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카뮈가 생각하는 부조리한 세계 속, 가장 숭고한 모습의 예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리유라는 박사가 작중 인물로 등장한 바 있다. 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정의가 사뭇 다르지만, 나 역시 리유의 모습보다 내 주장을 증명하기에 특별하게 더 나은 인물은 떠오르지 않는다. 개념 정의가 다른데 어째서 그럴까? 그러나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카뮈나 리유처럼 신을 믿지 않든, 아니면 도스토옙스키나 알료샤처럼 신을 믿든 어쨌든. 석가모니나 그리스도 같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이 선사한 사랑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탐구의 방법이나 과정이 아무리 달랐더라도 어리석지 않고 정직하다면 정답은 모두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이 다른 실존주의 철학들과 갈라서는 지점이 바로 이 확신일지 모른다. 사르트르나 카뮈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이 ‘길이 보이지 않는 험준한 산’ 앞에서 그 산의 부조리함과 등반의 고독함을 철저하게 분석했다면, 이 책은 감히 저 멀리 보이는 봉우리를 가리키며 “저곳이 바로 우리가 올라야 할 ‘사랑’이라는 정상이다”라고 말하려 했다. 정상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의 증인들이 보여주었듯, 그곳까지 올라가는 과정은 그 어떤 등반보다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라는 정답에 이르지 못했을 때 인간이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를 가장 처절하게 탐구한 인물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통해 인간 구원의 두 가지 길을 탐구했다. 하나는 ‘신이 없다면 내가 신이다’라고 선언하며 스스로 신이 되려는 오만한 인간, 즉 그의 작품 『죄와 벌』에서 ‘비범한 인간은 도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파멸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론으로 존속살인의 공모자가 된 또 다른 파멸의 주인공 이반 카라마조프가 그랬던 ‘인신(人神)’의 비극적인 길이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었듯, 신이 스스로를 낮추어 인간이 된 겸손과 사랑의 존재, 즉 ‘신인(神人)’의 숭고한 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도스토옙스키의 통찰이야말로, 우리가 리유 박사의 실천적 아가페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그를 창조한 카뮈의 사상과는 갈라서는 결정적인 분기점이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니체를 숭고한 의도를 가졌으나 배반당한 비극적 예언자로 보았다. 하지만 이 책의 3부 ‘사유’가 증명했듯, 그 ‘오용’은 ‘인신’의 비극처럼 필연적이었다. 그것은 배반당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윤리적 안전장치를 스스로 제거함으로써 애초에 파멸의 논리를 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은 비극의 무게중심을 ‘사상가(니체)’에서 ‘피해자(아우슈비츠의 영혼들)’에게로 옮길 것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니체를 향한 우리의 시선은 ‘연민’이 아니라, 그 명백한 위험성을 경고한 도스토옙스키의 통찰을 외면한 지성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꾸짖음 만으로 이 책의 여정이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사상이 가진 ‘치명적인 위험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가 제시한 ‘숭고한 가치’는 수용해야 공정하다. 도스토옙스키가 ‘인신’의 파멸을 경고했다면, 그는 동시에 ‘신인’의 숭고함도 제시하지 않았는가. 이 책의 최종 결론은 이 두 길, 곧 니체의 ‘주체성’이 의미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외부의 어떤 권위나 율법에도 굴하지 않으며 삶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창조하려는 그 강인한 의지와, 그 주체적인 의지가 ‘나’를 넘어 ‘우리’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연대하며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아가페’가 만나는 바로 그 연결점에서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이고 강력한 인간상을 발견하는 것에 있다.
이 둘의 조화는 나약한 복종이 아닌 창조적인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사랑의 실천가를 탄생시킨다. 그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허무주의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고 그 의미를 사랑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강인한 존재이다. 이들은 자기 극복을 통해 최고의 힘에 이르고, 그 힘을 이웃과 세상을 위해 사용하며,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소망할 수 있는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야말로 낡은 신앙의 영생관을 넘어선, 이 땅 위에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영생’의 증명이자, 가장 긍정적인 ‘인간 창조’의 과정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인신(人神)’의 비극과 ‘신인(神人)’의 숭고함을 대비시켰다면, 이제 이 두 길을 넘어서는 제3의 길을 제안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사실 이 글은 도스토옙스키의 이루지 못한 꿈을 빚지고 있다. 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성한 뒤, 주인공 알료샤가 수도원을 나와 광야 같은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지를 다룬 ‘제2부’를 집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원고를 쓰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긴 것은 거대한 질문과 텅 빈 페이지뿐이었다.
