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진리는 경전에 갇히지 않는다

절름발이

by 낭만적 반역자

아인슈타인은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라고 했다. 나는 이 위대한 물리학자의 통찰을 빌려, 오늘날의 우리에게 단호히 말하고 싶다. “사랑 없는 종교 또한 절름발이”라고.

우리는 진리를 곧게 걷는다고 믿어 왔다. 율법을 따르고, 도덕을 말하고, 신의 뜻을 좇는다고. 그러나 그 발걸음은 늘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계율은 형식이 되고, 정의는 복수로 탈바꿈하며, 믿음은 심판의 무기가 되었다.

이 장에서 말하는 ‘절름발이’는 바로 그런 뒤틀린 진리와 절름거리는 신앙, 그리고 사랑을 상실한 윤리의 형상이다. 이는 타인을 향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자화상이다.


앞선 장에서 우리는 진정한 신성모독이란 신을 향한 비방이 아니라, 인간을 억압하는 종교적 권위 속에 숨어 있는 모독임을 살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신성모독이란 형식적이고 편협한 틀 속에 예수를 가두는 행위이며, 그 틀이 찍어내는 작고 커다란 온갖 모양의 지옥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강요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예수의 이름이 오히려 지옥을 만들어내는 비극적인 틀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그 왜곡된 현재에서 벗어나 모든 것의 시작점, 즉 근원으로 돌아가 물어야만 한다. 신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낸 예수의 진짜 가르침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오직 사복음서, 즉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 안에 담겨 있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예수의 말과 행위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 바로 이 네 개의 문서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구약의 율법도, 바울의 서신도 아닌, 먼저 사복음서를 가장 근본적인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 종종 대립되는 구약의 일부 율법까지도 동일한 권위로 수용하고 있다. 이는 신앙의 뿌리를 모세에 두는 일이며,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은 기독교의 본질과는 모순된다. 이러한 율법들은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고, 어긋남에는 징벌을 선포하지만, 예수는 사랑을 기반으로 죄를 덮고 용서를 가르친다. 이 둘을 무비판적으로 나란히 받아들일 때, 기독교 교리는 불가피하게 절뚝거리게 된다. 하나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하나는 팔을 벌리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 신학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구약의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다양한 연결 시도를 해왔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더 깊이 물어야 한다. ‘완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의 모순까지 그대로 계승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의 계시가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심화되었다고 본다면, 구약의 율법은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한계 속에서 주어진 최선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율법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몽학 선생(고대 로마 시대에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훈육하던 임시 교사)’처럼, 그 역할이 한시적이었을지언정,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그 정신이 ‘사랑’이라는 더 높은 차원으로 성숙하고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구약의 율법을 포함한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이자 최종적인 ‘열쇠’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비판하는 것은 성경 그 자체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을 무시한 채 문자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문자주의(Literalism)’의 위험성이다. 성경 안에도 다양한 목소리와 장르가 공존함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핵심 메시지인 ‘사랑’을 길어 올리는 것이야말로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신앙인의 독서 방식이다.


성경은 누가 구성한 것인가? 창세기가, 레위기가, 마태복음이, 사도행전이, 어떻게 성경이라 불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여호와가 규정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명령한 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책들은 인간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한 것이다.

가령, 초대 교회의 히포 공의회와 카르타고 공의회는 오늘날의 신약 27권 목록을 확정했고, 종교개혁기 트렌트 공의회는 가톨릭의 정경을 최종적으로 재확인했다. 이처럼 성경은 신의 계시가 아닌, 인간 공동체의 신학적 판단을 통해 만들어졌다. 가톨릭과 개신교, 정교회 간의 경전 수가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혹자는, 모세오경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친히 쓰신 십계명 돌판을 모세에게 주셨다’는 기록까지 있으니, 모세오경만큼은 신의 직접 계시라며 별개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가 돌판을 받았다는 그 전승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 역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성서가 어떻게 쓰였는지, 누구에 의해 선택되었는지를 따지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그 가르침이, 예수의 사랑과 일치하는가?’

이 기준을 넘지 못한 가르침이라면, 아무리 성경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그리스도의 복음과는 무관하다. 기독교는 모세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모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세워진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살아 있는 진리이다. 그것은 인간의 회의로 결정된 경전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계시된 사랑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언행과 정신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성경에 적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내용을 맹종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돌로 쳐 죽이라’는 것처럼 증오와 징벌의 구절이라면, 우리는 다시금 신성모독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번엔 성부가 아니라, 성자를 모독하는 셈이다.


기독교의 교리들이 절뚝거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하나는 사랑으로 걷고, 다른 하나는 율법으로 걷는다. 하나는 용서를 노래하고, 다른 하나는 형벌을 외친다. 이 두 다리가 한 몸에 붙어 한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때, 교리는 절름발이가 된다. 때로는 가슴을 울리는 진리가 나오다가도, 이내 갑작스럽게 꺼지거나, 심지어 사랑을 모욕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같은 성경 안에, 사랑의 진리와 잔혹한 폭력이 함께 담긴 것이다.


우리는 오래된 전통이라는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치열한 의심과 검토가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인간을 억압하는 율법에 맞서 사랑을 택했고,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독교인 역시, 아무리 성경이라 불리는 것이라도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배격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지 않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경전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는 예수의 말과 손길, 눈빛과 침묵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살아 있는 자비이고, 생명의 기운이다.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사회의 불의에 맞서 침묵하지 않는 양심, 그리고 보복의 유혹 속에서도 용서를 택하는 실천에서 우리는 진정한 진리의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끊임없이 증명되고 실현되어야 할 윤리적 행동 그 자체이다. 진리를 문자로 고정하고, 제도에 봉합하고, 율법으로 감금하려는 시도야말로 가장 은밀한 형태의 배교이며, 가장 비극적인 신성모독이다.


예수는 걸으셨다. 우리가 신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그는, 먼지를 뒤집어쓴 발로 인간의 땅을 걸으셨다. 그 발걸음은 똑바로 곧았고, 사랑으로 일직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우리들의 교리는 절름발이다. 그 한쪽 다리는 여전히 억압의 옛 율법을 붙잡고 있고, 다른 한쪽은 예수의 복음을 좇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절름발이 걸음으로 ‘진리의 길을 걷고 있다’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걸을 것인가? 올곧은 걸음으로 예수의 발자국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석판을 추앙하며 절뚝거리며 남겨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