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니체, 매혹적인 악마의 치명적인 유혹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by 낭만적 반역자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신의 불확정성이 인간에게 자율성과 책임을 부여하며, 진정한 기독교는 율법이 아닌 사랑에 기반해야 함을 살폈다.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참된 올바름’임을 확인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인물인 이반이 제시한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명제를 재고하고, 그리스도의 영생이 의미하는 바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반 카라마조프는 죄 없는 자의 고통과 세상의 불합리 앞에서 신이 창조한 세상을 거부한다. 그는 신의 부재가 가져올 자유를 통해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이복동생 스메르차코프는, 이반의 인류애가 부재한 채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아버지를 살해한다. 결국 스메르차코프는 죄책감에 자살하고, 이반 또한 자신의 사상이 초래한 이 끔찍한 비극, 즉 ‘사랑 없는 지성’이 맞이한 ‘존재론적 파멸’ 앞에서 정신착란에 빠져 죽어간다.


이반의 비극은 사랑 없는 이성과 자유가 얼마나 위험한 칼날이 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사상이 인류의 행복을 열망하면서 신의 부재를 통찰했으나, 그 사상과 통찰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결합하지 못했을 때, 삶은 공허와 파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가 잉태한 사상은 스메르차코프와 같은 ‘사랑 없는 행동주의자’에게 악용되어 가족의 비극을 넘어선 존재론적 파멸로 이어졌으니, 이는 이성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참된 올바름, 즉 사랑의 부재가 초래하는 필연적 귀결이었다.

이반의 명제,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그렇게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파멸된다’는 더 깊은 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린다. 이것은 중요한 것, 그러니까 가치 있는 것은 ‘신의 있음 없음’이 아니라 ‘사랑의 있음 없음’이라는 우리의 명제를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진리는 신의 유무가 아닌 사랑의 유무이기에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있다. 면죄부를 팔고, 마녀사냥을 저지르고, 이교도를 배척하며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신했을 때, 우리는 니체를 본받아 ‘신은 죽었다’고 소리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도 그리스도는 죽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예전에도 참되었고 지금도 참되며 앞으로도 참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인간의 해석과 오용에 따라 죽을 수 있어도, 그리스도는 죽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한복음 14:6)”라고 선언했을 때, 그 ‘나’는 특정 종교의 교주로서의 갇힌 예수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율법을 넘어 자신을 내어주는 ‘아가페적 사랑’, 그 원리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길’이란, 바로 그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는 여정이다.


이렇듯 사랑 그 자체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강력한 ‘힘’이다. 사랑은 때때로 집착이나 광기가 될 수 있는 인간의 강력한 본성을 긍정하면서도, 그 본성을 선한 방향으로 정제시키는 숭고한 책임감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사랑의 가치를 전복시킨다. 그는 자신을 내어주는 이타적인 사랑인 아가페적 겸손과 동정을, 강자에 대한 약자들의 증오와 질투, 즉 ‘원한(르상티망: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질투와 복수심이 내면화된 상태. 니체는 기독교의 사랑이 이 감정에서 출발했다고 보았다)’에 기초한 나약한 ‘노예 도덕’이라고 맹렬히 비난한다. 니체에 따르면, 이 ‘노예 도덕’은 강자의 힘을 ‘악’으로, 약자의 순종을 ‘선’으로 규정하는 ‘가치 전복’의 산물일 뿐이었다.