나는 지난 긴 시간 동안, 그가 남기고 떠난 빈 페이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감히 이 시대의 황무지 위에서 알료샤의 발자국을 흉내 내어 한 걸음씩 떼어보려 했다. 사랑이라는 답이 수도원의 관념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흙먼지 날리는 이 땅 위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삶으로 ‘창조’될 수 있는지, 그 미완의 대답을 찾고 싶었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의 긴 여정 끝에 도달한 최후의 대답이다. 나는 이 대답을 위해, 도스토옙스키가 그토록 강하게 경고했던 ‘인신(人神)’의 오만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인신창조(人神創造)’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신(人神)’의 오만한 길도, 사랑을 거세한 ‘초인’의 길도 아니다. 정반대로, 그것은 ‘인간(人間)이 신성(神性)을 창조(創造)’하는 길이다. 비어버린 신의 자리를 나의 사랑으로 메우는, 가장 겸허하고 처절한 실존적 결단이다. 이 창조는 없는 것을 허구로 지어내는 ‘발명’이 아니다. 사랑이 실천되는 그 순간, 비로소 신이 이 땅에 현존하게 되는 거룩한 ‘발생(發生)’이다. 내가 신의 자리에 앉겠다는 오만이 아니라, 신의 빈자리를 나의 사랑으로 채우겠다는 섬김이며, 힘과 지배를 넘어 오직 그리스도가 보여준 아가페적 희생을 따르겠다는 굳은 의지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신론마저 넘어선다. 도킨스가 신을 ‘망상’이라 비웃든(『만들어진 신』), 하라리가 ‘허구’라 규정하든(『사피엔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들의 말대로 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또 어떠한가.
그래, 신을 만들어라. 설령 신이 ‘발견’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말처럼 ‘발명’되어야 하는 존재라면, 그 창조의 권리 또한 우리에게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주저 말고 신을 빚어라. 다만, 그 신을 혐오와 폭력의 괴물로 빚지 말고,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완성하라. 우리가 창조해야 할 신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군주가 아니다. 우리의 사랑을 통해 비로소 숨을 쉬고, 우리의 실천을 통해 비로소 이 땅에 발을 딛는, 우리가 끝끝내 책임져야 할 ‘발생적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또다른 치명적인 철학적 맹점을 직시해야 한다. 그는 일찍이 불교를 ‘지친 자들을 위한 위생학’이라 부르며, 고통에서 도망치려는 수동적 허무주의의 산물이라 비하했다. 그는 불교의 비움을 생명력의 포기라고만 보았을 뿐, 그 비움의 층위 너머에서 솟구치는 압도적인 능동성을 자신의 사유 속에 포착해 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니체의 조소를 뒤로하고, 가장 위대한 사유의 승리자인 석가모니의 발치를 우러러보아야 한다. 니체의 초인이 자기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힘’이라는 에고의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릴 때, 석가모니는 그 성벽마저 허물어버린 텅 빈 심연에서 ‘사랑’이라는 신성을 자생적으로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좁은 울타리를 부수고 비워낸 그 거대한 공허 속에, 비로소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무한한 자비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 글의 여정 내내 그리스도의 아가페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도 이와 발걸음을 같이한다. 그의 삶과 죽음이 보여주는 서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이고 눈부신 사랑의 정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라는 참혹한 비극의 형틀에서 꽃 피운 위대한 용서만큼 우리의 가슴을 적시는 감동의 드라마는 일찍이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가슴을 가장 뜨겁게 적시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서사였다. 그러나 그 뜨거운 감동의 안개를 걷어내고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응시할 때라면, 석가모니가 도달한 지점은 가장 준엄한 인간 승리의 현장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랑’을 집행했다면, 석가모니는 하늘조차 텅 비어버린 절망의 심연에서 오직 인간의 의지만으로 ‘사랑의 실체’라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신을 삶 속에서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이렇듯 진정한 사유는 고요한 서재가 아니라, 땀과 피가 뒤섞인 삶의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다.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은 논리는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주요섭의 수필 『미운 간호부』에 등장하는 서늘한 풍경 하나를 떠올려본다. 전염병으로 죽은 어린 딸의 시체를 두고, 혼자 두면 아이가 무서워할까봐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간호부는 싸늘하게 쏘아붙인다.
