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진실
우리는 제4부의 순례길에서 ‘무위’, ‘연기’, ‘인내천’이라는 동양의 지혜를 만났다. 특히 ‘연기’와 ‘인드라망’이 보여준 불교적 통찰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존재하는 실체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 위대한 깨달음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핵심 명제인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진실로 요약된다.
‘색(色)’, 즉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과 가치는, 그 실체가 텅 비어있다는 ‘공(空)’의 진실을 깨닫는 것이 첫 번째 길(색즉시공)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지난 세기, 서구의 지성이라는 생태계에서 포식자들은 하나같이 이 첫 번째 길, 즉 ‘해체’에만 골몰했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물질(경제)’로 환원했고, 니체는 숭고한 도덕을 부수고 힘을 숭배했으며, 하라리는 영혼을 데이터로 분해해 버렸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라는 존재가 고작 그런 물질적 요소나 데이터의 합으로 환원되고 분해되는 그런 존재던가?
특히 지난 세기, 스스로 니체의 적장자(嫡長子)를 자처했던 미셸 푸코는 스승이 남긴 ‘힘에의 의지’라는 망치를 들고 내려와, 인간의 모든 숭고한 행위 뒤에 숨은 권력의 미세한 작용을 현미경처럼 찾아냈다. 니체가 신을 죽이는 데 그쳤다면, 푸코는 그 망치로 인간의 마지막 남은 ‘선의’마저 부수려 들었다.
그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세심한 눈빛조차, 실은 상대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어 관리하려는 차가운 권력의 시선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그에게 병원이나 학교에서 베푸는 친절과 보호는, 인간을 시스템에 순종적인 부속품으로 길들이기 위한 가장 정교하고 은밀한 사육(飼育)의 기술이었다. 그 냉소적인 시선 앞에서는, 인간의 가장 뜨거운 희생과 사랑조차 결국은 남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세련된 변종에 불과했다.
확실히 푸코의 현미경이 포착한 사회적 단층에는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이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식민지 학살, 광기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진 감금과 폭력 등, 인류사 속 ‘선의’의 가면 뒤에 숨어있던 권력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한 그의 공로는 인정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그물망이 아무리 촘촘할지라도 그 그물을 찢고 나가는 ‘실존의 비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책상 머리에서 조립된 그 차가운 논리는, 우리가 앞서 만났던 ‘거룩한 바보들’의 피 끓는 삶 앞에서 여지없이 산산조각 난다.
푸코는 선의가 곧 지배 욕망이라 했다. 그렇다면 죽음의 공포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아우슈비츠의 수용소 한복판에서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했던 콜베 신부는 어떠한가. 그가 선의를 베푸는 것을 선택하는 순간, 그 자신은 소멸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내가 죽어서 사라지는데 도대체 그 자리에서 무슨 권력을 쥐고, 누구를 지배한단 말인가? 지배할 주체가 사라지는 그 죽음 앞에서 ‘권력 의지’라는 말은 얼마나 초라한가.
또한, 푸코는 의학적 시선이 인간을 차가운 사물로 전락시킨다고 했다. 그렇다면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 환자의 썩어가는 환부에 입을 대어 피고름을 빨아내던 손양원 목사의 행위는 무엇인가. 비릿한 고름과 전염의 공포마저 내 몸처럼 껴안아버린 그 ‘일체화’의 순간을, 고작 분석이나 통제 따위의 건조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환자를 사물로 대상화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와 하나가 된 전율할 사랑이었다.
그는 또 학교가 자본주의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공장일 뿐이라고 말했다. 내전의 화염에 휩싸인 남수단 톤즈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에게 총 대신 악기를 쥐여준 이태석 신부를 보라. 그는 심지어 자신의 성당을 짓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학교를 먼저 세웠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당장의 생존이나 노동력 생산과는 하등 상관없는 브라스 밴드를 결성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그 행위가, 도대체 무슨 경제적 효용이며 종교적 권력인가? 그는 시스템의 부속품을 찍어낸 게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여 존엄한 인간으로 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푸코와 같은 회의론자들이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둘렀던 데에는 그들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었다. 당시 서구 사회는 거룩한 신학의 수사(修辭) 뒤에서 제국주의적 착취를 일삼았고, 도덕의 이름으로 위선적인 탐욕의 고름을 짜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휘두른 망치는 그 부패한 가면을 깨부수기 위한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가면’을 부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숨 쉬고 있던 ‘참된 얼굴’까지 짓뭉개버렸다는 데 있다. 오염된 종교를 비판하려다 종교의 본질인 사랑마저 말살했고, 위선적인 도덕을 폭로하려다 인간의 고귀한 실존적 결단마저 권력의 유희로 격하시켰다.
