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빛, 인드라망
순례자는 물의 지혜를 마음에 품고 숲의 심연으로 들어선다. 사랑을 실천하는 겸허한 태도(어떻게)를 배웠다면, 이제 우리는 더 근원적이고 무거운 물음과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대체 ‘왜’ 타인을,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만 하는가? 이 질문에 숲은 침묵 속에서 대지 아래 숨겨진 거대한 비밀, ‘연기(緣起)’의 등불을 밝힌다.
숲속의 나무들은 언뜻 저마다 홀로 서 있는 고독한 기둥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선을 땅속 깊은 곳으로 옮기는 순간, 세계의 진짜 얼굴이 드러난다. 모든 나무의 뿌리가 복잡하게 얽혀 서로를 붙들고, 양분을 나누며, 신호를 주고받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이것이 바로 연기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독립된 실체란 없다. 모든 존재는 무수한 인연의 사슬에 묶여 서로에게 기대어 잠시 피어난 꽃일 뿐이다.
이 위대한 깨달음은 불교의 ‘인드라망’이라는 경이로운 은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난다. 온 우주를 감싼 무한한 그물, 그 그물코마다 박힌 영롱한 구슬들. 놀랍게도 그 구슬들은 스스로 빛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남김없이 비추고 있다. 나의 빛 속에 너의 그림자가 있고, 너의 표면 위에 온 우주의 풍경이 담겨 있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요, 거대한 빛의 파동 속에 함께 있는 하나다.
그런데 이 찬란한 ‘빛의 연결(인드라망)’이 끊어졌을 때 어떤 지옥이 펼쳐지는지를, 도스토옙스키는 ‘양파 한 뿌리’라는 어둠의 우화로 증언한다.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작중 인물 그루셴카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왜 타인과 함께 구원받아야만 하는지를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게 보여준다.
옛날, 평생 착한 일이라곤 한 번도 하지 않아 지옥 불바다에 떨어진 표독스러운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의 수호천사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그녀가 생전에 텃밭에서 거지에게 무심코 던져주었던 썩어가는 ‘양파 한 뿌리’의 기억을 찾아내 하나님께 고했다. 하나님은 그 양파를 그녀에게 내밀라 명했다. 천사가 건넨 가느다란 양파 줄기를 잡고 할머니가 지옥에서 막 끌어 올려지려는 찰나, 불바다 속의 다른 죄인들이 살기 위해 그녀의 다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이내 수십 명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렸다.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 그 가느다란 양파 한 뿌리는 놀랍게도 그 수십 명의 무게를 버티며 팽팽하게 당겨질 뿐 끊어지지 않았다. 신의 자비는 본래 그들 모두를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하고 질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 할머니의 내면에서 ‘자아(Ego)’라는 괴물이 비명을 질렀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저리 꺼져!”
그녀가 “내 거야!”라고 외치며 타인을 걷어차는 바로 그 순간, 강철 같던 양파 줄기는 허무하게 ‘툭’ 하고 끊어져 버렸다. 할머니와 매달려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다시 비명과 함께 불바다 속으로 추락했고, 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이 우화가 던지는 통찰은 명징하다. 양파를 끊어지게 만든 것은 사람들의 물리적 ‘무게’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만 구원받겠다”는 할머니의 무거운 ‘에고(Ego)’였다. 앞에서 만났던 도킨스라면 이 할머니의 발길질을 ‘유전자의 본능적인 생존 전략’이라며 옹호했을지도 모른다. 타인을 내 구원의 줄에서 밀어내야만 내가 사는 고립된 ‘생존 기계’의 논리 말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2,500년 전 이미 그 발길질이 스스로를 불바다로 걷어차는 것임을 경고했다. 그녀는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사람들을 짐으로 여겼지만, 실상 그들은 그녀가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게 무게중심을 잡아주는 이들이자, 그녀가 사랑을 비로소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연기의 동반자’들이었다. 도킨스가 보지 못한 진실, 즉 우리는 독립된 기계가 아니라 서로의 빛을 투영하는 인드라망이라는 연기의 구슬 말이다. 인드라망의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며 빛나듯, 그들이 매달려 있었기에 그녀 또한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타인을 향한 발길질은 결국 나를 지탱하던 유일한 동아줄을 끊는 자살 행위다. ‘나’와 ‘너’ 사이에 단단한 성벽을 쌓고 “이건 나만의 구원이야”라고 외치는 순간, 우리는 구원의 대열에서 탈락한다. 반대로, 내 다리에 매달린 타인의 무게를 기꺼이 견디며 “함께 가자”고 결단할 때, 그 가느다란 양파 한 뿌리는 강철보다 강한 구원의 사슬이 되어 우리 모두를 끌어올린다.
