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과 오늘
“그러나 예수가 재림하여 세상의 종말이 올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 예수의 이 대답은 단지 한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는 종교적 언술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 불확정성을 선언한 말이다. 그리고 이 불확정성은 두려움이 아니라 해방의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가 언제 그날을 맞이하느냐보다 어떻게 그날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실로 예수가 그날을 알고 있었다 해도, 아마 그는 똑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이 특정될 수 없기에, 모든 날이 그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아들도 모른다’는 말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자리에 있는 역설적 진실이다. 신조차 알 수 없다고 한 그날, 그때는 역설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실재하는 윤리적 촉구가 된다.
예수는 우리에게 ‘끝이 있으니 준비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태복음 24:42)”라고 가르쳤다. 이는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 즉 ‘매 순간이 끝이라 여기고 살아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 말은 기적의 재정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종말 역시 사건이 아니라 태도임을 일깨운다. 종말은 인간의 역사를 마감하는 초자연적 시간표가 아니라, 인간 각자가 자기 삶의 끝을 매 순간 맞이하며 살아야 하는 실존적 책임의 이름이다.
그렇기에 종말을 예언하고 날짜를 특정하는 모든 시도는 ‘아들도 모른다’는 말의 진심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런 시도는 신을 자신이 통제 가능한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불경한 욕망에 가깝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만, 예수의 가르침과는 아무 상관 없는 예수의 껍데기만을 쓰는 새로운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
우리가 신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 신이 우리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더 크다는 것은 곧, 우리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종말의 때를 알고자 하고, 그것을 확정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신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려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시도이다. 예수는 바로 이 지점을 거부했다. 그는 ‘나도 모른다’는 고백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어떤 지점에서 신을 닮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신을 모방하는 길은 전능함이 아니라 겸허함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 겸허함은 단순히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지하고 타인의 존재와 고통 앞에 마음을 여는 태도이다. 우리가 신의 뜻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겸허한 인식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을 부여한다. 우리가 신의 뜻을 확정할 수 없기에, 모든 인간은 동등한 불확정성 속에서 오직 자신의 양심과 공동체의 안녕을 기준으로 삼아 행동해야 한다. 오만하게 ‘신의 뜻을 안다’고 주장하며 타인을 배제하거나 심판하는 대신, ‘모른다’는 겸허한 자세로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신을 따르는 길이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권고가 아니다. 인간이 신의 뜻을 안다고 자만하며 타인을 재단하고, 자신의 신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며 폭력을 정당화할 때, 그 순간 인간은 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 위에 군림하려는 모든 시도는 스스로의 무지와 오만을 드러내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으로 신을 따르는 길은, 불확정성 앞에서 겸손히 고개 숙이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을 인정하며, 오직 사랑과 연민의 태도로 세상을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종말론을 말하려면, 그 말은 날짜나 사건이 아니라 태도와 방향이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 종말은 언젠가 도래할 비극의 시계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갱신되는 실존적 물음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참된 올바름 안에 서 있는가?’, ‘내가 만나는 이 타자에게, 나는 얼마나 책임을 지고 있는가?’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믿음은 그 심판이 언제인가가 아니라, 무엇에 의해 판단되는가를 묻는 믿음이어야 한다. 참된 심판은 초월적 시간의 어느 순간에 떨어지는 절대 명령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의 삶과 행위를 판단하는 윤리적 긴장이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타인을 사랑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이미 심판받은 것이다.
‘아들도 모른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앎은 언제나 부분적이고, 우리의 삶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러나 그 불완전성 속에서 끊임없이 올바름을 향해 나아가려는 중단 없는 윤리적 여정이야말로, 예수가 그 말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기적이다.
그러니 그는 몰랐기에 위대했다. 그는 알 수 없음을 선언함으로써, 인간 존재 전체를 책임 앞에 세웠다. 그는 신의 아들이었기에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모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름을 가르침으로 바꾸었다. 어쩌면 그는 정말로 그날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가 진정으로 알고 있었기에 ‘모른다’고 말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말 속에는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겸허, 불확정성과 윤리, 신과 인간이 맞닿을 수 있는 정직하고 투명한 접점이 있었다. 그는 모른다고 말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