그러므로 시대의 병을 진단하는 데는 그나마 재능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들이 훌륭한 의사는 아니었다. 인간의 고통을 물질과 본능의 문제로만 해석했을 뿐,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줄 사랑이라는 물 한 모금 건네지 못했으니 말이다. 명의인 척했지만 결국 그들의 손에서 환자는 치유되지 못한 채 더더욱 병들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이론이란 결국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들은 숭고한 행위에 지저분한 이름표를 붙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니체의 ‘노예 도덕’, 푸코의 ‘권력욕의 발현’ 따위의 말들을 보라.
백번 양보해서 그들의 말이 맞다고 치자. 나병 환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삶을 바치는 것이 ‘노예 도덕’이라면, 비굴한 복종이 아니라 넘치는 기쁨으로 선택한 그 ‘자발적 노예됨’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자유가 아니겠는가? 타인을 살리기 위해 나를 죽이는 것이 ‘권력욕’이라면,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장 낮은 곳으로 던져 생명을 살려내는 그 권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힘이 아니겠는가? 결국 그것은 그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관점주의(Perspectivism)’의 덫에 스스로 걸려든 셈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고 오직 ‘관점(해석)’만이 존재한다면, 사랑을 권력과 노예 근성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그들의 관점이야말로, 그들 내면이 얼마나 비틀려 있는지를 자백하는 증거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지성사(知性史)에서 어쩌면 가장 매혹적인 ‘꽃뱀’이었다. 그는 ‘주권적 개인’과 ‘초인’이라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밑바닥에 흐르는 이기심을 집요하게 자극하며 우리를 유혹했다. 실낙원의 뱀이 하와에게 ‘신처럼 되리라’며 선악과를 건넸듯, 그는 우리에게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라’는 너무나 화려한 언어로 그 이기심을 모든 생명의 근원적이고 창조적인 ‘힘’이라 포장하여 건넸다.
그러나 그 유혹의 대가는 더없이 참혹했다. 그는 인간적인 모든 숭고함을 ‘권력의 가면’이나 ‘위장된 공격성’으로 전락시킨 채, 우리를 고립된 허무의 감옥과 죽음의 가스실에 가두고 유유히 사라진, 무책임하고도 어리석은 유혹자였을 뿐이다. 그가 남긴 것은 해방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마지막 구명줄마저 스스로 끊어버린 자들의 처절한 비명이었다.
문제는 니체와 그 후예들이 사상계를 지배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이 매혹적인 우상화가 멈추지 않고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망치가 부숴버린 ‘연민’과 ‘사랑’의 빈자리에 들어앉은 것은 언제나 광기 어린 폭력이었다. 과거의 나치즘이 그러했듯, 오늘날 다시 고개를 드는 네오나치즘과 극단적 혐오주의는 니체가 던진 ‘강자의 미학’이라는 미끼를 먹고 자라난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하는 것을 ‘약자의 도덕’이라 비웃으며 면죄부를 얻은 이들에게, 사랑이 사라진 세상은 그저 거대한 약육강식의 전쟁터일 뿐이다. 우리가 여전히 이 유혹자를 철학의 거장으로 숭배하며 그의 독배를 들이켜는 한, 제2, 제3의 가스실은 언제든 우리 곁에 다시 세워질 수 있다.
이처럼 파멸로 치닫는 비극적인 유혹의 끝에서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던졌던 그 통렬한 농담을 기억해보자.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이 오래된 통찰은 틀린 것이 하나 없다. 그들의 눈에 숭고한 희생이 그토록 추악한 권력욕으로만 비친 이유는 간단하다. 남들을 유혹해 그 구명줄을 끊게 만들었던 그들의 메마른 영혼 속에 진정한 사랑이 단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국 자신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선의와 희생마저 권력의 언어로만 번역할 수 있었던, 그 영리하고도 가엾은 철학자들만이 끝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사유’ 파트에서 마주했던 니체와 하라리, 그리고 도킨스야말로 바로 이 ‘병든 해체’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장본인들이다. 니체는 앞서 말한 그 ‘관점주의’라는 망치로 ‘절대 도덕’(色)이 ‘해석’(空)에 불과함을 폭로했고, 하라리는 ‘인지혁명’이라는 서사로 ‘인권’(色)마저도 ‘허구’(空)임을 밝혔다.