이 깨달음의 빛 속에서 우리는 장 발장의 삶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그는 자신을 평생 추적한 자베르를 다리에 매달린 무거운 짐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함께 구원받아야 할 ‘양파 줄기의 동반자’로 여겼기에, 증오의 사슬을 끊고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례자의 길이 가르쳐주는 두 번째 지혜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은 단지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라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는 함께 구원받거나, 함께 파멸한다’는 이 세계의 가장 냉엄하고도 근원적인 진실, 즉 ‘연기’에 대한 가장 지혜로운 생존 전략이다. 나의 구슬을 맑게 닦기 위해 너의 구슬을 닦아주어야 하듯, 내가 살기 위해 너를 끌어안아야 한다. 이것이 사랑의 ‘왜’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답이다.
순례자는 물의 지혜와 숲의 깨달음을 지나, 마침내 순례길의 마지막 등불 앞에 섰다. 사랑의 겸허한 태도(어떻게)와 필연적인 이유(왜)를 알았다면, 이제 가장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사랑해야 하며, 그 사랑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이 마지막 물음에, 우리가 발 딛고 선 바로 이 땅의 지혜가 낡은 세계를 무너뜨리는 천둥소리와 같은 대답, ‘인내천(人乃天)’을 들려준다.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나 철학적 사유가 아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엎는 가장 급진적이고도 경이로운 선언이다.
하늘은 저 멀리 숭배해야 할 대상이나 죽어서 가야 할 곳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서 숨 쉬고 고통받는 바로 ‘이 사람’ 안에 온전히 현존한다는 것이다. 왕의 용상 위에도 하늘이 있지만, 흙 묻은 손으로 밭을 가는 농부의 땀방울 속에도, 굶주린 아이의 울음 속에도 조금도 다르지 않은 무게의 하늘이 있다. 이 눈부신 선언 앞에서 세상의 모든 계급과 신분, 선인과 악인의 구분은 한낱 먼지처럼 그 의미를 잃는다.
이 경이로운 선언은 ‘우리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이 된다. 사랑의 대상은 특정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는 모든 사람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나를 괴롭히는 원수이든, 우리는 그 사람 자체가 ‘하늘’이기에 그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사랑은 더 이상 개인의 감정이나 도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앞에 현현한 신성을 마주하는 경외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얼마나 깊어야 하는가? 인내천의 가르침은 곧바로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구체적인 윤리적 명령으로 이어진다. 이는 예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시대를 건너 이 땅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 장엄한 메아리이다.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곧 우리가 하늘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보다 더 깊고 완전한 사랑의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1889년, 토리노의 광장에서 철학자가 말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졌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894년, 지구 반대편 조선의 전라도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섰다. 그들은 니체를 읽지 않았다. 슈티르너도 몰랐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 하나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무지한 확신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선언을 낳았다. 망치를 훔쳐 요란하게 휘두르던 철학자는 말의 목을 끌어안고 무너졌다. 죽창을 든 농민들은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그 확신을 놓지 않았다. 인내천은 관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로 쓴 확신이었다.
19세기 말, 부패한 권력과 외세의 침탈 아래 신음하던 이 땅의 민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저항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민 여인의 몸에서 났다는 이유만으로 제 자식조차 평생 ‘종’이라 부르며 노비로 부렸던, 인륜마저 마비시킨 잔인한 양반 사회의 거대한 우상에 맞선 최후의 항변이었다. 짐승처럼 짓밟히고 물건처럼 거래되던 자신의 ‘하늘다움’을 되찾고, 옆에서 함께 고통받는 이웃의 ‘하늘’을 지키기 위한 가장 치열하고 집단적인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들의 거친 죽창과 누더기 깃발 위에는,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숭고한 ‘사인여천’의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순례자의 길이 마침내 도달한 마지막 지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물처럼 낮은 자세로(無爲), 숲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緣起), 마침내 내 앞의 모든 존재를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人乃天). 이 세 개의 등불이 하나의 빛으로 모일 때, 서양의 등반가가 험준한 절벽 위에서 마주한 아가페의 정상과 동양의 순례자가 너른 길 끝에서 도달한 사랑의 정상은 결국 같은 곳이었음이 드러난다. 그곳에서 우리는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고, 모든 존재의 신성함 앞에 기꺼이 무릎 꿇는, 사랑의 가장 위대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