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과 비범
악의 얼굴은 평범하다
20세기가 목격한 가장 끔찍한 악의 얼굴은 광신도의 불타는 눈빛이나 악마적 신념을 가진 괴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고, 심지어 성실하다고까지 느껴지는 한 관료의 건조한 얼굴이었다. 수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 실무를 총괄했던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예루살렘의 재판정에 선 그는, 그토록 참혹한 범죄를 조직하고 실행했던 장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평범한, 마치 옆집 아저씨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한나 아렌트는 전율했다. 그리고 하나의 진실을 발견한다. 거대한 악은 특별한 악인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명령을 비판 없이 따르는 평범한 사람들의 ‘무사유’에 의해 자행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그녀가 명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악이 평범함에서 비롯된다는 우리 시대의 가장 섬뜩한 진단이다.
아렌트의 섬뜩한 진단은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만약 악의 뿌리가 ‘사유의 부재’에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아이히만은 지능이 낮은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 못지 않은 지식을 가졌고, 또 누구보다도 유능한 행정가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에 있는가?
아렌트의 뛰어난 통찰에도 불구하고, 그 통찰을 더 깊이 파고들 때,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그토록 위험한 ‘무사유’는 어떻게 가능하게 되는가? 혹시 그 ‘사유의 부재’ 자체가, 더 깊은 곳에 자리한 병의 증상은 아니었을까?
악의 시스템은 언제나 개인의 구체적인 얼굴을 지운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추상적인 범주와 명패를 붙인다. ‘유대인’, ‘반동분자’, ‘이교도’. 이러한 추상성 아래에서 개인의 고통과 존엄성은 사라지고, 그는 제거하거나 관리해야 할 ‘행정적 화물'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아렌트가 지적한 ‘사유’가 멈추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아렌트는 이를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의 부재’라고 정의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그는 왜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지 못했는가?
아이히만이 멈춘 것은 두뇌 회전이 아니었다. 그가 멈춘 것은 타인을 자신과 같은 존엄한 인간으로 느끼는 감각, 즉 ‘사랑하기'를 멈췄던 것이다. 그는 수백만 명의 고통과 존엄을 숫자로, 처리해야 할 화물로, 행정 절차의 한 단계로 바라보았다. 이처럼 공감하는 사랑의 능력이 마비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의 사유는 불가능해졌고, 그의 모든 지식과 성실함은 인류 최악의 범죄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랑 없는 순수함의 비극
이 끔찍한 비극은 비단 나치 독일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불과 수십 년 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크메르 루주 정권의 핵심 전략은 바로 ‘사랑의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장 원초적인 사랑의 공동체인 가족을 해체하고,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내 인간적 유대와 공감을 배울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했다.
그들의 목표는 소년들의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랑이 제거된 텅 빈 머릿속에 ‘우리는 순수하다, 저들은 사회의 독버섯이다’라는 뒤틀린 이념을 더욱 효율적으로 주입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 마비된 채 이념적 순수함만 남은 소년 소녀들은, 안경을 썼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동족을 처형하면서도 죄책감 대신 혁명의 자부심을 느끼는 가장 효율적이고 잔혹한 도구가 되었다.
아이히만의 악이 ‘사랑 없는 성실함’에서 비롯되었다면, 킬링필드의 악은 ‘사랑 없는 순수함’이 빚어낸 지옥이었다. 즉 아이히만과 크메르 루주의 비극은, 아렌트가 통찰한 그 ‘생각의 부재’가 궁극적으로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됨을 명백히 증명한다. 사랑이 제거된 자리에서, 인간의 성실함과 순수함은 역설적이게도 사유 능력을 상실하고 그 어떤 광기보다 더 효율적이고 잔혹한 학살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절망의 증언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나치 점령하 프랑스의 작은 산골 마을 르 샹봉쉬르리뇽에서는, 평범한 마을 주민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수천 명의 유대인 난민들을 구해내는 경이로운 일이 있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서류와 시스템 속에서 인간을 ‘제거해야 할 유대인’이라는 추상적 숫자로 대했을 때, 르 샹봉의 이름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숫자를 ‘보호해야 할 한 명의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얼굴로 되돌려 놓았다. 아이히만이 사랑 없는 사유의 시스템에 복종했다면, 그들은 가장 근원적인 사유의 논리, 즉 사랑에 복종했다. 이 경이로운 공동체의 이야기는 이후에 더 깊이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렌트의 훌륭한 진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악이 이렇게 사랑 없이 평범한 모습이라면, 우리는 평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연적으로 비범해야만 한다. 악의 ‘평범성’을 짓누를 수 있는 사랑의 ‘비범함’으로 매 순간을 실천해야 옳다. 매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담아야 옳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안락하지는 않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겠다,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적 결단이며, 나를 잠식하려는 세상의 평범한 악에 맞서 스스로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치열한 저항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의 추락
그렇다면 악은 오직 '평범함' 속에만 숨어 있는가? 아이히만이 자신의 의지를 지워버린 '성실한 악'이었다면, 정반대 편에는 자신의 의지를 신보다 높이려 했던 '오만한 악'이 존재한다. 가장 낮은 곳의 성실함과 가장 높은 곳의 추락,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랑이 어떻게 자신을 배신하고 가장 끔찍한 증오의 얼굴을 하게 되는가? 이 비극적인 질문에 답하기 전에, 나는 먼저 아픈 고백 하나를 하겠다. 나 역시 ‘우리’라는 울타리가 주는 그 안락함을 사랑한다. 내 가족, 내 나라, 내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있을 때 느껴지는 그 따뜻한 소속감. 그것은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바로 그 달콤함 속에 치명적인 독이 숨어 있다.
