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이가 찢겨 죽는데,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있음과 없음

by 낭만적 반역자

만약 전 인류가 눈앞의 사과처럼 명확하게 신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신은 믿음의 대상이 아닌 지각 가능한 실재가 되었을 것이고, 종교는 주관적인 신념이 아닌 과학처럼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체계가 되었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둘러싼 철학적, 신학적 논의는 무의미해졌을 것이며, 신앙은 선택이 아니라 지식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라면 인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고 어떠한 책임에서도 자유로운, 그러나 그저 정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꼭두각시 인형과 같은 존재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그러한 신의 현존은 드러난 적이 없었다. 신은 언제나 침묵했고,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사유할 뿐이었다. 신이 언제나 침묵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이야말로 신의 존재를 명확히 증명할 수 없게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부재가 곧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증명할 수 없음이 반드시 부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신은 드러나지 않았을 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즉 신은 얼마든지 존재하면서 침묵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다양하게 추측될 수 있다. 어쩌면 신은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 존재하거나, 스스로를 영원히 감추기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은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자유의지로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관찰하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신의 존재는 경험적으로 증명되거나 논리적으로 부정될 수 없는, 철저히 불확정성의 영역에 놓여 있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신을 증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인간의 좁은 잣대로 신의 있음과 없음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물음이다.


칸트가 지적했듯, 인간은 ‘인식의 안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본다. 신은 어쩌면 우리가 결코 벗을 수 없는 그 안경 너머의 ‘진짜’ 세상, 즉 칸트가 말한 ‘물자체(noumenon)’처럼, 인간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바깥의 실재일 수 있다. 우리가 우주의 끝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듯, 인간의 인식 능력을 초월하는 존재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해도, 우리는 곧바로 더 참혹하고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가장 고통스러운 질문, 즉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의 존재와 세상의 끔찍한 고통이 공존하는 딜레마인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이는 ‘만약 전능하고 자비로운 신이 있다면, 왜 죄 없는 아이가 고통받아야 하는가?’라는 절규이다.

이 질문은 냉정한 논리의 딜레마가 아니다.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인 이반 카라마조프가 자신의 동생 알료샤에게 던진, 가슴 미어지는 비극이다.


이반은 한 ‘장군’의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의 개가 어린 소년이 던진 돌에 맞아 다리를 다치자, 격분한 장군은 소년의 옷을 발가벗겨 사냥개들 앞에 세웠다. 그리고 소년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개들을 풀어 소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게 했다. 이 끔찍한 이야기를 전하며 이반은 신심 깊은 동생 알료샤에게 묻는다. “이런 짓을 한 장군을 어떻게 해야 하니? 금고형인가를 선고받았다던데, 도덕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총살형에 처해야 옳지 않아? 말해봐, 알료사!” 그러자 천사 같은 알료샤마저 하얗게 질려 일그러진 미소를 띤 채 대답한다. “총살을 시켜야죠!”


이반의 절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신이 마련한 ‘미래의 영원한 조화’를 위해 이 아이의 고통이 필요한 것이라면, 자신은 그 조화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신학적 대속이나 화해의 논리를 파괴하는, 가장 치명적인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아이의 어머니에게는 그 장군을 용서할 권리가 없어. 만일 용서하고 싶으면 자기 몫만 용서하면 되는 거야. 아이의 어머니로서 자신에게 닥친 고통에 대해서만 용서하면 되는 거야. 그러나 그녀는 사냥개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은 아이의 고통에 대해서만큼은, 설령 그 아이가 하늘에서 장군을 용서한다 해도, 어미인 그녀는 결코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는 거야!”


이반의 이 가슴 찢어지는 외침은 앞서 우리가 2화에서 만났던 『벌레 이야기』의 비극을 더욱 뼈아프게 파고든다. 아이를 잃은 엄마는 절규했다. "내가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용서하느냐"고. 하지만 이반의 논리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 그 엄마에게조차 아이를 대신해 살인자를 용서할 권리는 없었다. 죽은 아이의 공포와 고통에 대한 용서의 유일한 주체는, 그 공포와 고통 속에 죽어간 바로 그 아이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죽었다. 그렇다면 당사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도대체 ‘누가’, ‘어떤 자격으로’ 용서를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아이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그 살인자를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은 영원히 없다.


