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총을 든 목사, 그는 살인자인가 성자인가

심장과 양심

by 낭만적 반역자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낮은 곳을 향하는 따뜻한 손길이 되고, 위험에 처한 이웃을 함께 지켜내는 견고한 방패가 되는지를 보았다. 그러나 만약 그 고통이 한 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짓누르는 거대한 악의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헌신이 고통의 ‘결과’를 끌어안는 일이었다면, 이제 사랑은 고통의 ‘원인’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저항의 방식 앞에서, 사랑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과 마주한다. “거대한 악 앞에서, 사랑은 폭력을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비폭력을 고수해야 하는가?”


여기, 20세기의 가장 어두웠던 현실 앞에서, 같은 신앙을 가졌으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해 자신의 삶 전체를 던져 답했던 두 개의 양심이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광기에 맞선 책임 있는 저항


불과 21세의 나이에 박사 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를 완성하여 ‘신학적 기적’이라고 극찬을 받았고, 24세에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 자격을 취득하여 강의를 했던 천재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라는 극단적인 악,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끌던 나치즘의 광기 앞에 섰다.


그는 처음에는 평화주의를 신봉했지만, 유대인을 향한 잔혹한 폭력과 이에 침묵하는 독일 교회의 무기력함 앞에서 깊은 고뇌에 빠진다. 그는 회개나 삶의 변화 없이 구원을 남발하는 교회의 타락을 ‘값싼 은혜’라 통렬히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실제로 동참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비싼 은혜’를 실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1939년,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질 무렵,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국 뉴욕의 안전한 망명길에 오른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그가 역설했던 ‘비싼 은혜’의 신학과는 정반대의 길이었기에, 그곳에서 그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자신의 조국이 저지르는 죄악의 비극과 그 광기 속에서 스러져가는 무고한 영혼들의 신음을 외면한 채, 홀로 누리는 평화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를 그의 양심은 끊임없이 물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독일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이 시기의 어려운 시련을 함께 겪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독일에서 기독교적인 삶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결국 그는 미국에 도착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죽음의 땅 독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른다. 그는 “미친 운전자가 차를 몰고 돌진할 때, 목사는 장례만 치러줄 것이 아니라 핸들을 뺏어야 한다”고 말하며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더러워질지라도 이웃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죄인이 되기를 선택했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그토록 멸시했던 ‘약자의 도덕’으로서의 기독교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니체는 타인을 압도하는 힘을 숭배했지만, 형장으로 걸어가는 본회퍼를 보라. 자신을 위해 타인을 짓밟는 힘이 강한가, 아니면 타인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죽이는 사랑이 강한가? 니체가 꿈꿨던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초인’의 형상은, 역설적으로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기독교적 가치를 붙들고 히틀러라는 괴물에 맞선 본회퍼의 형장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본회퍼는 니체가 비웃었던 사랑이, 사실은 나치의 총구보다 더 날카로운 '저항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입증해낸 것이다.


백장미단, 진실을 향한 순교


본회퍼가 악의 심장을 멈추기 위해 권력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면, 같은 시간 독일의 심장부 뮌헨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저항의 불꽃을 피워 올린 젊은이들이 있었다. 백장미단(The White Rose)의 한스와 조피 숄 남매가 그들이었다.


뮌헨 대학의 학생들이었던 그들은 총칼이 아닌 진실을 무기로 삼았다. 그들은 나치의 광기와 유대인 학살의 진실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목숨을 걸고 독일 전역에 배포했다. 체포 후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어떻게 감히 신성한 총통을 모욕하는가!”라고 소리치자, 21살의 조피 숄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 “누군가는 시작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말하고 쓴 것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감히 그것을 표현할 용기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저항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폭력이었다.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된 현실과 타협하는 대신, 가장 순수한 형태로 지켜내려 했다. 본회퍼의 총구가 악의 심장을 직접 겨누었다면, 숄 남매의 유인물은 4화에서 우리가 목격했던, ‘악의 평범성’에 젖은 평범한 독일인들의 잠든 양심을 겨누었다. 그들은 결국 단두대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들이 보여준 비폭력의 용기는 사랑이 악에 맞서는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두 가지 길


본회퍼와 백장미단. 한 사람은 악의 머리를 끊기 위해 폭력을 선택했고, 다른 이들은 악의 심장을 향해 진실의 칼을 던졌다. 한 신학자는 ‘미친 운전자를 멈추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고, 젊은 학생들은 ‘광장에 모인 침묵하는 군중을 깨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우리는 감히 판단할 수 없다.


그들은 사랑이 단순히 온유하고 부드러운 얼굴만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랑은 때로 불의의 사슬을 끊어내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되어야 한다. 다만 그 검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역사와 양심 앞에서 각자가 내려야 할 고독한 결단일 뿐이다. 그들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이 거대한 불의와 마주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저항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