밀턴의 대서사시 『실낙원』에 등장하는 루시퍼를 기억하는가? 그는 본래 ‘빛을 가져오는 자’라는 이름을 가진,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천사였다. 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그였기에, 역설적으로 그 사랑이 ‘자기 자신’을 향해 굽어지는 순간, 가장 끔찍한 악마 사탄으로 추락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자의 추락은 가장 깊었고, 가장 빛나던 그의 빛은 가장 짙은 어둠이 되었다.
이것은 낡은 신화가 아니다. 지금 내 안에서도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루시퍼의 비극은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경고이다. 내가 내 가족을 끔찍이 사랑할수록, 내 가족의 이익을 침해하는 타인이 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내 나라를 사랑할수록, 국경 너머의 사람들을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게 된다.
사랑을 가장한 두 가지 우상
사랑이 눈을 멀게 하는 맹목이 될 때, 그것은 신의 온화한 표정을 지우고 차가운 ‘우상의 얼굴’을 쓴다. 가장 숭고해 보이는 사랑일수록, 가장 위험한 우상이 되기 쉽다.
첫 번째 우상은 ‘부족주의’이다. “우리가 남인가?” 이 말처럼 따뜻하면서도 섬뜩한 말이 또 있을까. 울타리 안의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롭지만,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는 칼을 겨누는 이중성. 나치 친위대 장교 아이히만도 집에서는 다정한 아버지였고,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그가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것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사랑이 오직 ‘독일 민족’이라는 우상에게만 바쳐졌기 때문이다.
나라고 다를까? 나 역시 뉴스의 비극을 보며, 피해자가 ‘우리나라 사람’일 때 더 분노하고 슬퍼하지 않는가. 이 본능적인 편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우상의 얼굴을 벗길 수 없다.
두 번째 우상은 ‘신념(이념)’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완벽한 정답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특정 종교 교리나 정치 이념에 매료된다.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확신하는 순간, 우리는 그 진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교정해야 할 대상’이나 ‘청산해야 할 적’으로 보게 된다.
십자군 전쟁부터 킬링필드까지,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부른 것은 악당들의 탐욕이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확신에 찬 사람들의 삐뚤어진 사랑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완벽한 세상’이라는 우상을 사랑했다. 살아있는 인간을 신념의 우상에게 바치는 것, 이보다 더 끔찍한 신성모독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짜 사랑과 우상을 구별할 수 있을까? 기준은 명확하다. 진짜 사랑은 울타리를 허무는 방향으로 흐르고, 우상은 울타리를 높이는 방향으로 흐른다. 우상은 우리에게 속삭인다. “우리끼리 뭉치자. 저들은 위험해.”
하지만 아가페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문을 열어라. 저 낯선 타자가 바로 네가 사랑해야 할 신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사랑의 길은 낭만적인 꽃길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가장 깊은 본능인 ‘편 가르기’와 매일 피 흘리며 싸워야 하는 처절한 내부 전쟁이다.
나 역시 이 치열한 싸움의 예외는 아니다. 내 가족을 먼저 챙기고 싶은 본능,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배제하고 싶은 유혹,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싶은 교만. 이 우상들은 끈질기게 내 안에서 고개를 든다. 이 투쟁을 포기하고 안락한 울타리 안의 사랑에 안주하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사랑의 이름으로 타인에게 돌을 드는 괴물, 또 다른 루시퍼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의무이다.
신의 침묵 앞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적 과제란, 스스로 신의 얼굴을 조각할 것인가, 아니면 편리한 우상의 얼굴에 굴복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처절한 투쟁의 끝에서 우상의 가면을 벗겨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상처 입은 ‘타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응답하게 된다.
수백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아이히만의 ‘생각 없음(성실함)’이었고, 독일을 파멸로 이끈 것은 나치 지도부의 ‘빗나간 확신(오만)’이었다. 언뜻 보기에 이 둘은 정반대처럼 보인다. 하나는 명령에만 따르는 맹목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역사의 심판자가 되려 했던 교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비극의 뿌리는 하나로 연결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부재’이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성실함은 끔찍한 살인 기계가 되었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차가운 지성은 스스로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사랑이 빠진 성실은 잔혹하고, 사랑이 빠진 지성은 오만하다. 결국 악(Evil)이란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사랑’이 증발해 버린 바로 그 빈자리에, 자신만의 논리를 채워 넣은 냉혹한 이성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