“죽은 애를 혼자 두면 어때요? 시체실은 쇠(자물쇠)가 잠겨서 아무도 못 들어가요.”
간호부의 말은 ‘과학적 사실’이다. 생물학적으로 죽은 시체는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며, 쇠로 잠긴 문은 물리적으로 안전하다. 그러나 작가는 그 차가운 정답 앞에서 몸서리치며 절규한다. “나는 문명한 기계보다 야만인 인생을 더 사랑한다. 정(情)! 그것은 인류 최고 과학을 초월하는 생의 향기이다.”
오늘날 현대의 서점과 강단을 점령한 ‘도킨스의 후예들’과 ‘하라리의 추종자들’은 바로 이 ‘미운 간호부’를 닮아있다. 그들은 도킨스의 유전자론이나 하라리의 데이터교 마저 하나의 세련된 ‘지적 패션’으로 소비한다. 그들은 안락한 에어컨 바람 아래 앉아, ‘사랑’이라는 어머니의 떨리는 마음을 ‘호르몬의 작용’이라 조소하고, 인간의 고귀한 영혼마저 ‘진화가 만들어낸 편리한 허구’라고 단정 짓는 차가운 메스를 들이대며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이것은 기만이다. 그들의 신발에는 삶의 흙탕물이 단 한 방울도 묻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간호부의 논리가 어머니의 슬픔을 구원하지 못했듯, 아우슈비츠와 톤즈라는 삶의 구체적인 고통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그 창백한 이론들이, 과연 고통받는 자의 눈물을 단 한 방울이라도 닦아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저 차가운 메스를 버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많은 이들이 그 대안으로 ‘뜨거운 투쟁’을 선택한다. 니체의 ‘힘’을 이어받아 신을 구원하겠다고 외쳤던 카잔차키스(『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차가움만이 아니다. 잘못된 뜨거움 역시 영혼을 태워버리는 불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카잔차키스를 비판하기 전에, 그에게 마땅한 공정한 무게를 먼저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은 실제로 사람을 살렸다. 물질의 안락함에 젖어 영혼이 잠들어 있던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그리스인 조르바』의 그 거칠고 자유로운 춤은 "너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던 그의 실천적 생애는, 책상 앞에서 관념만 다듬던 많은 지식인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장 앞에서 전율하며 삶의 방향을 바꾼 영혼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 사실을 우리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바로 그 강렬한 힘 때문에, 우리는 더욱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그 불꽃이 과연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가.
물론 신은 낡은 도서관의 서늘한 논증 속에 살지 않는다. 그는 뜨거운 대지 위, 인간의 땀과 피가 섞이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만 호흡한다. 신은 하늘에서 완성되어 내려오는 기적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망치를 들고 부조리한 세상이라는 바위를 내리칠 때, 그 틈에서 튀어 오르는 불꽃, 바로 그 찰나의 섬광 속에 신은 ‘발생’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신을 ‘창조’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신을 향한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신을 존재하게 하는 믿음의 원인이다.
우리가 틔워낸 이 ‘불꽃’은, 카잔차키스가 평생을 바쳐 부르짖었던 절규와 맞닿아 있는 듯 보인다. 그는 신을 전지전능한 해결사가 아닌, 물질의 어둠 속에 갇혀 “나를 구하라!”고 비명 지르는 ‘위태로운 불꽃’으로 보았다. 그는 우리가 나태하면 신도 죽고, 우리가 투쟁하면 신도 구원받는다고 외쳤다. 그러나 냉정히 들여다보면, 그가 말한 구원의 도구인 ‘투쟁’은 결국 니체가 말했던 ‘힘에의 의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에게 그 ‘의지’는 육체라는 감옥을 부수고 영혼을 해방 시키려는, 자기 자신을 향한 가혹한 전쟁이었다.
