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것
신의 존재가 불확정적이며, 그 불확정성이 인간 정신과 문명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된 지금, 인간은 그 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 여부를 확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의 사유와 문화, 윤리 안에서 실재처럼 작동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대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선다. 존재에 대한 낡은 질문의 잔을 비워내고, 이제 가치라는 새로운 술을 채워야 할 시간이다. 이는 곧 신이 우리 삶에 어떻게 가치 있게 작용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 된다.
신은 이름과 형식에 따라 다르게 형상화되지만, 하나의 공통된 경향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올바름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름의 신을 믿든, 또는 신을 믿지 않든, 인간은 종국적으로 ‘좋음’, ‘선함’, ‘정의로움’과 같은 개념에 이끌린다. 신은 그러한 궁극적 가치의 상징이자,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상상의 구심점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올바름을 지향한다’는 것과, 실제로 ‘올바르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역사상 수많은 전쟁과 억압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올바름’을 자처했던 이름 아래 자행되었다. 따라서 ‘올바름을 지향한다’는 것은 반드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지향하는 바가 진정 ‘참된 올바름’인지 아닌지를 끊임없이 묻고, 그것을 확인할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 기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 현세의 삶,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감수성에서 나와야 한다. 참된 올바름의 모습은 알 수 없는 미래나 신비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지금 현세에서 인간이 서로에게 행하는 말과 행동, 공감과 책임 속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초월적 보상이나 신의 심판이 아니라, 현세적 타자와의 관계가 도덕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길을 걷다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를 보았을 때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 아이의 종교나 신념을 묻지 않고, 단지 아이의 고통을 보고 마음 아파하며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운다. 이러한 행동은 천국에 가기 위한 계산적인 행위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느끼는 연민과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즉시적이고 본능적인 ‘올바름’의 발현이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웃을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봉사하거나,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역시 ‘신의 명령’이 아닌 인간의 윤리적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올바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관점에 대해 어떤 이들은 냉소적인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 우리가 ‘숭고한 가치’라 부르는 사랑이나 연민조차, 결국 종족 보존을 위한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이나 뇌의 화학적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진화생물학자들은 차가운 메스를 들이대며 인간을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생존 기계’로 규정한다. 그들은 우리가 숭고하다고 믿는 사랑조차 치밀한 계산의 결과로 환원시킨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이타심은 내가 남을 도우면 언젠가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계산인 ‘상호 이타주의’나, 나의 도덕적 우월함을 과시해 집단 내 평판을 높이려는 ‘과시적 전략’에 불과하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분석은 생물학적 동물로서의 인간을 설명하는 데 있어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다. 우리 안에는 분명 나의 생존과 번식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유전자의 명령이 각인되어 있다. 배고프면 먹고, 위험하면 도망치고, 내 것을 빼앗으면 분노하는 것. 이것은 생존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알고리즘이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이 강력한 알고리즘에 순응할 때가 아니라, 도리어 그 알고리즘에 치명적인 ‘오류’를 일으키며 저항할 때 비로소 증명된다.
바로 여기, 그들의 차가운 계산기로는 도저히 답을 낼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생존 기계의 알고리즘을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 사람, 손양원 목사이다. 그의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본능을 거스르고 있었다. 여수의 애양원에서 그는 전염의 공포를 넘어, 한센병 환자들의 환부에 직접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생물학적 생존 기계의 법칙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유전자의 반란’은 1948년 여순사건 때 일어났다. 좌익 청년 안재선이 손양원의 두 아들을 총살했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단지 기독교 신자였고, 우익 활동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이념과 증오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유전자의 논리대로라면, 아버지는 분노해야 했고 복수해야 했다. 내 유전자를 파괴한 경쟁자를 제거하여 남은 가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생물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될 운명에 놓인 안재선을 살려낸 것은 다름 아닌 두 아들의 아버지, 손양원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에게 탄원했다. “그를 죽이면 나는 아들을 잃는 슬픔에 살인자가 죽는 슬픔까지 더하게 됩니다. 그를 살려주시면 내 아들로 삼겠습니다.”
