 마주하는 대신, 보이지 않는 신의 등 뒤로 숨어들어 신과의 밀약을 통해 죄책감을 털어버렸다.


이것은 결코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다. 피해자가 배제된 그 밀실의 합의 속에서 가해자가 누리는 평온함에는, 정작 그가 죽인 아이와 아이를 잃은 어미가 설 자리가 없었다. 피해자의 비명과 고통을 철저히 소거한 채 만들어진 그 역겨운 평화,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목숨마저 희생시킨 극단적 이기심의 연장이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자신만의 천국일 뿐이었다.

타인을 배제한 천국에서 가해자가 찬송을 부를 때, 홀로 지옥에 남겨진 어머니는 처절한 참담함을 느낀다. 신의 섭리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서, 살인범은 ‘거듭난 자’가 되었지만 정작 피해자인 그녀는 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 바닥을 기는 하찮은 ‘벌레’로 취급받았다는 극단의 자괴감에 빠진다. 결국 그녀는 자기를 끝까지 돌보아 온 김 집사와 남편 모두에게 유서 한 조각 남기지 않은 채, 제 손으로 약을 마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피해자를 벌레로 만들면서 완성되는 구원이 과연 신의 뜻인가? 인간의 찢어진 가슴을 외면한 채 공중에서 거래되는 용서가 과연 은혜인가? 도리어 그것은 신의 이름을 빌린 영적 테러이자, 구원을 가장한 잔인한 형태의 폭력일 뿐이다. 그렇다면 묻는다. 과연 진짜 ‘벌레’는 누구인가? 짓밟힌 그녀인가, 아니면 신의 이름을 팔아 그토록 잔인한 용서를 강요하고, 스스로 거룩하다 믿는 그들인가?

이 비극은 우리에게 뼈아픈 진실을 폭로한다. 사랑이 구체적인 인간을 향하지 않고 추상적인 교리를 향할 때, 신앙이 얼마나 날카로운 흉기가 될 수 있는지를. 그녀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녀 곁에 ‘진짜 사랑’이 한 번도 함께하지 않았음이다.


구원과 폭력


그녀에게는 ‘설명’이 아니라 ‘침묵’이 필요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이의 죽음을 두고 “하나님의 섭리”라거나 “시련을 통해 더 큰 믿음을 주시려는 뜻”이라며 섣부른 신학적 해석을 내놓았다. 자식을 잃은 어미 앞에서 그 어떤 언어가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설명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그저 손을 잡아주는 공감의 침묵만이 유일한 언어여야 했으나, 그녀 곁에는 소음만이 가득했다.


그녀에게는 ‘용서의 강요’가 아니라 ‘미워할 권리’가 필요했다. 율법은 그녀에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들이밀며 숙제를 재촉했다. 하지만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강요된 용서는 폭력일 뿐이다. 그녀가 죄책감 없이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인내가 없었기에, 복음은 그녀의 숨통을 조이는 율법으로 변질되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저 먼 하늘’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다. 교회는 자꾸 그녀의 시선을 내세로 돌리려 했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신과의 직거래로 얻는 면죄부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나누는 진실한 사과와 위로였다.


만약 예수가 그 면회실에 있었다면 어떠했겠는가. 그는 ‘자신만의 천국’에 안주하며 미소 짓는 살인범의 곁이 아니라, 기가 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얼어붙은 여인의 곁에 주저앉아, 그저 말없이 그녀와 함께 울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고통받는 자에게 ‘성스러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마음껏 슬퍼하고, 충분히 미워하고, 마침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그 비루한 바닥에서 함께 뒹굴어 주는 것이다.

벌레가 되어 죽어간 이 여인의 비명 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돈다. 강요된 용서는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폭력임을 우리는 똑똑히 목격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곳이 아니다. 율법이 아닌 사랑으로, 강요가 아닌 기다림으로, 폭력이 아닌 온기로 타인을 구원하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 혼란스럽고 위험한 숲의 입구에서,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 파멸의 늪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손에 쥐어야 할 ‘세 개의 나침반’이 있다. 이제 그 나침반을 확인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