그러나 니체의 비판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길을 잃는다. 그가 ‘아가페’라는 숭고한 이상 그 자체를, 그 이상을 배반했던 역사 속 ‘기독교인들’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니체가 저지른 이 ‘동일시의 오류’는, 마하트마 간디의 통찰 앞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것은 당신들 기독교인들입니다.” 간디는 ‘그리스도(이상)’와 ‘기독교인(현실의 실패)’을 명확히 분리했으나, 니체는 이 둘을 뒤섞어버림으로써 인류의 가장 위대한 가치를 모욕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심지어 그의 이러한 비난은 그 자신의 철학적 무기인 ‘관점주의(Perspectivism)’에 의해서도 무너진다. ‘객관적 사실은 없고 오직 해석만이 존재한다’고 선언했던 그가, 유독 아가페만큼은 ‘노예 도덕’이라는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한 모순을 보라. 그의 비판조차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면, 우리는 왜 아가페라는 ‘더 위대하고 숭고한 해석’을 선택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 위대하고 숭고한 해석을 선택하는 순간, 니체의 진단은 결정적인 문제점에 부딪힌다. 그것은 바로 ‘원한 없는 사랑’의 존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의사라는 안정된 삶을 버리고 20년간 이어진 내전의 상처로 신음하던 아프리카 남수단으로 떠난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 과연 나약한가? 니체가 ‘노예 도덕’의 온상이라 맹비난했던 바로 그 ‘기독교의 성직자’였던 그는 맨손으로 직접 흙벽돌을 구워 병실을 짓고, 한센병 환자들의 썩어가는 발을 맨손으로 어루만지며 치료했다. 그의 사랑은 패배자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그가, 아무런 복수심도 원한도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약자들을 위한 숭고한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이 과연 니체가 말한 노예의 도덕이었는가? 그의 헌신은 약자가 강자에게 행하는 정신적 복수가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자가 아무것도 없는 자를 향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준, 가장 능동적이고 강력한 사랑이었다. 이는 니체의 ‘원한’ 개념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아가페의 초월적 힘을 보여준다.


아우슈비츠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 수감자가 탈출했다는 이유로 수용소 측이 다른 수감자 10명을 본보기로 ‘아사형(굶겨 죽임)’에 처하려 할 때, “내 아내와 아이들은 어쩌나!”라며 절규하는 한 폴란드인 가장을 대신해,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가 스스로 죽음을 자처했던 그 희생적 사랑 역시 ‘노예 도덕’이라 칭함이 정말 옳단 말인가? 그의 행위가 과연 약자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처럼 현실의 숭고함 앞에서 니체의 진단은 그 설명력을 잃는다.


물론 니체의 칼날은 정당한 곳을 겨누기도 했다. 약자가 자신의 무능력을 ‘겸손’으로 포장하거나, 강자에 대한 질투를 ‘정의’로 둔갑시킨 역사 속 기독교의 위선은 분명 그가 말한 ‘노예 도덕’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간과한 것은, 진정한 아가페는 결코 나약함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콜베나 이태석의 사랑은 원한에서 나온 보복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을 타인에게 쏟아붓는 가장 강력하고 주체적인 ‘힘에의 의지’였다. 니체는 기독교의 타락(현상)을 비판하느라, 사랑 그 자체가 가진 생명력의 절정(본질)까지 도려내는 오류를 범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감히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 도덕을 분석하기 위해 사용했던 ‘원한’이라는 날카로운 심리적 메스가, 역설적으로 그 자신에게도 향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아가페적 삶이 주는 지난한 책임을 외면하고 고독한 초인의 길을 택한 그의 철학 속에, 어쩌면 그 자신이 비판했던 약자들의 ‘정신 승리’와 닮은 모습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응답할 수 있다. 그리스도처럼 아가페를 실천할 용기가 없다면, 적어도 그것을 실천한 위대한 영혼들을 노예라고 조롱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철학적 분석이 아니라, 숭고함에 대한 열등감이 빚어낸 비열한 모독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더 무거운 답변은, 그의 사상이 잉태한 비극적인 파멸, 즉 ‘사상의 책임’이라는 준엄한 문제 앞에 설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도발적인 논의를 잠시 남겨두고, 우리는 다시 니체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인 ‘힘에의 의지(Will to Power)’ 자체를 되물어야 한다. 니체에게 ‘힘에의 의지’는 자신을 극복하고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려는 모든 생명의 근원적 동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의지가 발현되는 방식에 여러 차원이 있음을 보아야 한다.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원초적인 힘에의 의지가 있다면, 자신의 생존 본능과 이기심을 정복하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려는, 더욱 고차원적인 힘에의 의지도 존재한다.