그의 탄원은 기적적으로 받아들여졌고, 사형 집행 직전 안재선은 풀려나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의 딸 손동희는 울부짖었다. “오빠들을 죽인 원수와 어떻게 한 상에서 밥을 먹습니까!” 딸의 비명은 지극히 정상적인 유전자의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딸을 설득하였고 그를 아들로 입적시켰다. 안재선은 그 압도적인 용서 앞에 무릎 꿇고 평생을 참회 속에 살았다.
이 ‘반역’의 서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사람들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위험이 닥치면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라는 것,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 새겨진 제1의 본능이다. 하지만 손양원은 피난을 거부했다. 자신이 떠나면 몸이 불편한 한센병 환자들은 굶어 죽거나 학살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강력한 본능인 ‘생존’마저 내려놓고, 스스로 죽음의 자리에 남았다. 결국 그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죽는 순간까지 그는 자신을 쏘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자, 그렇다면 도킨스여 이제 대답해 보라. 아들을 죽인 자를 양자로 삼은 이 비논리가, 과연 당신이 말한 ‘상호 이타주의’인가? 이것이 평판을 위한 ‘과시적 전략’인가? 복수의 본능을 거슬러 원수를 아들로 삼고, 생존의 본능을 거슬러 죽음의 자리에 남은 이 삶을 도대체 어떤 이기적 유전자가 설계했단 말인가?
과학은 이것을 뇌의 ‘오작동(Misfire)’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인류는 이것을 ‘성스러움(Holy)’이라 부른다. 이것은 유전자의 독재에 맞선 인간 영혼의 쿠데타이다. 혈관 속에서는 “복수하라”, “도망쳐라”는 본능이 펄펄 끓었겠지만, 그는 그 목소리를 ‘사랑’이라는 의지로 짓눌러버렸다. 손양원은 삶과 죽음 전체로 증명했다. 인간은 호르몬의 노예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라면 본능조차 거스를 수 있는 ‘성스러운 반역자’임을 말이다.
설령, 과학자들의 냉소적인 분석을 받아들여 본다고 가정하자. 손양원 목사의 용서가 뇌의 특이한 화학작용이고, 이태석 신부의 헌신이 이기적 유전자의 고도로 계산된 생존 전략이라고 치자.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 ‘화학작용’이 피를 부르는 원수 간의 살육을 멈췄고, 그 ‘생존 전략’이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원이 무엇이든,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 사랑의 ‘기능’이었다.
물리학적으로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자장가는 단지 공기의 진동일 뿐이다. 그러나 엄마에게 안긴 아이는 그 공기의 진동에서 사랑을 느끼며 곤한 잠에 든다. 사랑을 호르몬으로 환원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장가를 주파수 그래프로 환원하는 것과 같은 명백한 ‘범주의 오류’이다. 과학은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설명할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공멸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들의 차가운 팩트가 허무함만을 줄 때, 우리의 ‘낭만적 당위’는 실제로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지탱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 어느 쪽이 더 유효한 전략인가?
손양원의 삶이 증명하듯, 진정한 가치는 과학이 탐구하는 생물학적 ‘원인’의 영역을 넘어, 인간이 스스로 결단한 윤리적 ‘의미’의 영역에서 비로소 탄생한다. 진정한 가치가 원인이 아닌 의미의 영역에서, 인간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신의 존재가 불확정적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의 해방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무지와 혼돈으로서의 해방이 아니라, 자율성과 책임으로서의 해방이다. 신이 모든 것을 결정짓지 않기에, 인간은 자신이 어떤 가치와 삶을 따를지를 스스로 선택하고 실현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신은, 단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와 실천의 자극제가 된다.
그러므로 신은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 그 가치는 단지 기복적 목적이나 심리적 위안을 넘어, 진정한 윤리와 존재의 방향을 구성하는 하나의 사유틀로서 작동한다. 우리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자신의 양심과 경험에 비추어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 일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천하게 된다. 신은 모든 것을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인간에게 끊임없이 사유하고 사랑을 실천할 무한한 여지를 열어주는 존재가 된다. 결국 이 글이 제안하는 신앙이란, 신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지적 노력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부재와 침묵 속에서도, 기어이 사랑을 선택하고야 마는 인간의 위대한 윤리적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