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히틀러는 니체의 가장 성실한 독자였다

사상의 책임

by 낭만적 반역자

우리는 앞선 장에서 니체의 가장 강력한 무기들이 역설적으로 아가페적 사랑의 위대함 앞에서 어떻게 해체되고 재해석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그러나 니체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단순히 그의 철학을 논파하는 것을 넘어선다. 그의 사상이 남긴 비극적인 파멸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상의 책임’이라는 더 무겁고 준엄한 문제 앞에 서게 된다.


니체의 ‘초인’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가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 그토록 경고했던, “신이 없다면 내가 신이다”라고 선언하며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오만한 ‘인신(人神)’의 철학적 쌍둥이 동생일 것이다. ‘인신’과 ‘초인’은 똑같이 ‘신의 죽음’ 이후 스스로 신을 대신하려 했던 고독한 개인의 의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 없는 ‘인신’의 실패와 그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은, 이미 이반 카라마조프의 정신세계가 낳은 서사시, ‘대심문관’ 안에 모두 예언되어 있었다.


16세기 스페인, 세비야의 태양은 이단자를 태운 화형대의 연기만큼이나 뜨거웠다. 바로 전날, 90세의 늙은 대심문관은 거의 100명에 달하는 죄인을 불태우는 거대한 신앙고백 행위를 주관했다. 국왕과 귀족마저도 그의 권력 앞에 침묵하는, 그야말로 교회의 권위가 국가 위에 군림하던 시대였다. 그 잿빛 공포가 도시를 감돌던 바로 그곳에, 1500년 만에 예수가 말없이 돌아온다. 그는 소리 없이 기적을 행하고, 군중은 그를 알아보며 경배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갑게 지켜보던 대심문관은 자신의 경호병에게 명령하여 그를 체포한다.


그날 밤, 축축한 감옥의 돌벽을 타고 흐르는 희미한 횃불의 그림자 아래, 철문을 열고 홀로 들어온 대심문관은 정좌한 죄수 앞에 섰다. 지난 90년의 고뇌가 뼈만 앙상한 얼굴에 깊게 파인 노인은, 인류를 위해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끔찍한 비밀의 무게로 마른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그래, 바로 너로구나. 왜 우리를 방해하러 왔는가?”

죄수는 말이 없었다. 그 무거운 침묵을 깨고 노인은 자신의 비극적 선택을 절규하듯 토해냈다.


“나는 인류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알기에, 너를 버리고 광야의 그 현명하고 무서운 악마의 손을 잡았다. 너는 인간을 과대평가하여 그들이 감당할 수도 없는 ‘자유’를 주었지만, 나는 인간에게서 그 짐을 거두어주겠다. 그리고 나는 네가 광야에서 단호히 거절했던 그 세 가지 악마의 유혹(마태복음 4장), 즉 인간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빵(물질적 충족)’과, 그들의 나약한 이성을 굴복시킬 ‘기적(초월적 권능)’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할 ‘권위(세속적 지배)’를 받아들여, 인류를 구원하고 마침내 이 지상에 낙원을 건설하겠다.”


그러면서 대심문관은 자신의 긴 독백을 이렇게 맺는다.

“나는 할 말을 다했다. 이제 네가 할 말이 있다면 해보아라. 나는 내일 너를 화형에 처할 것이다!”

대심문관의 외침이 차가운 돌벽에서 사라졌을 때, 죄수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인류를 너무나 사랑하여 스스로 신을 배신한 그 늙은 반역자에게 다가가,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고요히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유죄를 선고하는 뇌성과도 같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봄비와도 같았다. 수만 마디의 논리를 불태워버리는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입맞춤의 온기가 가슴속에서 불길처럼 타오르자, 대심문관은 몸을 떨었다. 예수의 키스가 그의 심장을 불태웠지만, 그는 도저히 자신의 사상을 바꿀 수 없었다. 그는 감옥 문을 열며 속삭였다.
“가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절대로!”


