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의 투쟁에서 숲의 평온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가파른 절벽을 올랐다. 1부에서 3부에 이르는 긴 여정 동안, 우리는 사랑 없는 지성이 서양의 역사 속에서 어떤 끔찍한 괴물을 낳았는지, 그리고 그 괴물에 맞서기 위해 위대한 영혼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자신을 불태웠는지를 목격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걸어온 서양의 길은 고독한 ‘등반가’의 길이었다. 신과의 수직적인 만남을 갈망하며, 피 흘리는 손으로 날카로운 바위를 붙잡고 한 걸음씩 자신을 끌어올려야 하는 투쟁의 역사였다. 본회퍼는 감옥에서 홀로 결단해야 했고, 장 발장은 평생 자신의 과거와 싸워야 했다. 심지어 신을 죽이고 스스로 초인이 되려 했던 니체조차, 그 본질은 홀로 산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려 했던 고독한 등반가였다.
이 치열한 ‘수직적 투쟁’은 분명 개인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를 지독하게 외롭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우리를 지치게 했다. 우리는 영원히 절벽에 매달려 있을 수 없다. 니체의 비극이 증명하듯, 끝없는 자기 극복과 상승 의지만으로는 인간의 영혼이 버티지를 못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는 결국 끊어지거나, 쏘아진 화살이 되어 누군가를 해치게 된다. 투쟁이 일상이 될 때, 사랑은 전투가 되고 삶은 전장이 된다. 그러므로 싸움이 끝난 자리에는 반드시 치유가 깃들어야 하고, 긴장이 머물던 자리에는 이완이 스며들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팽팽한 수직의 긴장을 받아줄 넓은 대지가 필요하다. 저 거친 절벽에서 내려와, 뿌리와 뿌리가 서로 얽혀 서로를 지탱하는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은 비장한 결단을 넘어 자연스러운 호흡이 되고, 투쟁을 넘어 평온한 삶이 될 수 있다.
바로 저 반대편에, 동양의 오래된 지혜가 비추는 너른 ‘순례자’의 길이 펼쳐져 있다. 이 길은 절벽을 정복하는 길이 아니라, 골짜기를 따라 물처럼 흐르고 숲의 모든 생명과 수평적으로 만나는 길이다. 등반가의 투쟁이 거친 함성이었다면, 순례자의 지혜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고 속삭이는 깊은 침묵의 언어이다.
그러나 이 숲의 입구에서, 어떤 독자들은 멈칫하며 내게 물을지 모른다. “어찌하여 거룩한 복음을 이방의 사상과 섞으려 하는가?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위험한 혼합주의가 아닌가?” 나는 그 경건한 우려를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되묻고 싶다. “당신들이 지키려는 ‘정통’은 무엇입니까? 종이에 적힌 문자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삶입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야말로 당대의 율법학자들에게는 최고의 ‘이단’이자 ‘신성모독자’였다는 사실을. 그는 안식일의 법조문(텍스트)을 어기면서까지 병자를 고쳤고,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엄정한 율법(전통)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용서를 선포했다. 예수는 언제나 ‘교리’보다 ‘사람’을, ‘심판’보다 ‘사랑’을 선택했다.
내가 지금 동양의 지혜를 빌려오려는 것은 성경을 훼손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이라는 딱딱한 껍질 속에 갇혀 질식해가는 예수의 심장을 다시 고동치게 만들기 위함이다. 진리의 빛이 하나라면, 서양의 등잔 밑이나 동양의 등잔 밑이나 그 빛이 비추는 진실은 같아야 한다. 불교의 연기설이나 동학의 인내천에서 예수의 사랑을 재발견하는 것은 불순한 혼합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의 확인’이다. 우리는 ‘텍스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문자’를 지키려다 ‘사랑’을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너무나 비극적인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을 버리고 동양을 택하자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여정이다. 생각해보라. 홀로 하늘로 솟구치는 기둥은 위태롭고, 땅에 누워만 있는 평면은 무력하다. 진정한 집은, 서양의 치열한 ‘수직적 기둥(초월)’과 동양의 너른 ‘수평적 대들보(포용)’가 서로를 단단히 붙들 때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는 사랑의 기둥(아가페의 결단)을 세우기 위해 그토록 힘들게 산을 올랐다. 이제 그 기둥이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받쳐줄 대들보(동양의 지혜)를 만나러 가야 한다. 서양의 길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장 극적인 서사로 보여주었다면, 이제 우리가 걸어갈 동양의 길은 그 사랑을 실천하는 태도 ‘어떻게’와 그 필연적 이유 ‘왜’, 그리고 그 대상 ‘누구’를 우리의 숨결 속에 녹여낼 것이다.