물론, 이 통찰의 뿌리는 깊고, 그 영향력은 거대했다. 이미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신은 인간 본성의 투사”라고 선언하며 하늘을 비워냈고, 리처드 도킨스는 과학의 이름으로 “신은 인간이 만든 망상”이라 규정했다. 그 뒤를 이은 하라리는 그 빈 하늘이 “상상의 질서”일 뿐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하라리는 이러한 비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인권이나 사랑이 허구일지라도 인류의 대규모 협력을 가능케 하는 ‘유용한 기제’로 작동한다고 강변한다. 그는 마치 냉철한 실용주의자인 척하며 “허구면 어떠냐, 잘 돌아가면 그만이지”라고 독자를 안심시키려 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석가모니의 ‘공(空)’과 하라리의 ‘허구’가 가진 결정적 신분 차이를 목격한다. 하라리의 허구는 가치를 해체하여 냉소의 바다에 빠뜨리지만, 석가모니의 공은 나를 비워 타자의 고통을 담아내기 위한 자비의 그릇이다. 하라리에게 세상은 ‘속임수’였으나, 석가모니에게 세상은 ‘나를 비워 너를 채워야 할 지극한 인연의 장’이었다.
이는 니체가 끝내 건너지 못했던 실존의 강이기도 하다.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고통의 굴레를 초인의 의지로 버텨내려 했으나, 그것은 결국 연료가 다할 때까지 타오르다 재가 되는 고독한 연소였다. 반면 석가모니는 집착과 분노로 돌아가는 윤회의 회전문을 멈춰 세움으로써 니체가 쌓아 올린 고립된 성벽을 허물고 타인의 온기를 향해 성문을 열었다. 이 ‘비움의 완성’이야말로 하라리의 건조한 해체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지혜의 정점이다. 가치의 뿌리를 잃어버린 채 오직 ‘작동’만을 숭배하는 하라리의 사유는, 결국 스스로 쌓은 모순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그러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하라리의 지성은 치명적인 자가당착에 빠진다. 생각해보라. 그가 말하는 ‘유용하게 작동한다’는 판단은 도대체 어떤 기준에서 나온 것인가? 경제가 돌아가고 인류가 협력하는 것이 굶주림과 혼란보다 ‘더 낫다’는 가치 판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유용성’이라는 말은 성립조차 할 수 없다. 결국 그는 인류의 거룩한 가치들을 ‘허구’라 낙인찍어 그 뿌리를 잘라놓고선, 정작 그 열매인 ‘번영’과 ‘협력’은 ‘진실’의 자리에 슬그머니 밀수해 놓았다. 남의 집 기둥을 뽑아 제 텐트를 세우는 지적 도둑질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마치 가치로부터 해방된 냉철한 통찰인 양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명상과 공동체의 회복, 인간적 유대의 중요성을 진지하게 권고하기까지 한다. 『사피엔스』에서 허구라 해체했던 바로 그 가치들을 이제 와서 스스로 권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논리적 파산을 본인 스스로 자백한 셈이다. 해체한 가치를 다시 권고하려면, ‘왜 허구 위에서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본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한다. 그 간극을 끝내 메우지 못한 채 해체와 권고를 동시에 수행하는 이 비논리적 행보가, 자신의 사유를 뿌리째 뒤흔드는 치명적인 오류임을 그는 정녕 몰랐던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덮어버린 비겁한 지성의 회피인가.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이 허구인지 진실인지도 해명하지 못한 채 타인의 성벽을 허무는 망치질, 이것이야말로 논리적 파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그가 설계한 차가운 효율의 계산법을 거부한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유용성’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숭고함’을 택한다. 허구라 조롱받을지언정, 그 숭고함이야말로 인류를 짐승이라는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유일한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지적 직무유기는 하라리보다 훨씬 앞서, 리처드 도킨스에 의해 더욱 노골적이고 생물학적인 형태로 예고된 바 있다. 하라리가 우리가 세운 사회적 건물(국가, 인권)을 허구라며 허물어뜨리는 ‘머리’의 해체를 담당했다면, 그보다 수십 년 전 도킨스는 이미 그 건물 안에 살고 있는 인간의 ‘심장’마저 차가운 기계 부속품으로 해체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인간을 ‘유전자를 운반하는 로봇’ 혹은 ‘생존 기계’로 전락시킨다. 그는 인간의 숭고한 이타주의나 희생조차도 결국은 유전자가 자신의 복사본을 더 많이 남기기 위한 ‘치밀하고 효율적인 생존 전략’일 뿐이라고 비웃는다. 물론 도킨스는 "우리는 유전자의 명령에 반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덧붙이며 탈출구를 열어두는 척한다. 그는 이 한 문장으로 자신의 이론이 가진 서늘한 기계론적 공포를 중화시키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그의 자가당착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그 반역의 근거로 ‘밈(Meme)’이라는 문화적 복제자 개념을 제시한다. 유전자가 생물학적 복제라면, 밈은 뇌에서 뇌로 전달되는 문화적 복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감옥의 간수를 바꾼 것일 뿐, 감옥 자체를 탈출한 것이 아니다. 복제와 전파라는 맹목적 논리로 작동하는 밈이 어떻게 유전자의 논리를 넘어서는 진정한 실존적 자유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도대체 목적도 의도도 없는 분자 덩어리들의 집합체가 ‘누구’의 의지로, ‘어떤’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설계자이자 구속자인 유전자에게 총을 겨눈단 말인가? 도킨스는 논리적 파산을 덮기 위해 ‘반역’이라는 근사한 수사를 밀수했지만, 정작 그 반역을 실행할 ‘영혼’은 이미 자신의 손으로 해부하여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후였다.
