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초대장 / 프롤로그
이 책은 이 시대의 지성과 신앙, 그리고 지혜를 대변하는 세 부류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불편하고도 도발적인 초대장입니다. 하지만 편지를 띄우는 나 역시, 펜을 쥔 손이 떨리고 있음을 먼저 고백해야겠습니다. 감히 신을 논하고 사랑을 외치기엔, 나 또한 나약한 자신과 매일 싸워야 하는 그저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을 듭니다. 침묵하는 하늘 아래, 우리가 함께 견뎌야 할 이 고독이 너무나 깊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수신인은 이성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들입니다.
당신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인류의 성인식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장례식 이후 낡은 신을 땅에 묻고, 그 위에 이성이라는 거대한 비석을 세웠습니다. 과학으로 질병을 정복했고, 자본으로 풍요를 샀습니다. 그런데 묻겠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행복합니까?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신이 떠난 빈자리를 자유로 채웠다고 믿었지만, 오늘 밤 당신과 나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지독한 ‘허무’와 ‘불안’ 아닙니까? 도스토옙스키의 경고대로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이 책은 그 폐허 위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당신에게 “신이 존재한다”고 강변하거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낡은 위로를 건네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도킨스의 말처럼 신이 ‘만들어진 망상’일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습니다. 존재가 증명되지 않으면 가치도 사라집니까? 신이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지 않기 위해 기어이 ‘발명’해내야 하는 존재라면 또 어떠합니까? 나는 당신에게 이성으로 신을 부정하는 것을 잠시 멈추고, 사랑으로 신을 ‘발생’시키는 이 불편한 실험에, 아니 이 절박한 생존 투쟁에 동참할 것을 요청합니다.
두 번째 수신인은, 경건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들입니다.
당신은 이 책이 ‘사랑’과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을 보며 안도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일부 율법을 비판하고, 낡은 교리를 ‘신성모독’이라 부르는 것을 보며 거룩한 분노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책은 당신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지’를 묻는 아픈 송곳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신을 오해했습니다. 내 뜻대로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 요정이나, 나만 구원해 주는 배타적인 수호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악이 창궐할 때 침묵하는 신을 의심하거나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무능력이 아니라, “이제 네가 사랑으로 나를 증명하라”는 엄중한 초대장이라면 어떠합니까? 만약 신이 요정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비로소 숨을 쉬는 ‘발생적 존재’라면 또 어떠합니까? 이 책은 당신에게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신앙적 용기’를 요청합니다.
세 번째 수신인은, 특정 종교의 울타리 밖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구도자들입니다.
당신은 서양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이 독선적이라 느껴져 고개를 돌렸을지 모릅니다. 혹은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길을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이 말하는 ‘사랑’이 불교의 ‘자비(慈悲)’와 다르지 않으며, 예수가 걸어간 길이 ‘무위(無爲)’의 실천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홀로 하늘로 솟구치는 서양의 수직적 신앙만으로는 위태롭습니다. 그 기둥을 받쳐줄 동양의 너른 수평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나’를 비우고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의 진실을 깨달을 때, 사랑은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호흡이 됩니다. 이 책은 서양의 아가페와 동양의 지혜가 만나는 그 깊고 푸른 숲으로 당신을 안내할 것입니다.
이 책은 경계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 서적도 아니고, 철학 논문도 아닙니다. 차라리 ‘실존적 생존 매뉴얼’에 가깝습니다. 허무가 덮친 이 시대에, ‘사랑’이라는 가장 비효율적이고 어리석어 보이는 도구를 들고 기어이 의미를 창조해 내려는, 고독하지만 숭고한 반역자들을 위한 안내서입니다.
하지만 펜을 든 저조차도 이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압니다. 사랑? 말은 쉽지만 실천은 매 순간 지옥 같습니다. 나 역시 매일 몇 번이나 실패합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커녕 이웃의 무례함조차 견디기 힘든 것이 우리네 비루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대로 혐오와 허무 속에 갇혀 공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신이 무신론자라도 상관없습니다.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만 당신의 가슴 속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이 차가운 우주에, 그리고 당신의 고단한 하루에 작은 온기 하나를 보태고 싶다면, 이미 당신은 신을 창조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혼자 가면 두렵지만, 함께 가면 길이 됩니다. 이 불편하고도 아름다운 반역의 길에, 떨리는 마음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제 『성스러운 반역』의 첫 번째 문을 엽니다.
