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용서로 비우고 책임으로 채우다

감옥에서 왕좌까지

by 낭만적 반역자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불의에 맞서는 사랑의 저항을 보았다. 그러나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 그 폐허 위에는 무엇이 남는가? 승리의 환호 뒤에는 언제나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가해자를 향한 끓어오르는 증오가 잿더미처럼 남는다. 바로 이곳에서 사랑은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다. 악과 싸우다 스스로 악을 닮아가지 않기 위해, 사랑은 이제 ‘칼’을 내려놓고 ‘치유’의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사랑의 완성은 저항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내면의 독인 증오를 씻어내는 ‘용서’로 시작되어, 그 깨끗해진 공간을 타인을 위한 헌신으로 채우는 ‘책임’으로 완성된다. 여기서 우리는 냉혹한 ‘인과율(Causality)’의 중력을 목격한다. 가해자가 던진 폭력은 피해자의 내면에 증오라는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증오는 다시 복수라는 또 다른 폭력을 낳으려는 거대한 심리적 관성을 지닌다. 일반적인 세상의 법칙 안에서 인간은 이 과거의 사슬에 묶인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용서’는 이 견고한 인과율의 궤도를 이탈하는 인간의 가장 장엄한 반역이다. 용서는 과거라는 원인이 만드는 비극적인 결과를 거부하고, 끊어진 관계 위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는 ‘성스러운 단절’이기 때문이다. 용서로 나를 구하고, 그 구원받은 힘으로 세상을 떠받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사랑의 최종 목적지이다.


내면의 감옥을 부수다


전쟁이 끝난 후, 가장 먼저 구원받아야 할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피해자 자신’이다. 가해자가 남긴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피해자의 영혼을 갉아먹는 증오라는 독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수용소에서 언니를 잃고 참혹한 고통을 겪은 코리 텐 붐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었다. 철조망은 사라졌으나, 그녀의 마음속에는 ‘증오’라는 더 견고한 감옥이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을 그토록 학대했던 옛 수용소 간수와 마주한다. 그가 내민 화해의 손을 보며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 저에게 용서할 힘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간신히 그 손을 잡았을 때,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용서는 상대를 위한 면죄부가 아니라, 증오에 묶여 있던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 열쇠였음을. 그녀는 상대를 용서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의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그녀의 용서는 ‘상처받았기에 증오한다’는 심리학적 결정론을 무너뜨린 영적 도약이었다.


이 개인적 치유의 기적은 넬슨 만델라에게서 국가적 차원의 구원으로 확장된다. 27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그가 석방되었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피의 보복을 예고하는 폭풍 전야였다. 그러나 만델라는 단호히 말했다. “내가 감옥 문을 나서면서 증오와 분노를 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는 과거의 적들을 식탁으로 초대했고,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이었던 럭비팀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의 용서는 유약한 타협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수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무지개 국가’라는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도 전략적인 결단이었다. 그는 ‘피는 피로 씻어야 한다’는 인류사의 비극적 인과율을 향해 던진 거대한 거부권과 같았다. 이처럼 용서는 증오로 가득 찼던 내면의 방을 깨끗이 ‘비워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사랑의 물리학은 말한다. 비워진 공간은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져야 한다고.


비워진 자리를 채우는 무게


용서를 통해 증오가 빠져나간 그 ‘진공’의 자리, 그 깨끗하고 거대한 빈 공간에는 무엇이 들어서야 하는가? 여기서 사랑은 두 번째 단계로 도약한다. 바로 그 빈 자리에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는 ‘책임’을 채워 넣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높은 자리를 ‘영광의 자리’라 생각한다. 김수환 추기경과 바르톨로메오스 1세, 두 사람은 각각 가톨릭과 정교회라는 거대한 조직의 정점에 서 있었다. 화려한 예복과 수많은 신도의 존경, 세속 권력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권위. 그러나 냉정히 말해 그 자리는 사랑을 실천하기 가장 좋은 곳이 아니라, 가장 고독하고 잔인한 곳이다. 그곳은 안락한 타협과 침묵의 유혹이 끊임없이 속삭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본래 자기 보존의 인과율을 따른다. 높은 자리는 더 높은 곳을 탐하거나, 현재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주변을 희생시키는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은 그 권력의 관성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이들은 용서와 성찰로 비워낸 자신의 내면에, 권력욕 대신 시대의 십자가를 채워 넣었다.


1980년대 군부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김수환 추기경은 명동성당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공권력 앞에 홀로 섰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호통치는 도구로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장 무력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몸을 바리케이드로 내던졌다. “나를 밟고 가라. 그 뒤에 신부와 수녀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도 밟고 지나가라. 그다음에야 학생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붉은 추기경 예복은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시대의 피 흘리는 아픔을 감싸 안기 위한 수의(壽衣)와도 같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약자를 짓누르는 데 쓴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기꺼이 소진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 인과율을 거스르는 장엄한 도약이다. 나를 지키려는 본능을 꺾고 타인을 지키려는 의지를 세우는 것. 이 책임의 무게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이 장엄한 확장은 인간 사회의 울타리를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선 대지로 뻗어 나간다. 동방 정교회의 수장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종교가 인간의 영혼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병들어가는 지구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는 “환경에 대한 범죄는 신에 대한 죄”라고 선언하며, 오염된 강과 녹아내리는 빙하 위를 걷는 ‘녹색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에게 사랑의 책임은 인간의 경계를 넘어,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된 우주적 소명이었다.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왕좌


여기서 우리는 책의 앞부분에서 만났던 『귀여운 여인』의 올렌카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남김없이 비워냈던 그 여인을 기억하는가? 놀랍게도 이 거대한 지도자들의 삶은 그 여인의 삶과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올렌카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아(Ego)’를 비워냈다면, 코리 텐 붐과 만델라는 ‘증오(Hate)’를 비워냈고, 김수환과 바르톨로메오스는 자신의 ‘권좌(Power)’를 비워냈다. 올렌카의 비움이 한 사람의 연인을 위한 아늑한 ‘내면의 방’을 만들었다면, 이들의 비움은 시대의 약자들과 상처 입은 세상이 숨을 수 있는 거대한 ‘역사의 피난처’를 만들었다.

대상은 다르지만 원리는 같다. 내 증오로 가득 찬 마음에는 평화가 깃들 수 없고, 내 권위로 가득 찬 자리에는 약자가 설 곳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것이 개인의 골방에서든 역사의 광장에서든, 언제나 ‘나를 비우고 그 자리에 타인을 채우는 행위’로 증명된다.


그들은 증명했다. 용서로 자신을 구원한 자만이 진정으로 타인을 책임질 수 있음을. 그리고 가장 높은 자리는 가장 멀리 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의 신음소리를 가장 먼저 듣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아니 먼저 사랑을 깨달은 자의 의무를 묻는다면 그 대답은 명확하다. 신의 이름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기꺼이 낮아져 시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용서로 나를 비우고, 책임으로 세상을 채우는 것.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