콜베 신부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보여준 의지는, 생존하려는 다른 모든 이들의 힘에의 의지를 압도하고 뛰어넘는, 가장 위대하고도 순수한 ‘힘에의 의지’의 발현이었다. 아가페는 힘의 ‘부재’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힘이 자신의 원초적인 본능과 이기심마저 극복한 궁극의 형태이며, 이는 니체가 말한 ‘자기 극복’, 즉 자신의 나약함과 본능적 욕망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그 ‘내면적 투쟁’의 가장 숭고한 완성이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니체가 예언한 ‘초인(Übermensch)’의 문제와 직결된다. 니체의 초인은 기존의 낡은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 즉 ‘삶을 긍정하는’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니체 자신의 용어인 ‘가치 전도(Transvaluation of values)’를 수행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묻는다. 증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용서의 가치를 세우는 것보다, 이기심이 법칙인 세상에서 희생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가치 전도’가 어디 있는가? 세상의 몰이해에 맞서는 철학자의 고독한 의지도 위대하지만,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 했던 장기려와 이태석의 숭고한 의지는 어느 쪽이 더 세상을 힘 있게 변화시켰는가?


그런데, 애초에 니체의 초인 개념 자체에 치명적인 모순이 숨어 있다. 니체의 관점주의에 따르면 모든 진리는 주관적 해석일 뿐, 객관적 사실은 없다. 초인이 “나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선언조차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즉, 누구나 자신을 초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초인이라 믿는 그 순간, 타인은 나를 얼마든지 노예 도덕의 잔재로, 혹은 정신병자나 범죄자로 해석할 수 있다. 절대 기준이 사라진 세계에서 초인 여부는 외부 검증이 불가능한 자기 긍정의 자기최면, 즉 허상에 불과하다. 이는 사랑 없는 지성이 만들어낸 가장 위험한 상대주의의 극치이며, 누구든 자신의 폭력적 욕망을 ‘숭고한 자기극복’이나 ‘초인적 가치’로 포장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는 구조적 취약점이다.

이 모순 앞에서 니체의 초인은 숭고한 이상이 아니라, 무정부적 혼란과 파괴를 초대하는 위험한 환상으로 무너져 내린다.


그러므로 진정한 초인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고독한 철학자가 아니라, 죽음의 현장에서 ‘사랑은 살아있다’고 온몸으로 증명하며, 현실의 극한 상황에서도, 아니 어쩌면 스스로 타인을 위해 그 극한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 ‘희망’을 창조함으로써, ‘삶을 긍정하는’ 가장 궁극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처럼 니체가 던진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 즉 ‘힘’과 ‘초인’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우리를 다시 아가페적 사랑의 가치로 되돌아오게 한다.


그리고 이는 ‘삶의 모든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가’라는 그의 또 다른 시험대, ‘영원 회귀’의 문제 앞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우리는 삶의 매 순간을 긍정할 수 있는가? 모든 고통과 기쁨, 실수와 성취가 정확히 지금과 똑같이 영원히 되풀이된다고 해도 기꺼이 다시 살겠다고 외칠 수 있는가? 이 무서운 질문을 마주했을 때, 니체는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하는 ‘초인’만이 이를 긍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무섭고도 준엄한 질문을 철학적 언어로 던진 최초의 인물은 니체가 아니었다. 이미 한 세기 전,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한 인간의 전 생애를 무대 위에 올려, ‘만족을 몰라 영원히 방황하는 영혼을 마침내 멈추게 할 단 하나의 순간은 무엇인가?’라는 영원 회귀와 똑같은 모습과 무게를 지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미 그는 그 질문의 답까지 내놓았다. 과연 어떤 순간이 영원히 되풀이될 가치가 있는 순간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도달한 마지막 순간을 함께해야 한다.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그 어떤 순간이든 진심으로 만족하여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면 영혼을 넘긴다는 계약을 맺고, 지식, 쾌락, 권력이라는 인간 욕망의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는 ‘공허한 영원’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허한 영원이었기에 당연히 그 어떤 이기적인 쾌락과 성취도 그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했고, 그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속에서 끝없이 방황했다.