예수가 행한 이 침묵의 키스는 신을 배신한 노인을 향한 무한한 연민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는 용서의 표현으로 읽히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의 논증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그 키스가 단순한 연민과 용서를 넘어, 대심문관의 장대한 논증 전체를 뿌리째 뒤흔드는 완전한 철학적 반박임을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행위로 답한, 다음과 같은 장엄한 선언이다.

“아니, 너의 논리는 틀렸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빵도 기적도 권위도 아니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로운 사랑이야말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자신의 서사시 속에 스스로 그 답을 숨겨 놓았던 이반은, 예수의 입맞춤이 상징했던 사랑의 진실을 감당하지 못했다. 대심문관의 논리는 바로 이반 자신의 것이었다. 인류에 대한 지적인 사랑을 명분으로 스스로 신이 되어 그들을 구원하려는 ‘인신’의 길. 그러나 이 거대한 야심은, 그의 지성이 잉태한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위험한 자유가, 사랑 없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스메르차코프라는 ‘일그러진 거울’ 속에서 끔찍한 존속 살해로 귀결되면서 산산이 부서진다. 결국 그는 그 사랑의 부재가 빚어낸 끔찍한 현실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러한 이반의 비극은 사랑 없는 자유가 초래하는 필연적 파멸에 대한 서사적 경고였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그 창조성을 상실하고, 바로 이 실패가 예고된 ‘인신’ 실험을 오만하게 답습하는 지성의 모습이다. 실제로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를 “나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유일한 심리학자”라고 극찬했으며, 특히 소설 『악령』 속에서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인신(人神)’ 키릴로프의 비극을 읽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그가 도스토옙스키가 경고한 ‘오만한 자아의 파멸’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이미 주어진 ‘사랑 없는 자유는 파멸한다’는 준엄한 교훈을 의도적으로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그 파멸의 원인이 아닌 ‘사랑’을 제거하기 위해, 이태석 신부나 콜베 신부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숭고한 정신적 가치마저 ‘노예 도덕’이라고 폄하했다. 그는 인류가 가야 할 가장 안전하고 지혜로운 길을 ‘옳지 못한 것’으로 규정했고, 그의 사상은 결국 끔찍한 파멸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위험한 편집자가 남긴, 안전장치가 제거된 이 불온한 텍스트는 불행히도 역사상 가장 끔찍한 독자를 만나게 된다. 니체의 문장들은 주인 잃은 칼처럼 거리에 나뒹굴었고, 그 칼자루를 쥐어 든 것은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항간에서는 니체의 여동생이 유고를 악의적으로 조작하여 그의 사상을 나치에 이용당하게 했다는 주장을 들어 니체를 변호하려 한다. 그녀가 니체 아카이브를 나치 선전 기관으로 활용하고 ‘초인’개념을 아리아인 우월주의로 왜곡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질은 조작 여부가 아니다. 근본 원인은 여동생의 편집이 아니라, 니체 철학 자체가 ‘약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윤리적 안전장치를 스스로 제거한 구조적 결함에 있다.


물론 니체와 히틀러 사이에는 제국주의와 광기 어린 민족주의라는 시대적 간극이 존재한다. 니체가 살아 돌아온다면 자신을 오용한 나치를 보며 구토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상가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그가 ‘약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유일한 제동장치를 스스로 파괴해 버렸기에, 그의 사상은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폭주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다.


역사상 그 어떤 독재자도 예수의 ‘사랑’이나 석가모니의 ‘자비’를 인종 학살의 이론적 근거로 삼지 못했다. 그들의 사상 중심에는 ‘타인을 해치지 말라’는 강력한 윤리적 안전장치가 박혀 있어, 악용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니체의 사상은 나치즘, 파시즘, 우생학자들에 의해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악용되었다. 무솔리니는 니체를 “나의 스승”이라 불렀고,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니체 전집을 생일 선물로 주기도 했다. 한 번은 오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반복해서 칼자루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사용자의 잘못을 넘어 그 사상 자체에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이 내재해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라. ‘힘’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사랑(연민)’이 경멸의 대상이 되는 세계관에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도구화하는 것을 도대체 어떤 논리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님을, 우리는 소설과 역사의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평행이론을 통해 목격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나치로 인한 20세기의 참극이 벌어지기 반세기 전,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이미 이 모든 파국을 예언해 두었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신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오만한 지성으로 낡은 도덕을 파괴했다. 그리고 그의 이 위험한 사상을 맹신했던 동생이자 하인인 스메르차코프는 그 이론을 문자 그대로 실행에 옮겨 ‘파렴치한 아버지’ 표도르를 살해하는 끔찍한 패륜을 저질렀다.