그러므로 그 냉정한 분석이 얼마나 얕은 토대 위에 서 있는지는, 결국 이 하나의 질문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어떤 목적도 없는 우주에서, 유전자가 대를 이어 생존하려 하는 그 경향성 자체가 이미 거대한 ‘목적’ 아닌가? 도대체 목적 없는 존재에게 ‘성공’이나 ‘승리’가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도킨스는 이 질문을 교묘한 언어의 유희로 덮어 버린다. 그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것을 ‘성공(Success)’이라 부르고, 경쟁 상대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것을 ‘승리(Win)’라고 묘사한다. 생각해보라. 목적지가 없는 나그네에게 ‘길을 잃었다’는 말이 성립할 수 없듯, 아무런 목적도 의도도 없는 분자 덩어리에게 ‘성공’이나 ‘승리’라는 가치 지향적 단어는 애초에 가당치도 않다. 목적이 없다면 생존은 그저 돌이 구르는 것과 같은 무심한 ‘현상’이어야지, 결코 칭송받아야 할 ‘성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은유 속에 숨겨진 가치 밀수’이다. 우주에 설계도 목적도 없다면, 유전자가 복제에 성공하여 이어지는 것이나 지금 당장 멸종하는 것이나 가치론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한다. 억만년 동안 깎이지 않은 돌을 ‘승리한 돌’이라 부르지 않듯이, ‘생존’은 그저 일어나는 생물학적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킨스의 치명적인 자가당착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신 또한 ‘생존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 판단을 휘두르면서, 정작 인간의 영혼과 사랑 같은 주관적 가치들은 ‘생존에 유용한 환상’일 뿐이라며 조롱하는 이중성이다. 그는 자신의 주관적 선호(생존)는 ‘과학’이라는 성역에 숨겨둔 채, 타인의 주관적 가치(사랑)만을 해체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사랑은 생존의 도구일 뿐이기에 가짜다”라고 말하려면, 그 기준이 되는 ‘생존의 유용성’만큼은 절대적인 진실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남의 가치는 허구라 조롱하면서, 정작 그 조롱의 근거로 삼는 자신의 잣대는 비판의 도마 위에 올리지 않는다. 이 얼마나 비겁하고 모순적인 논리인가. 그는 이 메마른 잣대를 들이대어 인간의 가장 뜨거운 진실마저 난도질한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를 두고 “유전자가 자기 복사본을 보존하기 위해 기계를 파괴하는 효율적인 계산”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지적 폭력’이다. 그는 타인의 성벽을 허물기 위해 휘두른 그 망치가, 사실은 자신이 딛고 선 ‘생존’이라는 빈약한 토대마저 부수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외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도킨스 역시 하라리와 똑같은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이다. 그 또한 신을 ‘망상’이라 부르며 몰아냈지만, 정작 그 빈자리에는 ‘생존’이라는 이름의 차가운 신을 세웠다. 그는 인간의 위대한 희생(색, 色)을 유전자의 계산(공, 空)으로 해체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도대체 왜 우리는 이 허무한 생존을 이어가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 앞에서는 무책임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는 생명의 설계도를 읽는 법은 알았을지 모르나, 정작 그 설계도로 지어진 집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끝내 묻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거기서 멈췄다고 평가받아야 한다. 그들은 “신은 인간이 만든 허구다”라고 폭로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도 모르나, 그 폭로 끝에 “그렇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신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창조적 질문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투사된 신’을 지우는 데만 골몰했을 뿐, ‘올바른 투사’가 무엇인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이 놓친 진실의 나머지 절반은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이는 모든 것이 텅 비어 ‘공(空)’하기에, 바로 그 빈자리에서 우리가 ‘인연’을 통해 ‘색(色)’, 즉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세워야 한다는 ‘재건’의 논리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유는 이 ‘채움’, 즉 ‘창조’의 단계로 결코 나아가지 못했다.