이반은 바로 이 ‘용서의 원천적 불가능성’을 통해, 신의 대속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 아이를 대신해서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이는 죽어버렸는데, 남은 자들이 신의 이름으로 화해하고 신의 조화를 운운한다면 그것이 과연 정의인가? 만약 용서할 권리가 아무에게도 없는 고통이 존재한다면, 세상의 모든 고통이 보상받고 화해한다는 천국의 ‘조화’는 기만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반은 말한다. “진리가 그런 것이라면, 나는 천국으로 가는 입장권을 정중히 반납하겠다.”


그의 선언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단순한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찢겨진 몸뚱이 앞에서 ‘신의 뜻’을 운운하는 모든 오만한 신정론(악의 존재 앞에서 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모든 신학적 시도)을 거부한 ‘윤리적 반역’이다. 만약 우리가 이 부조리한 고통 앞에서 아무런 의문도, 분노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모욕을 넘어선 진정한 신성모독, 즉 인간의 고통에 무감각한 채 사랑이라는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이반의 이 완벽해 보이는 무신론적 논리 속에, 하나의 아름다운 역설을 숨겨 놓았다. 이반은 아이의 고통 때문에 신을 거부한다고 말하지만, 그가 느끼는 그 참을 수 없는 연민과 분노야말로 신의 가장 확실한 흔적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알료사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는 신을 부정하는 이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 사상이 당신 안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아 당신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뇌를 할 수 있는 높은 차원의 마음을 주신 창조주께 감사드리시오.”


조시마는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반의 무신론은 차가운 부정이 아니라, 너무나 뜨거운 고뇌임을. 그러니 우리는 장로의 이 말을 빌려 이반에게, 그리고 우리 시대의 수많은 이반들에게 이렇게 다시 답할 수 있다.

“고통받는 아이를 위해 신을 심판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정의를 갈망하는 그 뜨거운 분노, 그 마음 그 자체가 이미 당신 안에 살아있는 ‘신의 현존’입니다. 신은 차가운 논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함께 찢어지고 분노하는 인간의 마음, 바로 그곳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이반의 절규에 ‘이론’이 아닌 ‘죽음’으로 응답한 한 사람이 있다. 폴란드의 교육자 야누슈 코르착은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아이들과 함께 트레블링카 가스실로 끌려가게 되었다. 나치 장교는 그의 명성을 알았기에 “당신은 도망쳐도 좋다”며 은밀한 사면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만 죽게 내버려 두고 나 혼자 살란 말인가?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그는 공포에 떠는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마치 소풍을 가듯 노래를 부르며 가스실로 함께 걸어 들어갔다.


지난 수천 년간 쌓아 올린 신정론의 사유 속에, 과연 이 비극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단 하나라도 존재했는가? 아니다, 없었다. 그러나 코르착의 마지막 동행은, 신이 침묵하는 가장 끔찍한 지옥에서 인간이 어떻게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작은 신’이 될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신정론으로 아이들의 고통을 ‘설명’하려 했던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언하지 못했으나, 고통을 ‘함께한’ 코르착은 신이 침묵하는 지옥에서 신이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죽음으로 증언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고통이 과연 신의 부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가? 그러나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여전히 그것은 불가지론의 영역에 남아 있다. 그렇지만 이 질문은 우리에게 신의 부재라는 사실보다 더 근원적인 진실을 폭로한다. 이 고통, 즉 죄 없는 자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시도를 윤리적으로 파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은 결국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는 신의 뜻을 추측하는 것에 머무른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답 없는 하늘을 향한 물음이 아니라, 고통받는 땅을 향한 실천일지 모른다. 특히 이러한 질문은 인간의 선택이 개입된 ‘도덕적 악’을 넘어, 지진이나 질병과 같은 ‘자연적 악’ 앞에서 더욱 첨예해진다. 자유의지의 결과로 돌릴 수 없는 무차별적인 고통 앞에서 신의 선하심은 어떻게 변호될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자연의 재앙이 신의 징벌인지, 아니면 그저 맹목적인 우연인지를 묻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재앙의 ‘원인’이 아니라, 그 재앙 앞에서 우리가 보이는 ‘응답’이다.