이 구도는 20세기 역사에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현되었다. “신은 죽었다. 초인이 되어라”며 기독교 도덕을 파괴했던 ‘사상의 설계자’ 니체는 소설 속 이반이었고, 니체의 “약자는 도태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사랑의 첫 번째 원칙이다”라는 비정한 문장을 경전처럼 받들어 인종 청소(홀로코스트)를 자행한 ‘사상의 실행자’ 히틀러(나치)는 현실판 스메르차코프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의 최후마저 거울처럼 닮아있다는 점이다. 소설 속 스메르차코프는 자신의 범죄를 감당하지 못해 목을 매달아 자살했고, 현실의 히틀러 역시 패전의 공포 속에서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또한, 자신이 잉태한 사상이 끔찍한 살인으로 귀결된 것을 목격한 이반이 죄책감에 시달리다 섬망증으로 정신착란(미침)을 일으켰듯, 자신의 철학이 광기로 치닫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던 니체 역시 토리노의 광장에서 말의 목을 껴안고 쓰러진 뒤, 10년 동안 정신병을 앓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인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안전장치가 제거된 지성은 필연적으로 괴물을 낳을 수밖에 없으며, 그 끝은 결국 설계자와 실행자, 그리고 무고한 생명들 모두에게 파멸뿐임을.

실제로 소설 속에서 스메르차코프는 이반에게 그 책임을 물으며 이렇게 단언한다. “진짜 살인자는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의 하수인이었을 뿐입니다.” 이 섬뜩한 고백은 오늘날 역사라는 법정에서 히틀러가 니체를 향해 던지는 증언과도 같다.


물론 어떤 이들은 반론할 것이다. 예수의 사랑도 십자군 전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로 오용되지 않았느냐고. 니체가 나치에게 이용당한 것 역시 그와 같은 억울한 오해가 아니냐고.


그러나 이것은 본질을 완전히 호도하는 궤변이다. 우리는 ‘위반’과 ‘실행’의 차이를 명백히 구분해야 한다. 예수의 사상 중심에는 “타인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강력한 윤리적 안전장치(브레이크)가 박혀 있다. 따라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위반’하고 배신한 것이다.


반면, 니체는 어떠한가? 그는 “약자에 대한 연민을 버려라”, “힘에의 의지가 곧 정의다”라며 그 안전장치(사랑)를 스스로 제거해 버렸다. 나치는 니체의 사상을 위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브레이크가 제거된 니체의 사상, 즉 ‘약자에 대한 동정은 나약함에서 비롯된 질투와 원한의 감정’이며, ‘나의 힘이 곧 정의’라는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게 ‘실행’했을 뿐이다. 브레이크가 있는 차를 몰다 운전자가 고의로 사고를 낸 것(십자군)과, 애초에 설계자가 브레이크를 제거하고 “마음껏 질주하라”고 만든 차가 사고를 낸 것(나치)은 차원이 다르다. 후자의 경우, 그 책임은 명백히 ‘구조적 결함’을 설계한 사상가에게 있다. 이것이 니체가 히틀러라는 괴물의 탄생에 대해 변명할 수 없는 이유이다.