앞에서도 말했듯, 그들 사상의 치명적인 한계는 자신들이 휘두른 그 ‘망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니체의 ‘관점주의’는 그 선언 자체를, 하라리의 ‘허구론’은 그 논증 자체를, 하나의 ‘해석’이자 ‘허구’로 전락시키며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이처럼 자신의 논리마저 해체시키는 ‘자기 파괴적 순환’ 속에서는 그 어떤 ‘재건’의 벽돌도 쌓아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자기 파괴적 순환’이라는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는 그들의 사상을 어째서 ‘절반의 진실’이라고까지 부르는가? 그 이유는 그들의 철학을 ‘논리적 완결성’이 아닌, ‘역사적 역할’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망치’는 논리적으로는 결함투성이였을지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낡은 신념과 교리(色)가 절대적이지 않으며 텅 비어있음(空)을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폭로하는 ‘역할(색즉시공)’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역사적 역할은 인정하더라도- 논리적으로 파탄 났고, 재건에도 실패한 이 불안한 사상들에 왜 현대의 지성들은 그토록 열광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달콤한 면죄부’를 쥐여주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는 허구다”라는 그들의 선언은, 우리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사랑의 책임’과 ‘윤리적 부채감’을 단번에 면제해 준다. 사랑하지 않아도, 연대하지 않아도, 그저 냉소적인 태도로 팔짱을 끼고 세상을 ‘해석’하기만 해도 지적인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유혹. 그 게으른 도피처를 제공했기에 그들은 시대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도피는 폐허를 재건해주지는 못했다. 도리어 그들의 사상은 ‘공(空)’이라는 텅 빈 폐허만을 남겼고, 현대인들은 그 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결국 니체가 부숴버린 ‘진리’, 하라리가 난도질한 ‘머리’, 도킨스가 해부한 ‘심장’, 그리고 푸코가 해체한 ‘선의’는 모두 동일한 ‘환원주의(Reductionism)’의 함정에 빠져 있다. 그들은 인간이라는 입체적인 존재를 각자의 전공 분야에 맞춰 단 하나의 납작한 선으로 그어버린다. 니체는 진리를 '힘의 논리'로, 하라리는 가치를 ‘알고리즘’으로, 도킨스는 희생을 ‘유전자 계산’으로, 푸코는 사랑을 ‘권력욕’으로 단순화하여 환원시킨다.
이 차가운 방정식들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눈물은 '나약한 자의 비굴함'이 되고, '호르몬의 화학 작용'이 된다. 사랑을 실천한 숭고한 죽음 또한 '생명력의 소모'일 뿐이며, '데이터의 소멸'로 격하된다. 그 어디에도 생명의 온기는 없다. 그들은 '사실'이라는 현미경으로 생명의 부속품을 분해하는 법은 알았을지 모르나, 그 부속품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삶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는 귀는 없었다.
사랑을 모르는 그들의 냉혹한 시선은 현상이 ‘어떻게(How)’ 일어나는지를 기술할 뿐, 정작 우리가 ‘왜(Why)’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는 단 한 줄도 빚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삶의 결을 무시한 채 “이것이 인간의 진짜 실체다”라고 우기는 그들의 논리는, 삶의 흙먼지 속에서 뒹굴어야만 하는 우리의 눈에는 그저 구멍 숭숭 뚫린 허술한 그물일 뿐이다.
이 지적인 파산의 현장, 그 텅 빈 폐허 위에 서 있는 현대인의 초상을 예리하고 처절하게 포착한 작품이 바로 이청준의 소설 『병신과 머저리』이다. 소설 속 형과 동생은 모두 시대의 폭력 앞에서 훼손된 ‘병신’이자 ‘머저리’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겪는 고통의 질감과 대처 방식은 극명하게 달랐다.
형에게는 전쟁터에서 겪은 명확한 사건, 즉 뚜렷한 ‘환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이 악랄한 상관 오관모와 그에게 죽임당한 김일병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았다. 적의 얼굴이 명확했기에, 형은 소설을 쓰며 그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비록 현실에선 오관모가 김일병을 쏴 죽일 때 비겁하게 방관했을지라도, 그는 소설 속에서나마 악인 오관모를 죽임으로써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고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려 몸부림친다.