실제로 그의 소설 『성 프란체스코』에서 프란체스코가 영혼을 해방하기 위해 육체를 가혹하게 학대하고 불태웠듯, 그의 구원은 ‘인간적인 것(육체/사랑)’을 파괴해야만 ‘신’이 살 수 있다는 너무나 잔인한 실천을 요구한다.
이러한 ‘거룩한 파괴’의 유혹은 사실 인류 사상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우리는 그 유혹의 뿌리에 도사린 거대한 착각과 마주해야 한다. 그 현대적 비극의 전형(典型)을 보여준 인물은 신을 독점하기 위해 약혼녀 레기네를 비정하게 버리고 홀로 골방에 틀어박혔던 19세기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였다. 그리고 앙드레 지드는 소설 『좁은 문』의 여주인공 알리사를 통해 이 빗나간 신앙의 비극을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재현했다. 냉정하게 말해, 알리사는 성별만 바뀐 키르케고르였다.
키르케고르가 ‘신 앞에 선 단독자’가 되기 위해 연인의 손을 놓아버렸듯, 알리사 역시 ‘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명분으로 제롬의 사랑을 ‘영적 방해물’이라 여겨 밀어냈다. 그들은 인간적인 행복을 파괴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것이야말로 신을 향한 가장 숭고한 증명이라 착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최후를 보라. 평생 약혼녀를 그리워하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 고독하게 죽어간 키르케고르나, “주여, 저는 지쳤습니다”라고 탄식하며 시들어버린 알리사나, 그들이 도달한 곳은 구원의 빛이 아니라 구속의 어둠뿐이었다.
좁은 문이 좁은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신은 사랑하는 이를 버리고 절벽 위로 올라온 자의 고독을 반기지 않는다. 신은 차라리 좁은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할지언정, 사랑하는 이의 손을 놓지 않으려 버티는 자들의 곁에 머문다. 진정한 좁은 문은 혼자서만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아니다. 둘이선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비좁아 보일지라도, 기어이 서로의 몸을 엉켜서라도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통과하려는 그 치열함 속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카잔차키스는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지드가 이미 ‘비극’으로 판명 낸 그 길을 ‘구원’이라 강변하며 우리에게 다시 걸으라 강요한다. 알리사와 키르케고르의 자기부정이 내면을 향한 조용한 살인이었다면, 카잔차키스가 미화한 투쟁은 그것을 영웅적 서사로 포장한 거칠고 요란한 자해일 뿐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카잔차키스와 키르케고르가 보여준 그 치열한 투쟁이 예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치열함은 신의 본질을 오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신이 인간의 행복을 저당 잡고, 끊임없는 고통과 희생을 요구하며, 우리를 옭아매는 ‘구속(拘束)의 주체’로 여겼다. 그랬기에 그들에게 신앙은 자유가 아니라 무거운 형벌이었고, 사랑은 기쁨이 아니라 가혹한 의무였다.
그러나 단언컨대, 신은 인간을 구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원하는 존재이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나를 위해 너를 파괴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친 우리를 향해 선언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예수는 자신의 손발에 쇠못을 박는 로마 병사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했고, 자신을 배반하고 비겁하게 도망친 제자들조차 끝까지 찾아가 품어주었다(요한복음 21장).
그러나 그런 ‘사랑의 화신’조차 유일하게 독설과 저주를 퍼부은 대상이 딱 한 부류 있었으니, 바로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으로 인간의 영혼을 짓눌렀던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을 향한 “독사의 새끼들아!(마태복음 23:33)”라는 외침 속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짐을 지우고 그 영혼을 파괴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랑의 증오가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주려던 것은 율법의 사슬이나 투쟁의 멍에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를 죄책감과 율법, 그리고 자기 학대의 감옥에서 해방 시켜 비로소 온전한 인간으로 서게 하려 했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우리에게 그 바리새인의 율법에 못지않은 무겁고 가혹한 짐을 지우고 있다. 예수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벗기고 ‘완전한 쉼’을 주려 했지만, 그는 우리 어깨 위에 ‘신을 구원하라’는 감당할 수 없는 ‘투쟁의 짐’을 얹어놓는다. 그는 우리 영혼을 해방시키려 했으나, 역설적으로 ‘투쟁’이라는 더 무겁고 화려한 감옥을 짓고 말았다.