그런데 그의 끝없는 질주를, 그 공허한 영원을 마침내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아가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 눈먼 노인이 된 그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땅에서 살아갈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둑을 쌓는’ 숭고한 비전을 떠올린다. 그리고 바로 그 타인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상상하는 순간, 드디어 그는 일생을 바쳐 찾아 헤매던 궁극의 만족감에 휩싸여 악마에게 영혼을 넘겨야 하는 그 말을 외친다.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감격에 겨운 파우스트의 바로 그 외침에서 우리는 영원 회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공허한 영원을 멈춘 그 만족, 어떠한 쾌락도 지식도 권력도 채울 수 없었던 공허함을 더없는 궁극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그 시간이 영원히 멈추기를 바란 그 만족의 순간이야말로, 영원 회귀의 시험 앞에서 삶 전체를 긍정하게 하는 유일한 모습인 것이다.


니체의 시험을 통과하는 가장 위대한 삶의 모습은, ‘나의 의지’를 실현하고 ‘나의 힘’을 확장하며 ‘나의 자기 극복’을 완성하려는 고독한 의지의 영원한 반복을 넘어, 타인을 위한 사랑 속에서 실현된 단 한 번의 숭고한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그 감동에 있다.

이 진실은 역사 속 증인들의 삶으로 이어진다. 이태석 신부가 맨손으로 흙벽돌을 굽던 순간, 콜베 신부가 절규하는 가장을 위해 죽음을 택했던 순간, 그들의 영혼은 파우스트가 마지막에 도달했던 바로 그 만족감, 즉 가장 강력한 ‘힘에의 의지’를 발현했다. 그것은 정복하고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의지가 아니라, 절망의 땅에 희망을 심고, 증오의 공간에 사랑의 가치를 세우려는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창조적 의지였다.


만약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절망할까?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순간보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하며, 가장 강력한 가치를 창조한 그 순간을 기꺼이 다시 살겠노라고, 파우스트처럼 그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도록 그 순간이여 멈추라고 외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한 바로 그 순간이여 멈추라고 소리껏 외칠 것이다.

이처럼 영원 회귀는 단순히 삶을 긍정하는 것을 넘어, 삶의 어떤 순간을 긍정할 것인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이며,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그리스도의 아가페적 사랑에 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의 최종적 시험대는, 다름 아닌 사랑의 순간을 영원히 반복할 용기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과하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 병원에서 하루 열여섯 시간을 일했다. 그는 괴테 연구자이자 바흐 전문 오르간 연주자였고, 신학과 의학을 모두 마친 사람이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의 조건을 가장 완벽하게 갖춘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들고 정글로 들어갔다. 누군가 왜 그런 삶을 택했느냐고 묻는다면, 슈바이처는 그것을 포기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랑바레네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종착지가 아니라, 자신이 믿는 윤리를 삶으로 시작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니체의 철학은 영원회귀의 시험 앞에서 사유로 남았지만, 슈바이처의 삶은 그 시험을 행동으로 통과했다.


그렇기에 니체가 이 영원 회귀의 시험에 응답하여 삶 전체를 긍정하는 궁극적인 태도로 요구했던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외침 역시 아가페적 사랑 앞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다.

과연 진정한 운명애는 고작 ‘나의 운명’만을 끌어안는 고독한 자기 긍정에 머무르는가? 콜베 신부와 이태석 신부의 삶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운명애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넘어, 아우슈비츠의 죄수, 남수단의 병자라는 ‘타인의 고통스러운 운명’마저 자신의 운명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하기로 결단했다.