동생인 ‘나’는 형의 이 미완성 소설을 몰래 훔쳐 읽는다. 형은 동생이 훔쳐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한다. 그가 쓰던 소설은 한쪽 팔이 잘린 불쌍한 김일병이든 그를 죽이려는 오관모든, 누군가는 죽어야만 끝나는 절박한 상황에서 멈춰 있었다. 그 멈춤은 비겁했던 형이 동생에게 던지는 소리 없는 물음이었다. 무기력과 비겁함의 동굴 속에서 제발 탈출하기를 바라는,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나는 비겁했지만, 너는 나보다 나은 결말을 낼 수 있지 않느냐?”는, 자신과는 달리 용감한 동생을 바라는 형의 간절한 기대였다.
그러나 환상통에 시달리던 동생은 형의 기대를 처참하게 배신한다. 동생에게는 형처럼 눈에 보이는 적(전쟁)이 없었다. 대신 1960년대라는 시대의 공허와 무기력이 보이지 않는 적이 되어 안개처럼 그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싸워야 할 적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동생은 저항할 수도 없었고 분노를 쏟아낼 곳도 없었다.
이 무력감 속에서 동생이 제멋대로 써 내려간 소설의 결말은 참혹했다. 동생이 이어 쓴 형의 소설 속 주인공은 악의 실체인 오관모를 향해 총구조차 겨누지 못한다. 대신, 밤마다 자신을 찾던 오관모의 발길이 썩어가는 상처의 악취와 함께 끊기자, 이제 욕망의 도구로서 쓸모가 다해 죽임당할 것임을 직감하고, 겨울 준비를 핑계로 자신을 죽이려는 오관모에게 비참하게 끌려가던 김일병. 이미 초점을 잃어 나를 보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흐릿한 눈으로 끝끝내 살고 싶어 끌려가면서도 내 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돌리던, 그 초점 잃은 눈빛이 마치 ‘살려줘, 제발 살려줘, 동료를 죽이는 게 어딨어, 오관모를 쏴 죽여, 그게 맞잖아, 제발 살려줘.’라고 절규하는 듯했던, 그 불쌍한 김일병을 향해 총을 쏜다.
악과 맞서 싸울 용기가 없었던 동생은, 지켜야 할 대상이자 자신의 양심을 끊임없이 건드리는 약자를 제거함으로써 그 지옥 같은 상황을 회피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싸울 대상을 모르는 자가 저지른, 더없이 비겁하고 비극적인 오발(誤發)이었다.
형은 동생이 쓴 이 비겁한 결말을 찢어버리고, 자신이 직접 오관모를 쏘아 죽이는 것으로 소설을 끝맺는다. 형은 소설 속에서라도 악을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형은 곧 깨닫는다. 소설 속에서 오관모를 죽였다고 해서 자신의 관념 속에서 오관모가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그렇게 현실의 고통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님을. 자신의 관념 속에서 오관모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므로, 형은 쓸모없는 자신의 소설을 불태운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원고 앞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는 동생을 향해 일갈을 던진다.
“이 참새 가슴 같은 것, 썩 네 굴로 꺼져!”
형의 이 고함은, 오늘날 김일병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 수많은 ‘동생들’에 대한 꾸짖음이다.
니체는 ‘공(空)’의 잿더미 위에서, ‘사랑(아가페)’이라는 김일병을 쏘았다. 그는 사랑을 ‘노예 도덕’이라 폄하하며 죽여버리고, 그 자리에 ‘힘에의 의지’라는 또 다른 맹목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적인 자기모순이었다. 니체는 평생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이며 ‘위대한 고통’만이 인간을 도약시킨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결국 광기라는 파멸로 끝났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진짜 스승인 석가모니의 지혜를 빌려와야 한다. 그 역시 출가 초기에는 니체보다 더 처절하게 육체를 학대하며 진리를 갈구했다. 6년 동안 뼈만 남을 정도로 극단적인 고행을 이어가던 어느 날, 네란자라 강가에 쓰러진 그에게 소녀 수자타가 우유 죽 한 그릇을 건넸다.
그 따뜻한 김 속에 서린 생명의 온기를 마주한 순간, 그는 자각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학일 뿐이다. 학대받은 육체라는 깨진 그릇에는 온전한 정신의 빛이 고일 수 없다.’ 그는 마침내 자신을 옥죄던 고행의 사슬을 끊고, 수자타가 건넨 사랑의 구명줄을 기쁘게 움켜쥐었다.