카뮈의 『페스트』가 보여주었듯, 페스트라는 부조리한 재앙의 의미는 그것이 왜 시작되었는지가 아니라, 그 재앙 속에서 리유 박사와 그의 동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들은 기도하거나 절망하는 대신, 연대하고 책임지며 고통받는 타인의 곁을 지켰다. 이처럼 자연의 무자비한 재앙 앞에서 인간이 서로에게 보여주는 사랑이야말로, 그 부조리한 고통의 한복판에 의미를 창조하는 유일한 행위이다.


어쩌면 신의 이 지독한 침묵과 불확정성이야말로, 인간을 ‘어째서?’라는 답 없는 질문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고 ‘어떻게!’라는 능동적이고 실존적인 응답을 선택하게 하는, 가장 준엄한 ‘자유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자연악의 문제 또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근거가 아니라, 인간에게 사랑의 책임을 묻는 가장 준엄한 무대가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인간의 고통을 무작정 멈춰 세우는 기적의 존재’로 바라보는 대신, ‘인간 스스로가 고통을 마주하고 해결해 나갈 책임을 부여하는 존재’로 이해해야 한다. 즉, 악의 문제는 신의 전능함이나 자비로움을 의심하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불확정성 속에서 능동적으로 선을 실현할 윤리적 소명을 일깨우는 질문이 된다. 신은 고통을 주거나 거두는 주체가 아니라,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찾고 실천하도록 이끄는 영원한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신의 존재 유무는 확증될 수도, 부정될 수도 없는 상태, 즉 불가지론적 영역에 머문다. 신이 인간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누군가 ‘신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신앙적 확신일 뿐, 누구에게나 자명한 보편 진리는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정직하고 철학적으로 성숙한 대답은 ‘알 수 없다’이다. 그러나 이 ‘알 수 없음’은 단순한 무지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존재를 영구히 보류된 상태로 열어두는 깊은 통찰이다. 이는 ‘신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는 수준을 넘어, ‘신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알 수 없다’는 겸허한 인식에 다다른다.


그러므로 불확정성은 신의 실재 가능성을 항상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시킨다. 만약 언젠가 신이 그 존재를 명확히 드러낸다면, 이 불확정성은 종결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알 수 없음’은 끝없는 진행형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진행형의 상태야말로, 신의 존재 가능성을 영구히 유효하게 만드는 사유의 공간이 된다. 신은 박제된 정답이 아니라, 인간의 질문 속에서 끝없이 떨리는 진동으로 존재한다. 신은 확정된 명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내는 동사이다. 그러므로 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알 수 없다’는 우리의 가장 정직한 고백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중이다.


하지만 그 고백은 우리를 뼈아픈 고독 앞에 세운다. 신이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침묵하는 세상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절대적 기준은 사라지고, 이제 나를 판단하고 규정할 권한은 오직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타인 역시 똑같은 권한을 가진 심판관이라는 데 있다.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선언했다. 내가 나의 우주에서 주인이려 하는데, 타인의 시선이 닿는 순간 나는 그저 그들의 눈에 비친 하나의 사물(객체)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평가에 의해 난도질당하는 것, 그 지옥 같은 시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문을 걸어 잠그고 철저한 고독 속으로 숨어드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인간은 고독한 섬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가 앞서 만났던 도로시 데이와 같은 성자들은 사르트르의 이 차가운 명제에 온몸으로 저항한다. 그녀가 보여주었듯,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 비로소 신을 만나는 유일한 ‘천국의 문’이었다. 사랑 없는 자유는 독방에 불과하지만, 사랑으로 연결된 자유는 구원이 된다. 우리는 고립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연결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