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옥 속에서 피어난 사랑

by 낭만적 반역자

장 발장의 구원이 한 줄기 은촛대의 ‘빛’에서 시작되었다면, 만약 그 빛마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의 침묵과 완전한 부조리, 이유 없는 고통만이 가득한 폐허 속에서 사랑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 등장하는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바로 그 신의 침묵 앞에서,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사랑을 증명해 낸, 우리 시대가 기억해야 할 정직한 증인 중 한 명이다.


부조리와 책임


오랑 시에 닥친 페스트는 신의 징벌이나 악의 음모가 아닌, 아무런 의미도 까닭도 없는 부조리 그 자체였다. 이 거대한 허무 앞에서 많은 이들이 무너졌지만, 리유는 기도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그는 형이상학이나 추상적 정의 대신, 한 명의 의사로서 자신의 자리에 남았다. 그 자리는 절망의 눈물도, 헛된 의미 찾기도 없는, 단지 고통과 마주해야 하는 현장의 중심이었다.

그의 행동은 영웅적인 선언이 아니었다. 리유에게 그것은 ‘성실함’의 문제, 그리고 ‘책임’의 윤리였다. 그의 사랑은 낭만도 신념도 아닌, 피로와 침묵으로 얼룩진 날들 속에서 눈앞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였다. 잠을 줄이고, 피로에 절어, 매일 같이 죽음과 마주하면서도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단단한 응답을 택했다.

신이 침묵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자기 자리에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조리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사랑의 형식이자, 존엄의 최후 방어선이었다.


신 없는 세상의 기적


그러나 이 싸움은 리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성자가 되고 싶은 타루, 파리에 연인을 두고 온 이방인 랑베르, 평범하기에 더욱 위대한 영웅 그랑.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하나의 공통된 결의 아래 연대한다. 고통받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 그들의 연대는 침묵하는 하늘 아래에서,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유일한 기적이었다.

그것은 기도보다 깊고 교리보다 넓은, 존재 대 존재의 약속이었다. 신이 부재한 세계에서 인간이 서로에게 신이 되어주려는 절망 속의 윤리. 무너진 도시에서 그들은 서로의 등을 기대며 인간이 결코 잃어서는 안 될 마지막 온기를 지켰고 함께 걸었다. 고통이 모든 것을 분리시키는 세상에서, 고통을 함께 나누는 연대야말로 가장 진실한 사랑의 모습이었다.

『페스트』는 묻는다. ‘정의가 짓밟히고 절망이 세상을 삼킬 때, 사랑은 유효한가?’ 그리고 답한다. 사랑이 페스트를 단번에 종식시킬 완벽한 처방전은 아니었다. 사랑은 고통의 이유를 설명해 주지도 못했다. 그러나 사랑은 그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유일한 방향을 가리키는 ‘윤리적 나침반’이었다. 사랑은 그저 그 절망의 자리를 함께 견디는 일이었고, 짓밟힌 정의에 대한 인간의 가장 정직한 응답이었으며, 고통받는 자의 곁을 끝내 지키려는 ‘성실한 태도’였다.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이 서로에게 응답하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가능한 유일한 해답임을 그들은 증명한다.


기도하지 않는 자의 기도


리유 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신의 부재 속에서도 인간의 성실함과 책임, 그리고 연대만으로 사랑이 여전히 가능함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연대는 고통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 구원의 기적을 창조하는 가장 숭고한 시도였다.

카뮈는 신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신이 떠난 그 텅 빈 무대야말로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숭고해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최적의 장소임을 보여주었다. 초월적인 힘의 개입이 사라진 자리에서, 재앙에 맞서는 인간의 연대는 그 자체로 기적이 되기 때문이다.