이제 흙 묻은 손을 씻고, 가쁜 숨을 고르라. 동양의 숲속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세 개의 등불이 있다. 나를 비워내는 ‘무위(無爲)’, 너와 나를 잇는 ‘연기(緣起)’, 그리고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는 ‘인내천(人乃天)’. 이 낯설지만 오래된 지혜는 우리에게 가르쳐줄 것이다. 사랑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의무가 아니라, 원래 하나였던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기쁨임을.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위태롭게 떨던 우리의 사랑을, 이제 단단한 대지 위에 뿌리내리게 할 시간이다.
우리는 앞서 사랑이 ‘무엇’인지 보았다. 그것은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는 아가페의 숭고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제 순례자의 길은 더 날카롭고 실천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토록 위대한 사랑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동양의 지혜는 가장 오래되고 오해받기 쉬운 대답, ‘무위(無爲)’를 들려준다.
무위. 글자 그대로 풀면 ‘함이 없음’이니, 많은 이들이 이를 게으른 방관이나 무책임한 허무주의로 오해하곤 한다. 세상이 불타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흐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가장 치열한 싸움의 기술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사랑을 방해하는 ‘나의 의지를 하지 않음’이다.
우리의 사랑이 그토록 쉽게 폭력이 되고, 자주 상처가 되며, 결국 지쳐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사랑이 너무나 자주 날카로운 조각칼을 든 ‘유위(有爲)’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유위는 ‘나의 에고(Ego)’가 주인이 되어 세상을 밀어붙이는 사랑이다.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 “내 방식대로 너를 구원하겠다”, “내가 정의를 세우겠다”는 단단하고 오만한 자아의 외침이다. 이 사랑은 숭고해 보이지만, 실상은 타인을 재료로 삼아 나의 이상을 조각하려는 욕망의 투영일 뿐이다. 그래서 세상이 내 뜻대로 조각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하고, 상대가 내 방식대로 구원받지 않을 때 혐오감을 느낀다. 조각칼을 든 사랑은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조각가 자신의 손을 벤다.
그렇다면 무위적 사랑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손에 들린 그 날카로운 ‘자아의 조각칼’을 내려놓는 결단이다. 이것은 평온한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내 안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해!”라는 통제 욕구를 억누르고,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영웅 심리를 스스로 짓밟아 죽이는, 가장 고통스럽고 격렬한 ‘자기 해체’의 과정이다.
이 ‘무위’의 처절함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9화에서 만났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고뇌를 다시 소환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그가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한 것을 두고 적극적인 행동, 즉 ‘유위’의 전형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결정이야말로 가장 처절한 ‘무위’의 실천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본회퍼의 자아(Ego)는 독실한 신학자이자 철저한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유위’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며 고결한 성직자로 남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었고, 그가 평생 쌓아온 신념의 성탑이었다. 하지만 그는 시대의 고통 앞에서 그 단단한 자아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는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려는 욕망(유위)을 버리고, 타인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길, 즉 신의 뜻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는 길(무위)을 택했다.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들은 영웅의 무용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마저 죽여야 했던 한 인간의 피 흘리는 자기 부정의 기록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위다. 내가 옳다고 믿는 나만의 정의, 나를 지키려는 본능적인 방어기제조차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더러운 진흙탕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은 낭만적인 시구(詩句)가 아니다. 물은 바위를 만나면 다투지 않고 돌아가지만, 결국 그 바위를 뚫는 것은 물이다. 물이 강한 이유는 자신의 형태(Ego)를 고집하지 않기 때문이다.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어진다. 자신의 모양을 버렸기에(無爲), 세상 모든 고통의 모양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을 수 있다(大爲).
장기려 박사가 평생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며 ‘바보 의사’라 불린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라고 해서 편안한 노후와 명예에 대한 유혹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매 순간 솟구치는 ‘나를 위한 삶’의 의지를 무위로 잠재웠다. 그는 ‘성자’가 되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나’를 죽이는 훈련을 매일 반복했을 뿐이다.
순례자의 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첫 번째 지혜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나의 의지로 세상을 깎아내려는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에고라는 둑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내부의 투쟁이다. 내 안의 ‘주인 노릇 하려는 나’를 죽일 때, 비로소 사랑은 물처럼 흘러나와 타인의 메마른 가슴을 적신다.
그러므로 무위는 나약한 자의 도피처가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외)”라고 외쳤던 예수의 자기 비움과 맞닿아 있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능동적인 사랑의 기술이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놀라운 진실을 마주한다. 동양의 ‘무위’와 서양의 ‘아가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하나의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가페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사랑의 ‘높은 목표’라면, 무위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내 어깨의 힘을 빼는 ‘지혜로운 태도’이다. 아가페를 실천하려다 지친 영혼에게 무위는 쉼을 주고, 무위에 빠져 허무해진 영혼에게 아가페는 방향을 준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