스스로를 파괴하던 투쟁을 멈추고 타인의 온기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비로소 위대한 깨달음의 문턱을 넘었다. 석가모니는 우유 죽을 마시고 ‘부처’가 되었지만, 니체는 끝까지 그 사랑의 죽을 거부한 채 자신의 황폐한 성채 안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다 ‘광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악(허무)을 향해 총구조차 겨누지 못하고, 정작 자신(사랑)을 파괴해 버린 ‘비극적 동생’의 최후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냉정하게 직시해야 할 것이 있다. 도킨스의 유전자론이나 하라리의 알고리즘론이 과학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분석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한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오직 ‘사실’만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은 언제나 그 차가운 사실의 경계(境界)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미경 아래의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사실’에 머물지만, 손양원이 그 호르몬으로 나병 환자의 피고름을 빨아냈던 순간, 그것은 사실의 감옥을 부수고 ‘진실’이 되어 비행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치명적인 죄악은 거짓말을 한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의 죄는 ‘부분적인 사실’을 ‘삶의 전체 진실’인 양 호도하여, 인간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숭고한 책임을 증발시켜 버린 ‘지적 직무유기’에 있다.
물리학적으로 분석하면, 아이를 달래는 어머니의 자장가는 단지 공기의 진동일 뿐이다.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공포에 떠는 아이에게 “그건 공기의 진동일 뿐이야. 그러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넌 안심하고 편하게 잠을 자면 안돼.”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온전한 진실인가? 그것은 ‘사실’이라는 이름의 폭력이다. 어머니의 자장가가 아이를 잠재우고 안심시키듯, 우리가 믿는 사랑과 존엄이라는 가치는, 설령 그것이 호르몬의 작용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인간을 구원하고 세상을 지탱한다.
그런데 이 ‘비겁한 지성’들은 차가운 현미경 뒤에 숨어 이렇게 속삭인다. “어차피 다 호르몬이야. 어차피 다 알고리즘이야.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마.” 그들은 과학적 사실을 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핑계 삼아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지켜야 할 윤리적 의무를 면제해 주는 ‘허무주의라는 마약’을 판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들이 마치 대단한 미래의 비밀을 발견한 선지자처럼 굴지만, 실상 그들의 사상은 오래된 허무주의의 세련된 재포장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하라리가 그토록 충격적인 척 던진 “신과 국가, 그리고 인권마저 인류의 집단적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Imagined Order)’일 뿐”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21화에서 살폈듯 자신의 에고(Ego) 외엔 모든 가치를 실체 없는 환영이라 규정했던 막스 슈티르너가, 신도 국가도 도덕도 인류애도 모두 머릿속에 들어앉아 우리를 조종하는 ‘유령(Spook)’일 뿐이라고 일축했던 그 낡은 냉소와 무엇이 다른가? 이건 너무 똑같아서 누가 했던 말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이다.
하라리는 단지 19세기의 슈티르너가 보았던 그 ‘유령’들의 이름을 ‘알고리즘’과 ‘데이터’라는 현대적 언어로 번역했을 뿐이다. 낡은 술을 새 부대에 담아 마치 처음 빚은 술인 양 내놓은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미래학자나 선구자가 아니다. 그들은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이라는 이미 오래전에 파탄 난 과거의 망령들을, 최신 과학 용어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현대인들에게 냉소라는 아편을 파는 영리한 편집자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차라리 그 파탄의 원조인 슈티르너가 새삼 대단해 보일 지경이다. 천하의 니체도, 21세기의 예언자 하라리도, 결국은 그를 베끼려 혈안이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괴테의 혜안을 빌려, 그들의 진짜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 200년 전,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해 인류를 유혹하는 검은 그림자의 실체를 이미 그려놓았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항상 부정(否定)하는 정신(Geist)이다.”
보라, 메피스토펠레스의 이 섬뜩한 자기소개가 오늘날 현대 지성의 민낯과 얼마나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는지를. 마르크스는 종교를, 니체는 신을, 프로이트는 이성을 부정했다. 그 뒤를 이어 푸코는 인간을, 도킨스는 창조를, 하라리는 영혼을 부정했다. 그들은 숭고한 모든 가치에 ‘허구’와 ‘망상’, ‘권력’과 ‘욕망’이라는 딱지를 붙여 파괴함으로써, 메피스토펠레스가 자처했던 ‘부정의 정신’을 충실히 대변했다.
물론 여기서의 비판은 특정 사상가의 인격이나 의도를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사유가 반복적으로 생산해 온 결과와 구조를 겨냥할 뿐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순수한 연인 그레첸을 파멸로 몰아넣었듯, 현대의 메피스토펠레스들은 우리 가슴 속에 있는 ‘그레첸(순수한 사랑)’을 조롱하고 살해했다. 사랑을 호르몬의 장난으로, 희생을 노예의 도덕으로 격하시키며, 우리를 차가운 지성의 감옥 속에 가두려 했다.
