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오직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소서

아멘!

by 낭만적 반역자

앞선 장들에서 우리는 신의 존재가 불확정성의 영역에 머무는 한, 인간에게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선택하고, 행동할 자유와 책임이 주어진다고 보았다. 또한 ‘참된 올바름’으로서의 사랑이 인간의 경험과 윤리적 감수성에 기반해야 하며, 이는 초자연적 기적이나 확정 불가능한 종말론적 예언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하는 실천적 행위에서 구현됨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가 보여준 사랑의 윤리는 구약의 율법이나 인간이 만든 교리가 아닌, 스스로를 배신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임을 역설했다. 이처럼 우리의 논의는 결국 사랑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모든 사유의 여정 끝에 우리는 '사유' 파트의 마지막을 아멘으로 맺고자 한다. 아멘은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혹은 ‘참으로 그러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구호가 아니다. 우리가 탐구해 온 사유의 진실은 전능한 신의 존재 여부에 상관없이 지상의 모든 불합리에 대한 해결의 주체가 결국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신의 존재가 불확정적일지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불의에 눈감아서는 안 된다.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인간의 몫이기에,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존재는 그의 육체적 강림이나 초월적 현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그의 사랑이 낱낱이 깃들 때 이루어지는 내면적 실현을 의미한다.


우리는 확증될 수 없는 ‘천국’을 막연히 기다리거나, ‘지옥’이라는 공포에 짓눌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바로 이 땅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천국이 건설됨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저 높은 곳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지는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에 빠진 이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사회적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제도적 노력, 그리고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대화와 화해의 다리를 놓으려는 용기 있는 시도 속에서 구현된다.


사랑으로 인해 한 사람의 삶이 변화하고, 공동체가 회복되며, 더 정의로운 세상이 조금씩 만들어지는 그 순간들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진정한 구원이다. 이는 개인의 내면적 평화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고통을 덜어내고 삶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인간이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며 만들어가는 윤리적 실재를 뜻한다. 이는 ‘아들도 모른다’는 예수의 겸허한 선언이 우리에게 부여한 실존적 책임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 위로 발을 내딛기 전, 나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모든 이에게 뼈아픈 질문을 하나 던진다. 도대체 ‘기독교(Christianity)’란 무엇인가? 그 이름이 스스로 증명하듯, 그것은 ‘그리스도(Christ)’를 따르는 길이다. 즉, 기독교의 유일무이한 기준과 근거는 교리도, 교단도, 웅장한 성전도 아닌, 교회라는 조직체에서 늘 선전하듯 그 기준은 ‘오직 예수’이다.


그렇다면 모든 건 명백하다. 기준은 예수이며,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은 정통이고, 그의 길을 반하는 것은 이단이다. 정통과 이단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예수, 즉 그리스도의 그 신성한 가르침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잘 쳐줘야 잠언이다.

처음부터 모든 판결은 아주 쉬웠다. 이리저리 꼬였던 것은 이익을 위해 진리를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기준은 오직 하나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는가, 그리스도의 삶이 재현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저 반역자의 우두머리가 신이 죽었다고 환희에 젖어 춤을 추든, 그리스도를 노예시장의 장사치라고 조롱하든 도대체 무슨 반박을 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대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자긍심이 넘쳐도 좋다. 그대들의 메시아는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사랑으로 언제나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는 확정될 수 없기에 오히려 우리에게 자율성을 선사하고, 절름발이 교리의 모순을 넘어 보편적 진리로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처럼 인류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서 그리스도는 한없이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대들의 위대한 메시아가 가르친 사랑의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정죄하고 억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성모독임을 우리는 이미 깨달았다. 사랑이 부재한 자유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비극처럼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그대들은 언제나 치열해야 한다. 위대한 가르침을 실현하도록 그대들은 항상 참됨으로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불확정성 속에서도 윤리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노력이기 때문이다. 이 치열함은 매 순간, 우리의 일상 속에서 편견에 맞서고,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며, 사랑의 눈으로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용기로 발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외칠 수 있다. 이는 물리적인 재림을 염원하는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삶 속에,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가는 세상 속에 그리스도가 남긴 ‘사랑’의 진리가 영원히 살아 숨 쉬기를 바라는 가슴 벅찬 염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소리 높여 외친다.

예수여, 오소서. 다시 오소서.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다시금 내려오셔서, 오직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