결국 이 위험한 ‘윤리적 공백’이야말로, 외부의 ‘악용’에 의해 비로소 위험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윤리적 심장을 스스로 도려냄으로써 그 위험을 ‘필연적으로’ 잉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파멸은 결코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니체가 그토록 존경했던 도스토옙스키는 이미 앞선 비극을 통해, 사랑이 거세된 자유가 맞이하는 필연적 최후를 ‘초인’이 아니라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명백한 서사로 증명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가장 비극적인 아이러니, 아니 어쩌면 전혀 아이러니가 아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비극이 발생한다. 니체 자신이 생전에 그 누구보다 독일 민족주의의 광기와 저열한 반유대주의를 혐오하고 경멸했다는 사실은, 이 사상적 비극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의 의도는 숭고했을지라도, 그의 사상은 왜 그토록 쉽게 그가 가장 혐오했던 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인류 최악의 범죄를 위한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이 비극은 우리로 하여금 니체가 과연 ‘위대한 천재’였는지 근본적으로 되묻게 한다. 높은 지성은 마땅히 높은 책임감과 지혜를 수반해야 한다는 준엄한 기준 앞에서, 니체는 자신의 사상이 초래할 파국에 대한 명백한 ‘취약성’을 간과했다. 그는 도스토옙스키가 서사적으로 증명한 그 구체적인 경고를 오만하게 외면하고, 오히려 파멸의 유일한 해독제였던 ‘사랑’을 독약으로 규정했다. 그가 ‘힘에의 의지’라는 강력한 무기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것이 괴물의 손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할 ‘사랑’이라는 그 윤리적 안전장치를 스스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윤리적 통찰을 결여한 ‘지성의 배신’이며, 그의 사상은 이 준엄한 기준 앞에서 위대하기보다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니체를 학술적으로 비판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걸음을 멈추고,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라져 간 그 수많은 목숨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간절히 원했던 것은 니체가 말한 ‘초인의 힘’이나 ‘고독한 권력’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누군가의 따뜻한 ‘연민’이었고, 자신들을 지켜줄 ‘사랑’이라는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그 생명줄을 ‘노예의 것’이라며 조롱하고 끊어버렸다. 남의 사상을 말없이 가져오고 가장 중요한 ‘사랑’만을 도려낸 뒤, 그 자리에 ‘힘’이라는 자극적인 포장을 씌워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을 화려한 명품인 양 포장해서 인류에게 던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기서 잠시 철학의 난해한 용어들을 걷어내고, 아주 단순하고 냉정한 상상을 해보자. 이 사상이 과연 ‘천재적인’ 것인지, 아니면 인류를 공멸로 이끄는 ‘어리석은’ 것인지 판별하는 데는 복잡한 논리가 필요 없다. 단지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하다.

“만약 80억 인구 모두가 니체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모든 인간이 타인에 대한 희생을 ‘노예 도덕’이라며 걷어차고, 오직 자신의 주체적인 힘과 의지만을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며 산다고 가정해 보자. 그곳에서 양보는 패배이고, 배려는 위선이다. 신호등은 무시될 것이고, 약속은 힘센 자의 기분에 따라 파기될 것이며, 거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피비린내 날 것이다. 그것은 초인의 낙원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는 완벽한 지옥이자, 문명의 자살일 뿐이다.


더욱 섬뜩한 것은, 이 지옥도가 단지 ‘사랑이 없어서’만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의 본질은 무엇인가? 초인은 “자기 스스로 가치의 근원이 되려는 인간형”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최종 기준이 더 이상 신도, 전통도, 보편 윤리도 아닌, 오직 ‘나’에게 달려 있다고 선언하는 존재다. 설령 어떤 초인이 사랑을 선택한다 해도, 그 사랑은 나를 넘어선 절대 명령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채택하기로 결정한 하나의 미덕에 불과하다. 사랑이 나를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내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옵션이 되는 순간, 그 사랑은 더 이상 아가페일 수 없다. 오늘은 나의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해 사랑을 베풀더라도, 내일은 나의 강인함을 과시하기 위해 얼마든지 잔혹한 파괴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준이 오직 '나의 기분'과 '나의 의지'에 달려 있는 한, 그 사랑은 언제든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 시한폭탄과 다름없다.


상상해 보라. 80억의 인간이 각자 “내가 가치의 기준이다”라고 선언하는 세상. 80억 개의 작은 신들이 서로 다른 법전을 들고 맞부딪치는 세계다. 그곳에서 사랑은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의 기준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힘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할 때만 동원하는 세련된 수단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이 지옥의 뿌리는 더 깊다. 니체는 인간이 고립된 섬이 아니라 사회적 동물, 즉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했다. A가 “내 가치 = 힘과 자기 긍정”이라 선언하고, B가 “내 가치 = 연민과 공동체”라 선언하면, 둘은 필연적으로 충돌한다. 누가 옳은가? 니체의 답은 “더 강한 쪽이 옳다.”이다. 이 논리는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재현할 뿐이다.