그들은 시대를 호령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가면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부정하는 정신’이라는 그 서늘한 카리스마로 세상을 압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면 드러나는 실체는 초라하다. 그들은 악마적 힘을 가진 파괴자가 아니다. 이청준의 소설 속 동생처럼, 싸워야 할 대상과 정면으로 대면하기를 회피한 채, 부정의 언어 속으로 후퇴해버린 사유의 겁쟁이들에 불과하다.
이청준의 문학적 틀 안에서 보자면, 이들이야말로 싸워야 할 대상(시대의 허무와 부조리) 대신 지켜야 할 대상(인간의 영혼과 사랑)을 죽이고 서재라는 관념의 굴속으로 숨어든, 그가 그토록 아프게 질타했던 ‘병신과 머저리’ 그 자체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옳은가? 동생처럼 굴속으로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형처럼 기어이 그 굴속에서 빠져나와 맞서 싸울 것인가? 형은 결국 자신의 소설(관념)을 모두 불태우고, 현실의 수술실로 돌아가 메스를 들었다. 아픔의 원인을 알기에, 그는 악이 언제든 되살아날 것을 알면서도 끝없이 다시 싸우는 길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공즉시색’의 길이다. 이것은 단순한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해체(空)’에 머물지 않고 ‘사랑의 실천(色)’으로 나아가려는, 우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처절한 모델이다.
보이지 않는 적(空) 앞에서 이유도 모른 채 앓고만 있을 것인가? 김일병(사랑/가치)을 쏴 죽이고 서재라는 굴 속으로 꺼져버릴 것인가? 아니면 비록 상처투성이 병신일지라도, 싸우지도 못하는 머저리로 남지 않기 위해 사랑이라는 펜과 메스를 들고 되살아나는 허무(오관모)를 향해 끝까지 저항의 방아쇠를 당길 것인가? 이청준이 형의 입을 빌려 던진 그 치열한 질문은, 신이 침묵하는 이 시대에 더욱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 책, 『성스러운 반역』이 시도하려는 여정은 다르다. 이 책 역시 ‘색즉시공’의 길을 걸었다. 제12화(이반의 절규)와 제19화(절름발이)를 통해, 기존의 낡은 신정론과 교리, 율법(色)은 모두 ‘지적인 오만’이요 ‘우상’(空)이라고 완벽하게 해체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공(空)’의 허무주의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신의 침묵’(空)이라는 바로 그 잿더미 위에서, 우유 죽 한 그릇의 온기로 사랑과 진리의 성전(聖殿)을 세운 석가모니의 그 뜨거운 지혜를 본받아 ‘공즉시색’이라는 ‘창조’의 길을 단호히 선언한다. 그리고 그 ‘창조’되어야 할 가장 위대한 ‘색(色)’이 바로 ‘아가페’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우리의 ‘응답’이야말로 이 책의 여정이 도달하려는 최종 목적지이다.
우리는 랭보가 『지옥에서 보낸 한철』에서 ‘나는 저들과 같은 피가 아니다’라고 토해낸 그 선언을 우리의 가슴에 다시 새겨야 한다. 계산된 유용성과 차가운 알고리즘의 질서 속에 안주하는 ‘저들의 피’가 정착과 순응의 길을 갈 때, 우리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뜨겁고도 ‘야만적인 사랑의 피’를 선택한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희생은 비합리적인 야만일지 모르나, 그 길들여지지 않는 생명력이야말로 허무의 잿더미 위에서 꽃을 피우는 유일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2004년 12월, 인도양 쓰나미가 동남아시아를 덮쳤다. 23만 명이 죽었다. 인도네시아의 한 마을에서, 한 할머니는 자신의 손자가 아닌 이웃 아이를 안고 뛰었다.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냥 그렇게 됐어요." 도킨스는 이 문장을 설명할 수 없다. 하라리는 이것을 허구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 할머니의 팔에 안겨 살아남은 아이는 지금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다. 허구가 사람을 살린다면, 그것은 허구가 아니다.
우리는 짐승도, 노예도, 기계도 아니다. 우리는 랭보처럼 기꺼이 지옥 같은 현실을 통과하며, 고귀한 영혼을 품고 사랑으로 응답하는 주체적 '인간'이다. 그러니 우리 함께, 그들의 총구에 맞서 사랑이라는 이 성스러운 반역의 죽창을 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