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당신의 사소한 하루가 위대한 증명인 이유

신의 침묵, 그리고 만남

by 낭만적 반역자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농노 출신의 하인, 게라심이다.

고위 판사 이반 일리치는 평생 ‘올바르게’ 살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좋은 직업과 품위 있는 가정과 적절한 사교 관계를 갖추며. 그러나 죽음이 찾아오자, 그 ‘올바른 삶’ 전체가 거짓이었음이 드러난다. 동료들은 그의 죽음보다 후임 자리를 걱정하고, 아내는 그의 고통보다 장례 절차를 계산한다. 임종을 앞둔 이반 일리치 곁에서 진심으로 그를 대한 사람은 오직 게라심 하나뿐이었다.


게라심은 철학을 논하지 않았다. 위로의 말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이반의 다리를 밤새 자신의 어깨에 올려 들어주었다. 그렇게 하면 이반의 고통이 조금 가라앉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렇게 되는 거니까요.” 그 단순한 말 한마디가, 이반 일리치가 평생 공들여 쌓아온 세련된 허위의 세계 전체를 무너뜨렸다. 죽어가는 판사를 구원한 것은 신학도, 위대한 결단도, 거창한 희생도 아니었다. 밤새 누군가의 다리를 들어 올려주는 한 사람의 거리낌 없는 손이었다.


우리는 앞선 여정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혼들을 만났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자청한 콜베 신부, 히틀러에 맞서 총을 든 본회퍼, 성화를 밟으며 이웃을 살린 로드리고. 그 장엄한 서사 앞에서 우리는 압도되고, 그리고 어느 순간 조용히 묻게 된다. ‘저 위대한 증인들의 삶이 과연 나의 평범한 하루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정직한 물음이다. 나의 삶은 역사의 서사시가 아니다. 거대한 불의 대신 사소한 무례함이, 압제에 대한 저항 대신 직장 상사에게 할 말을 참아야 하는 비굴함이, 원수를 향한 용서 대신 나에게 상처 준 친구를 향한 뒤끝이 내 삶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증명은 저 멀리 밤하늘의 별들에게만 허락된 임무인가?


게라심을 다시 보라. 그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구호를 외치지 않았고, 원칙을 선언하지 않았으며, 어떤 신학적 결단도 내리지 않았다. 그는 다만 밤새 한 사람의 다리를 들어 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 소설 전체를 통해 하나의 진실을 선언한다. 이반 일리치의 영혼을 구원한 것은 그 어떤 위대한 행위도 아니었다고. 오직 게라심의 그 투박하고 거리낌 없는 손이었다고.


게라심의 위대함은 특별한 결단에 있지 않다. 그는 다만 눈앞의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전부가, 한 인간의 마지막 순간을 구원했다.

물론 우리는 게라심처럼 사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맞서야 할 적은 뿔 달린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나’ 자신의 얼굴, 즉 이기심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중력이다. 사랑이 저 높은 곳을 향하려는 날갯짓이라면, 이기심은 그 날갯짓을 무겁게 만드는 땅의 법칙이다.


이 중력은 구체적인 얼굴들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소진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내밀었던 손이 외면당하고, 선한 의지가 오해로 돌아올 때, 우리의 영혼은 재를 뒤집어쓴다. 그 폐허 위에서 ‘세상은 어차피 변하지 않아’라는 냉소의 속삭임이 자라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사랑은 무한히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다. 그것은 호흡과 같다. 내쉬는 숨이 있으면 반드시 들이쉬는 숨이 있어야 한다. 지친 나를 향한 자비는 타인을 향한 사랑만큼이나 거룩하다. 게라심도 낮에는 잤다. 그는 자신을 소진시키며 이반을 돌보지 않았다. 그는 쉬었기에 밤새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소진의 불길이 가라앉으면, 이내 더 날카로운 혐오의 가시가 돋아난다. 우리는 위대한 용서의 이야기에 감탄하지만, 정작 동료의 거슬리는 말투 하나가 온종일 영혼을 할퀸다. 이 가시를 뽑는 길은 그를 억지로 사랑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자신만의 지옥 속에서 허덕이는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임을 상상하는 아주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다. 아가페는 그를 뜨겁게 좋아하게 되었다는 감정의 성취가 아니다. 혐오라는 중력에 맞서 단 한 걸음이라도 긍정의 방향으로 내딛으려는 의지의 승리다. 마주쳤을 때 먼저 인사 한 번, 무심코 험담하려는 입술을 닫는 것, 마지못해서라도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 어색하고 사소한 행위들이 혐오의 연쇄를 끊는 가장 현실적인 훈련이다.


그리고 무력감이 찾아온다. 구조적인 악 앞에서 나의 작은 선행은 바다에 던지는 조약돌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게라심은 세상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 한 사람의 다리를 들어 올렸을 뿐이다. 사랑의 증명은 결과가 아니라 방향이다. 내 주변을 밝히는 촛불 하나를 켜는 것, 그 끈질긴 방향성 자체가 무력감이라는 짙은 안개를 뚫고 나아가는 유일한 빛이다.


이 소진과 혐오와 무력감이라는 세 가지 중력과 싸우는 일상의 전쟁터. 그곳이 바로 신의 침묵이 가장 뼈아프게 느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고, 선을 행하지만 세상은 요지부동이며, 사랑하려 애쓰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소뿐인 날들을 산다. 신은 왜 침묵하는가.


이반 일리치도 그 침묵 속에서 죽어갔다. 그의 방에는 기적이 없었다. 계시도, 환한 빛도, 극적인 화해도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의 한복판에서 이반 일리치는 생애 처음으로 거짓 없는 무언가와 마주쳤다. 게라심의 손이었다. 톨스토이는 이 장면에서 신학적 언어를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한 하인의 손을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독자는 바로 그 손에서 신의 응답을 듣고 전율한다. 신의 침묵이 한없이 깊었던 그 방에서, 침묵을 깬 것은 말이 아니라 손이었다.


콜베 신부와 본회퍼의 숭고한 결단은 하늘에서 떨어진 초인적 영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에 걸쳐 게라심처럼, 매일의 작은 전쟁터에서 눈앞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던 사소하고 지루한 훈련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필연적 귀결이었다. 위대한 증인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소진되고, 혐오의 가시에 찔리고, 무력감에 짓눌리면서도, 단 한 번 더 일어나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일상의 훈련자들이었을 뿐이다.


숭고함은 일상을 포기한 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치열하게 일상을 살아낸 자에게 주어지는 이름이다. 게라심의 소박한 연민이 한 영혼에게 구원이었듯, 동료에게 건네는 당신의 작은 말 한마디 역시 하나의 우주를 구하는 위대한 증명이다.


무대는 당신의 일상이고, 대본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숭고한 증명은 지금, 당신의 바로 다음 선택에서 시작된다. 그 작은 전쟁터의 한복판에서, 당신의 삶이 사랑으로 연주될 때, 비로소 신은 침묵을 깨고 당신과 가장 치열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