니체는 대부분의 인간은 “마지막 인간”으로 남고 초인은 극소수라고 변명하지만, 이건 더 큰 문제를 낳는다. 초인이 나머지를 지배해도 정당한가? 초인들끼리도 가치 충돌이 생기면 결국 힘의 게임으로 끝난다. 그의 ‘가치 스스로 창조’는 현실에서 적용될 수 없는 어리석은 환상일 뿐이다. 훔쳐온 사상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사회적 현실 앞에서 무너져 버린 이론이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이 나치와 히틀러라는 극단적 괴물을 낳은 것을 결코 우연으로 돌려선 안되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단지 초인이 ‘사랑을 쓰느냐 마느냐’에 있지 않다. ‘나’를 가치의 정점에 세우고, 나 자신을 선악의 원천으로 절대화하는 이 초인의 구조 자체가 이미 필연적인 지옥의 설계도인 것이다.


이 지옥의 설계도 위에서, 우리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인 에덴의 ‘선악과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그 사건을 단순한 ‘금기 위반’ 정도로 이해하지만, 그 유혹의 본질은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뱀은 인간에게 속삭였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 여기서 ‘선악을 안다’는 것은 지적인 분별력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규정하고 심판하는 ‘절대 주권’을 신에게서 찬탈하여 ‘나 자신’이 갖겠다는 반역의 선언이었다. 즉, 니체가 부르짖은 ‘스스로 가치의 근원이 되는 초인’은, 에덴의 뱀이 던졌던 “네가 너의 주인이 되어라, 네가 곧 신이 되어라”는 그 태고의 유혹에 가장 현대적이고 철학적인 주석을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인간이 선악과를 삼키고 스스로 심판자가 되자, 그들은 낙원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 에덴 밖의 세상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이었는가? 남자는 여자를 탓했고, 형제는 형제의 피를 땅에 쏟게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신’으로 군림하며 심판하려 드는 세상, 그것은 더 이상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니체의 초인들이 모인 세상이 필연적으로 지옥도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같다. 그곳은 자유로운 자들의 해방구가 아니라, 80억 명의 ‘심판관’들이 벌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터, 즉 ‘실낙원(Paradise Lost)’의 처참한 재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80억 인구 모두가 이 책이 말하는 ‘아가페’라는 바보 같은 사랑으로 산다면 어떠한가? 내가 기준이 되기를 포기하고,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그 ‘나약한’ 마음들이 모일 때,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가장 안전해진다. 내가 넘어지면 누군가 일으켜 줄 것이라는 믿음, 내가 잠든 사이에도 이웃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그곳에서는 문을 잠글 필요도, 칼을 찰 필요도 없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안전장치가 되어 가장 평온한 번영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면 묻는다. 누가 더 지능적인가? ‘주체적인 힘’을 외치며 자신들이 서 있는 문명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자살적인 사상이 똑똑한가, 아니면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서로를 살려내어 끝내 생존과 안전을 담보하는 사랑의 실천가들이 똑똑한가? 사랑을 비웃는 자들은 자신들이 ‘지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생존을 담보해 주는 유일한 생명줄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이다. 끼리끼리 모여 그 파멸의 주문을 외우는 모습은, 고귀한 집단 지성이 아니라 집단적인 어리석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지성인들은 니체를 ‘시대를 앞서간 천재’라 칭송하며 그에게 면죄부를 쥐여준다. 나는 묻는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불량 설계도를 만든 자를 천재라 부르는 것이 온당한가? 게다가 그 설계도의 핵심조차 빌려온 것이며, 그것이 인류를 최악의 비극으로 내몰았음에도 거장이라 칭송하는 것은, 지금도 구천을 떠도는 아우슈비츠의 그 억울한 영혼들을 또다시 살해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중립’이라는 핑계로 니체의 사상에 화장(Make-up)을 해주고 그를 옹호할 때, 우리는 악을 재생산하는 공범이 된다. 사랑 없는 흉기를 만든 자를 찬양하는 것, 그것은 지식인으로서 저지르는 비겁한 직무 유기이다. 니체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위험한 설계자이다. 자신의 오만에 눈이 멀어 칸트와 괴테가 남겨둔 안전장치마저 겁쟁이의 것이라며 제거해 버린 무모한 도박사이다. 그는 인류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위험한 사상가였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사상이 빚어낼 파국을 막을 책임을 망각한, 비극적일 만큼 어리석은 지성인이었다.