톨스토이의 물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의 소설 속 천사는 지상에서의 삶을 통해 그 정답이 ‘사랑’임을 깨달았지만, 현실의 나에게는 그 답이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나의 고민은 톨스토이의 따뜻한 대답보다,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처절한 질문 앞에 멈춰 섰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가?”
이 질문은 불길한 예언이 되어 21세기에 당도했다. 100년 전, 시인 엘리엇은 전쟁의 폐허가 된 그 시대를 『황무지』라 명명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당시보다, 오히려 물질적 풍요 속에서 정신적 기아에 허덕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욱 소름 끼치는 적확성을 가지고 되살아난다.
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노래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잠든 뿌리를 깨우는 봄의 소생조차, 영혼이 메말라버린 자들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신이 떠난 자리에 차가운 이성의 도시를 세운 우리야말로, 엘리엇이 목격한 고통보다 더 잔인한 고통의 한복판에 서 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지적이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역사상 가장 고독하고 메마른 황무지 위에 서 있다.
그 황무지 위에서 나 또한 길을 잃었다. 신의 침묵이라는 척박한 땅을 딛고, 불확정성이라는 짙은 안개 속을 헤매야 했다. 나는 율법과 교리라는 낡은 지도의 폐허를 지나, 수많은 철학적 질문의 파편을 밟으며 나아갔다.
그 길고 지난한 탐색 끝에, 나는 역설적이게도 다시 톨스토이의 대답, ‘사랑’ 앞에 섰다. 그러나 그것은 안락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이 침묵하는 막막한 세상에서, 인간이 스스로 길을 내기 위해 선택해야 할 유일하고도 치열한 ‘구원의 방식’이었다.
‘사랑’이라는 답이 저 높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에 있다면, 신을 묻는 질문의 방향 역시 달라져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낡고 소모적인 질문의 판 자체를 뒤엎으려는 시도이다. 유신론과 무신론이 신을 ‘검증의 대상’으로 놓고 벌이는 관념의 전쟁터에서 벗어나, ‘우리는 이 침묵의 세계에 신을 어떻게 창조하고 존재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것이 있다. 이 보편적인 사랑의 길을 탐구하기 위해, 왜 나는 유독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서사에 집중하는가?
이는 그의 길이 유일한 진리라고 배타적으로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 위대한 산의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깊은 깨달음으로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 석가모니의 자비(慈悲) 역시 우리가 따라야 할 더없이 위대한 진리의 길이다. 동양의 오래된 지혜 또한 다른 길을 통해 같은 정상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길과의 만남은 우리의 여정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인간이 겪는 고통과 부조리 앞에서 사랑이 얼마나 극적이고 완전한 형태로 증명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서사이기에 나는 그가 걸어간 길을 텍스트로 삼는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가져왔다면, 나는 이 고독한 사유의 여정 끝에서 단 하나의 가치, 사랑으로 수렴되는 새로운 계명들을 제안하고자 했다. 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고 낡은 권위마저 무너진 이 시대에, 오직 사랑만이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요, 붙잡아야 할 진리임을 단호히 선언했다. 그렇게 관념의 성벽을 쌓고, 굳건한 믿음의 요새를 지었다.
선언은 쉬웠다. 그러나 삶은 어려웠다. 견고해 보였던 믿음의 요새는 현실의 문턱 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평온한 서재 안에서 고요히 속삭이는 ‘사랑’과, 처절한 삶의 한복판에서 피를 토하듯 절규하는 ‘사랑’은 과연 같은 얼굴일 수 있는가?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그 지고한 명령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정의가 짓밟히는 현실 앞에서 사랑은 침묵해야 하는가, 아니면 분노해야 하는가?
그렇게 선언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유를 마쳤다면, 이제는 그 사랑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살아있는 증명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관념의 하늘에서 써 내려간 답이 아니라, 상처와 모순으로 가득한 땅 위에서 피와 눈물로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이 순례는 신을 믿는 자에게는 믿음의 본질을,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자에게는 삶의 의미를 묻는, 우리 모두의 여정이다. 상처투성이 삶 속에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 그 고통스러운 순례를 지금 당신과 함께 시작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