이것이야 말로 니체가 상상했던 자기중심적 운명 긍정을 뛰어넘는, 타인의 운명마저 자신의 것처럼 긍정하고 사랑하는 더없이 숭고한 태도이다. 나는 이 태도를 니체의 자기애를 넘어서는 진정한 운명애, 즉 ‘타자-운명애(他者-運命愛)’라 부르려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가페적 사랑이 보여주는 가장 궁극적인 형태의 ‘자기 긍정’이며, 니체의 시험대를 넘어서는 진정한 영생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논파는 어쩌면 이미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니체의 사상이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그의 철학이 앞에서 언급했던 칸트의 ‘물자체’나, 혹은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를 통해 세계 전체를 하나의 이성적 체계로 설명하려 했던 헤겔의 ‘변증법’과 같은 견고한 논리의 성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칸트와 헤겔이 반박 불가능한 ‘인식의 체계’를 세웠다면, 니체는 ‘가치의 전복’이라는 망치를 휘둘렀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석가모니, 공자, 그리스도 등,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들이 수천 년에 걸쳐 증명하고 가르친 가장 숭고한 가치, ‘사랑(아가페)’을 ‘노예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맹비난한 것이다. 그의 도전은 무모하다기보단 황당무계했다


그의 철학이 이토록 허술하고 무리수였던 것은, 애초에 그 사상의 뿌리부터가 온전히 자신의 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사상을 지탱하는 가장 유명한 선언, “신은 죽었다”는 외침조차 엄밀히 말해 그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다.

니체보다 반세기 앞서, 시인 하이네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신을 논리적으로 난도질했다며 그 파괴적인 광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제 끔찍한 파괴의 광경이 펼쳐진다. ... 보라, 늙은 여호와(Jehovah)는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이 비참하게 쓰러졌다. ...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피 웅덩이 속에 힘없이 누워 있다. 칸트의 차가운 이성이 그를 난도질했다. 저기, 저 작은 종소리가 들리는가? 무릎을 꿇어라. 사람들은 지금 죽어가는 신에게 마지막 성체를 나르고 있다.”


훗날 니체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 등장하는 ‘광인’이 외쳤던 신의 장례식과 피 냄새는, 사실 하이네의 이 시적인 통찰을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하이네는 칸트가 이성으로는 신을 죽였을지언정, 인간의 도덕적 삶을 위해 다시 신을 요청(『실천이성비판』)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이 과정을 풍자적으로 그리며 이성 너머의 ‘윤리적 안전장치’를 남겨두었다.

하지만 니체는 하이네의 통찰에서 ‘죽음’과 ‘피’의 이미지만을 취사선택했다. 그는 하이네가 남겨둔 인간적인 여지(풍자)와 칸트가 마련한 윤리적 안전장치(도덕적 요청)를 모두 거세해 버리고, 그 위에 ‘초인’이라는 고독한 우상을 세웠다. 선대 지성들의 깊은 고뇌가 담긴 텍스트마저, 자신의 입맛대로 잘라내어 극단으로 몰고 간 것.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그 독선적인 지성,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랑 없는 지성’의 전형적인 태도가 아닌가?


그렇기에 그가 콜베 신부와 같은 위대한 영혼들의 희생을 ‘노예’의 것으로 폄하하는 순간, 그의 철학은 이미 진리와 영원히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니체의 선언과 도전은 어리석은 이카루스의 밀랍 날개일 뿐이었다.

니체가 망치로 부수려 했던 그 모든 것들 중, 신앙의 낡은 체계와 오류, 그리고 위선은 무너졌을지언정, 그가 맹비난했던 ‘사랑’의 가치는 전혀 파괴되지 않은 채 여전히 진리로 굳건함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특정 시대의 종교적 인물을 넘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가치, 즉 사랑의 상징으로서 우리 안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쉰다. 그의 영생은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자, 참된 올바름을 향한 영원한 여정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