이 명백한 모순 앞에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째서 우리 시대의 지성들이 그를 ‘치열한 영성’의 상징으로 추앙하는가? 텍스트의 화려한 수사에 매료되어, 정작 그 텍스트가 가리키는 방향이 예수의 길과 정반대임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라면 예수가 그토록 분노하며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외쳤던 바리새인들이 율법이라는 무거운 짐으로 인간의 영혼을 억압했음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카잔차키스는 그 자유의 복음 위에 다시금 ‘피 흘리는 투쟁’이라는 또 다른 짐을 지우고 있다. 짐을 벗겨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짐을 지우는 이것이 율법주의가 아니면 무엇인가? 비장미 넘치는 문장에 취해 이 치명적인 오류를 간과한다면, 그것은 사유를 멈춘 ‘악의 평범성’의 되풀이이다.
이러한 구속과 구원의 모습은 두 명의 인물이 보여준 ‘비슷한 행위, 그러나 정반대의 동기’ 앞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 나병 환자를 마주한 두 남자가 있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성 프란체스코는 나병 환자를 껴안고 입을 맞춘 뒤 환희에 차 외친다. “나는 나를 이겼다!” 그에게 나병 환자는 사랑해야 할 이웃이기 이전에, 자신의 혐오감과 육체적 본능을 박살 내고 영적 근육을 단련하기 위한 ‘체육관의 샌드백’에 불과했다. 그의 입맞춤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비대해진 자신의 ‘자아 성취’를 향한 나르시시즘적 승리 선언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손양원 목사는 어떠했는가? 그가 단순한 입맞춤도 아닌, 나병 환자의 썩어가는 환부에 입을 대고 피고름을 빨아낸 것은, 자신의 비위를 시험하거나 영적 수준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목이 붓고 숨이 막혀 죽어가는 타인을 살리겠다는 다급한 ‘살림의 몸짓’이었다. 그곳에는 “나를 이겼다”는 거창한 환희나 승리감 따윈 들어설 자리조차 없었다. 오직 고통받는 생명을 향한 처절한 연민만이 있었을 뿐이다. 한 사람은 ‘자기 극복’을 위해 타인을 도구로 삼았고, 다른 한 사람은 ‘타인의 생명’을 위해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삼았다. 인간을 구원한 것은 과연 어느 쪽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고통받는 민중의 곁에 직접 서려 했던 카잔차키스의 뜨거운 실천적 생애와, 물질적 욕망을 떨치고 영혼의 자유를 얻고자 몸부림쳤던 그 치열한 ‘상승 의지’ 그 자체는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 그의 문장은 분명 안락함에 길들여져 잠들어 있던 수많은 영혼을 깨우는 날카로운 채찍이었으며, 그 삶의 궤적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그 뜨거웠던 삶조차 결국 사유의 틀 안에서는 펜대 하나 쥐고 책상 앞에서 씨름했던 한 지식인의 ‘관념적 고뇌’를 끝내 넘어서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타인의 고통과 하나가 되는 실제적 현장이 삭제된 자리에서, 그의 영혼은 머릿속에서만 불속에 뛰어들었고, 머릿속에서만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의 지향점 아래에서 타인의 고통은 사랑해야 할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자신의 영적 승리를 증명하기 위해 정교하게 짜인 철학적 무대였을지도 모른다. 삶은 누구보다 뜨거웠으되, 그 열기가 가닿은 곳은 타인이 아닌 결국 자기 자신이었던 셈이다. 이 지점에서 그의 비장한 투쟁은 타인을 살리는 ‘사랑’이 아니라, 자아를 완성하려는 고독한 ‘나르시시즘’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과연 예수의 복음이 그토록 처절하게 위로만 기어 올라가야 하는 고독한 투쟁이었던가? 예수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하늘에 닿기 위해 땅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 땅으로 내려와,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며 뒹구는 ‘하강의 길’을 택했다.