리유 박사는 기도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 전체가 하나의 간절한 기도였다. 그는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의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선사했던 희생적 사랑의 충실하고 정직한 증거가 되었다.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말한다. 구원을 향한 우리의 간절한 외침은 하늘로부터의 기적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기도가 아니라, 서로의 손을 맞잡고 절망 속을 함께 건너겠다는 능동적인 다짐이어야 함을. 사랑은 그렇게 신의 침묵을 뚫고, 인간의 묵묵한 실천을 통해 이 땅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것임을.


역사의 맨얼굴


지금까지 우리는 문학이라는 거울을 통해 사랑의 다양한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어린 왕자』의 순수한 본질에서 시작해, 『귀여운 여인』의 역설, 『안나 카레니나』의 파멸, 그리고 『레 미제라블』과 『페스트』의 구원과 책임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거울을 내려놓고, 역사라는 거친 맨얼굴과 마주해야 한다.

프롤로그에서 던졌던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 ‘절망의 나락 앞에서,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 듯한 순간에도, 사랑은 여전히 유효한가?’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던, 더없이 끔찍했던 어둠 속 아우슈비츠의 철문 앞으로 가야만 한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도, 마지막까지 인간의 영혼에 남아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두 명의 증인을 통해 듣고자 한다.


안네 프랑크,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꽃


네덜란드의 작은 다락방, 은신처에서의 2년. 숨 막히는 공포와 굶주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열다섯 살 소녀 안네 프랑크는 일기를 썼다. 놀랍게도 그 일기는 증오와 절망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창밖 밤하늘을 보며 느끼는 경이로움이 있고, 소년 페터에 대한 풋풋한 설렘이 있으며,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어른들에 대한 서운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있다.

안네의 다락방은 인간성이 말살되는 현실에 맞서, 사랑과 희망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가치를 지켜내려 했던 마지막 보루였다. 그녀의 사랑은 거창한 인류애라기보다, 끔찍한 현실 속에서도 기어이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가슴 저미는 의지였다. 내일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였으며, 마침내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인간의 성품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믿는다.’고 고백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믿음이었다. 안네의 육신은 비록 무너졌으나, 그녀의 영혼은 사랑을 기록함으로써 끝내 패배하지 않았다.


빅터 프랭클, 뺏을 수 없는 자유와 의미


안네가 다락방에서 붙잡으려 했던 그 희망의 불씨가, 아우슈비츠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정신과 의사였던 빅터 프랭클은 그 지옥 속에서 살아남아, 그 해답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는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다. 가족, 이름, 머리카락, 심지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까지도.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인간에게서 결코 빼앗을 수 없는 마지막 자유가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였다.

여기서 우리는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차가운 예언을 떠올려야 한다. 프로이트는 “극한의 굶주림과 공포가 닥치면 인간의 모든 문명과 도덕은 벗겨지고, 결국 추악한 동물적 본능만 남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의 지옥은 프로이트의 확신을 배신했다. 프랭클이 목격한 것은 짐승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마지막 빵 조각을 동료에게 건네며 기도하는 ‘성자’들의 모습이었다. 인간은 본능에 굴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과 의미를 위해 본능조차 초월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였다.


절망보다 강한 사랑의 증명


안네 프랑크와 빅터 프랭클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같은 진실을 증언한다. 안네가 그 참혹 속에서 온몸으로 살아냈던 희망의 증거를, 빅터 프랭클은 살아남아 철학의 언어로 사랑의 진실을 증명했다.

리유 박사의 성실함, 안네의 희망, 프랭클의 의미 찾기. 이들의 삶은 프롤로그의 질문에 명확히 답한다. 사랑은 절망의 반대편에 있는 안락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절망이 모든 것을 삼키려 할 때, 그것에 맞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미를 부여잡으려는 인간의 더없이 처절하고도 숭고한 투쟁이다.

모든 것이 재가 된 폐허 위에서도,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 그리고 사랑해야 할 미래에 대한 책임감은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마지막 힘이 된다. 절망이 아무리 깊더라도, 사랑은 그 절망 속에서도 싹을 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