1889년 1월 3일, 토리노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 니체는 마부에게 채찍질당하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졌다. 그 뒤 그는 다시는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망치를 훔쳐 요란하게 휘두르던 철학자의 마지막은 이러했다. 그가 평생 조롱했던 ‘연민’이, 결국 그를 무너뜨린 것이다. 삶은 때로 논증보다 정직하다. 그가 경멸한 것이 끝내 그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지성의 배신’이 어떻게 한 사상가의 내면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가장 완벽한 문학적 증명이 바로, 이 소설의 또 다른 서사, ‘악마, 이반의 악몽’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실재하는 역사적 파멸과 더불어, 이 서사를 병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사상으로 인해 파멸이 초래됐음을 알게 된 이반은 섬망증에 걸려 환각 속에서 악마를 만난다. 그런데 악마의 겉모습은 그저 평범한, 마치 이반이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만한 허름한 중년 신사의 모습이었다. 그는 새로운 유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반 자신이 과거에 했던 냉소적이고 진부한 말들을 지껄이며 그를 ‘조롱’할 뿐이었다. 이는 악마가 ‘외부’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이반 자신, 즉 이반의 사상이 낳은 ‘내면의 결과물’임을 상징한다.


이렇듯 도스토옙스키는 오만한 인신의 비극, 사랑을 거부한 냉정한 지성의 파멸과 비극을 이미 작품 속에서 뚜렷하게 통찰하고 예언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소중한 정신인 아가페를 ‘노예 도덕’이라 치부하며, 그것을 낡고 병든 가치로 오만하게 재단했기에, 니체의 사상은 그의 숭고한 의도와는 무관하게 끔찍한 괴물이 자라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고, ‘악마의 악몽’을 현실에서 현현(顯現)시키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반과 니체, 그 둘의 사상은 표면적으로 모두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사랑’이라는 윤리적 심장이 도려내진 채 세상에 던져졌을 때, 끔찍한 괴물을 깨우는 주문이 되었다. 이 비극의 뿌리는 사유가 현실에 대해 져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를 외면한 것에 있다.


철학은 공허한 관념으로 현실을 재단하거나 가둬선 안 된다. 오히려 이태석이나 콜베 신부와 같은 현실의 숭고한 진실을 담아내고 반영할 때에만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위대한 철학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숭고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만하게 재단한다면 공허한 관념에 머무를 뿐이고, 공허한 관념은 현실을 담지 못하기에 커다란 위험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하늘 위의 멋진 구름이 아니라, 흙과 빗방울이 섞인 ‘삶의 흙탕물’을 말해야 한다. 사유의 오만함이 현실의 숭고함을 멸시할 때, 그 철학은 스스로를 배신하고 파멸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결국 ‘사상의 책임’이라는 준엄한 물음 앞에서, 우리는 사랑이 왜 모든 위대한 사유의 전제 조건이자 마지막 안전장치가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는다. 사랑이 부재할 때, 인간의 지성이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가장 정교한 파멸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역사는 증명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생은 고독한 초인의 자기 긍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상이 타인에게 상처가 아닌 구원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찰하는, 사랑의 책임감 속에서만 비로소 완성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지금 나의 생각과 나의 말은, 과연 사랑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사랑이 거세된 지성이 남긴 처참한 폐허 위에 서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니체가 그토록 지우려 했으나 끝내 지워지지 않은 단어,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그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한다. 모든 비극을 끝내고 진정한 화해와 긍정으로 나아가는 약속의 언어. 이제 우리의 입술은 그 단어를 발음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