카잔차키스의 투쟁이 ‘신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상승의 몸부림이었다면, 예수의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이 제물이 되는’ 하강의 은총이었다. 전자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초인적 의지라면, 후자는 인간의 한계마저 끌어안으려는 신적인 연민이다. 되풀이 해서 묻지만,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인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관념의 세계에서 찬양받는 그 비장한 투쟁이 현실의 삶으로 내려왔을 때, 자칫 누군가의 소중한 행복을 파괴하는 흉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상을 창조한 작가는 책상 위에서 고뇌했을 뿐이지만, 그것을 ‘진리’라 믿고 자신의 하나뿐인 삶을 불 속에 던져버린 순수한 영혼들이 겪을 파멸은 누가 책임질 수 있는가? 알리사의 비극이 보여주듯, 사랑 없는 상승 의지는 구원이 아니라 자기 파괴로 귀결될 뿐이다.
카잔차키스의 무덤에 적힌 그 유명한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강인한 문장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 강인함 이면에 숨겨진 서글픈 고독을 읽어야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할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가진 자는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바라는 것이 생긴다.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두려워한다. 그 간절한 바람과 두려움 속에 매여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의 묘비명은 완전한 자유의 선언이라기보다, 사랑의 끈을 놓아버린 자가 스스로를 위로하며 남긴 고독한 독백에 가깝다. 우리는 그 고독한 자유보다, 사랑 때문에 두려워하고 기꺼이 얽매이는 ‘관계 속의 인간’으로 남기를 선택해야 한다.
카잔차키스가 하늘을 향해 홀로 기어오르는 고독하고 위태로운 ‘수직의 투쟁’을 찬양했다면, 반대로 예수가 보여준 길은 가장 낮은 곳에서 이웃의 손을 잡고 퍼져나가는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수평의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니체에게서 그랬듯 우리는 그 ‘힘의 계보’를 따를 아무런 당위성이 없다. 사랑 없는 ‘힘’의 파멸이 이미 증명했듯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딛고 올라서는 힘이 아니라, 옆을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눈길과 손길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충만해지는 것은 위로 오르려는 투쟁이 아니라 내 옆을 끌어안는 단단하고 치열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의 침묵에 대해 그의 격렬한 ‘투쟁’보다,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아가페’로 응답하고자 한다. 일찍이 이어령은 인간의 지성(수평)이 절벽에 다다랐을 때 신의 영성(수직)이 내려와 만나는 지점을 ‘십자가’의 기하학으로 통찰한 바 있다. 나는 그가 닦아놓은 이 고귀한 비유를 빌려와, 이제 그 수직의 방향을 다시금 인간의 의지로 되돌려 놓고자 한다.
카잔차키스가 외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오르는 고독한 ‘수직의 투쟁’은 그저 외로운 ‘말뚝’일 뿐이며, 땅에 누워 있는 수평선은 단지 인간끼리의 ‘평면’에 불과하다. 진정한 구원은 이 둘이 만날 때 일어난다. 다만 여기서 수직의 신성은 하늘에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은총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가장 낮은 곳에서 이웃의 손을 잡는 ‘수평적 사랑’을 치열하게 실천할 때, 그 간절함이 하늘을 솟구쳐 비로소 ‘수직적 신성’을 이 땅으로 불러내리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더하기(+)’의 기적이 완성된다.
이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한일서 4:12)”는 성경의 대전제와도 완벽하게 부합한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제3부에서 그토록 우려했던 니체의 허무주의와 광기를 막아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윤리적 안전장치’이다. 그러므로 카잔차키스가 피 흘리는 ‘투쟁’을 통해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믿었다면, 우리는 타인을 위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신을 ‘창조’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을 구원하는 것이든 창조하는 것이든, 신은 힘이나 투쟁이 아닌 오직 사랑의 실천 속에서만 비로소 현존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긴 여정의 끝에서 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빌린다. 비록 사복음서 속 예수의 육성은 아닐지라도, 이 경구야말로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 심장을 꿰뚫는 가장 완벽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남아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