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석가모니의 겨자씨와 예수의 눈물이 말하는 진실

부처의 손길: 마술과 울림

by 낭만적 반역자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기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참된 올바름이 인간적 경험을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면, 그리스도가 실현했다는 나사로의 소생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단 말인가?

이 질문은 기적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기적이 단순히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초자연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복종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이미 앞선 장들에서, 신이 실증될 때 철학은 멈추고 자유는 소멸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기적 역시 동일한 원리에 따라 사유되어야 한다. 기적은 인간을 굴복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사유와 성찰을 자극하는 윤리적 계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 탄생 500년 전, 석가모니가 있었다. 그의 기적은 나사로의 소생처럼 세간을 놀라게 하는 물리적 사건이 아니었다. 한번은, 이미 죽어버린 자식을 안고 슬픔에 빠진 고타미라는 여인이 석가모니를 찾아와 아이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석가모니는 그녀에게, ‘한 번도 죽은 사람이 없었던 집’에서 겨자씨 몇 알을 구해오면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여인은 기뻐하며 마을로 내려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으나, 마을 어디에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집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집을 다 돌아다닌 후, 여인은 비로소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한다는 보편적 진실을 깨닫고 스스로 슬픔을 이겨냈다. 고타미가 겪은 것은 이처럼 상실의 치유였고, 그 치유는 자연법칙의 역전이 아닌 보편적 슬픔을 통과한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겨자씨를 찾아 나선 여인의 여정은 바로 기적을 기다리던 이가 스스로 기적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적이다. 왜냐하면 이 기적은 타자의 슬픔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되었고, 인간 스스로의 인식과 성장으로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죽은 자를 살리지 않았지만, 죽은 자를 붙잡고 절망하던 산 사람을 구했다. 여기서 기적은 자연의 논리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절망을 감싸 안는 공감의 윤리로 전환된다.


나사로의 이야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문자 그대로의 기적은 초월적인 능력의 과시처럼 보이지만, 이야기의 깊은 곳에 담긴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예수가 위대한 것은 무덤에서 나사로를 소생시킨 그 능력 때문이 아니라, 나사로의 죽음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고통 앞에서 멈추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었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위협이 극에 달해, 제자들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한복음 11:8)”라며 만류할 정도였음에도, 예수는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나사로를 찾아 베다니로 향했던 것이다. 그가 위대한 것은 이 모든 실존적 위험과 감정을 감내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적은 죽음을 무력화하는 권능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보여준 사랑이다.


우리는 신의 존재가 불확정된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므로 기적 또한 그 본질이 변화해야 한다. 과거에는 기적이 곧 신의 증거였다. 그러나 이제는 신의 실존이 확증될 수 없듯, 기적 역시 사실 여부로 평가되지 않고, 실존적 울림과 윤리적 감응의 깊이로 평가되어야 한다.


예수가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물리적 사건의 불가능성 때문이 아니다. 그가 풍랑을 무릅쓰고 제자들에게 다가갔다는 점, 두려움 속에서도 함께하려 했다는 점, 공포를 극복한 사랑이라는 서사가 그것을 기적답게 만든다. 기적이란 바로 그 사랑, 그 용기, 그 공감의 순간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만약 기적이 단지 물리적 법칙의 파괴라면, 그것은 마술과 다르지 않다. 기적은 신적 능력의 초월적 증명이 아닌,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태도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기적이 지금도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는 것들- 나사로의 소생, 오병이어의 나눔, 물 위를 걷는 그리스도……. 이 모든 서사의 진정한 힘은 자비, 공감, 희생, 사랑이라는 윤리적 감응에서 비롯된다.


기적은 법칙을 넘어선 사건이 아니라, 사랑이 법칙을 뚫고 나오는 순간이다. 여기서 일컫는 ‘법칙’이란 자연의 인과관계와 같은 물리적 법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고정관념, 냉정한 계산, 관습화된 차별, 혹은 보복과 단죄의 논리를 의미한다. 사랑은 이처럼 굳건해 보이는 인간적 법칙들, 즉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규칙이나 합리적 사고의 틀을 깨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손해를 감수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유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다. 불교의 ‘공(空)’이 집착을 끊고 자비를 실현하는 것이나, 유교의 ‘인(仁)’이 형식적인 예(禮)를 넘어 본연의 사랑을 회복하려는 것과도 그 맥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기적은 교리를 막론하고 형식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사랑의 파격 속에 존재한다. 신의 이름으로 율법을 내세워 정죄하려던 이들을 멈춰 세우고 용서를 택한 예수의 행동처럼, 사랑은 인간이 정한 모든 경계를 넘어선다. 그것은 곧 인간의 이성과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가장 인간적인, 윤리적 비약의 순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석가모니의 겨자씨도, 예수의 눈물도, 모두 같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


신이 인간의 사유 속에서 실재하듯이 기적 역시 실재한다. 왜냐하면 기적은 사유이고 실천이며, 인간이 서로를 위해 감행하는 작고 위대한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기적을 행한 신이 아니라, 기적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가르쳐준 인간이다.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가치 있는 신’이자 ‘참된 올바름의 상징’인 이유는, 그가 남긴 기적이 눈앞의 마술이 아닌, 마음속의 울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