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세상에 왔다

검과 손

by 낭만적 반역자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정상으로 향하는 여러 길, 즉 개인의 완성, 헌신과 연대, 절망 속의 의미, 그리고 구원과 용서의 순환을 탐험했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저항하고, 책임지며, 자신을 던지는 위대한 결단의 순간들을 목격했다.

그러나 이 모든 증명 앞에서, 우리는 사랑이 마주하는 가장 고통스럽고 현실적인 딜레마와 마주해야 한다. 이 글은 지금까지 ‘사랑 대(對) 반(反)사랑(이기심, 혐오)’의 구도를 다루어왔다. 하지만 현실의 가장 큰 비극은 종종 ‘사랑 대 사랑’의 충돌에서 발생한다. ‘내 가족을 지키려는 사랑’이 ‘공동체의 정의를 지키려는 사랑’과 정면으로 부딪힐 때, 우리는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하는가?


이 끔찍한 딜레마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랑이 가진 두 개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이를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에 빗대어 설명하려 했지만, 그러한 낡은 구분은 사랑의 본질을 성별의 고정관념 속에 가두는 오류를 낳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낡은 은유 대신, 상처 입은 존재를 어루만지는 ‘손(手)의 사랑’과 불의의 사슬을 끊어내는 ‘검(劒)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그 두 얼굴과, 그 둘의 관계를 마주하고자 한다.


‘손의 사랑’은 지금 내 앞에서 신음하는 한 사람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사랑이다. 이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가장 구체적이고 따뜻한 사랑이다. 내 가족, 내 아이, 내 소중한 공동체를 향한 헌신이다. 사상가 시몬 베유가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이야말로 기도와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말했듯, 이 사랑의 본질은 자신의 모든 영혼을 비워내어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태도, 즉 타인의 고통에 나의 온 존재를 집중하는 ‘주의 기울임’에 있다.


이 숭고한 ‘손의 사랑’을 가슴 먹먹하고 아름답게 실현한 인물은 A.J.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 속 주인공, 치셤 신부이다. 그는 교세 확장이나 거창한 교리 논쟁(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평생 가난한 중국의 오지에서 전염병 환자의 곁을 지키고, 굶주린 아이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었다. 그에게 사랑이란, 높은 강단에서 외치는 설교가 아니라, 진흙탕 속에서 함께 뒹굴며 내미는 투박한 ‘손’이었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깊었는지는 그의 평생 친구이자 무신론자인 윌리가 죽어가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나 같은 놈은 지옥에 가겠지?”라고 묻는 친구에게, 치셤은 억지로 세례를 주거나 교리를 들이밀지 않는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하며 친구의 손을 꼭 잡는다. “걱정하지 말게.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무신론자니 뭐니 하는 명찰은 보지 않네. 오직 자네의 마음과 행실만 볼 뿐이야.” 이것이 바로 ‘손의 사랑’이다. 도로시 데이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던 삶, 이태석 신부가 환자의 썩어가는 발을 매만지던 그 손길, 그리고 치셤 신부가 보여준 그 따뜻한 관용은 존재와 존재가 맞닿는 ‘부분적 사랑’의 가장 숭고한 형태이며, 생명을 살리고 지속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사랑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검의 사랑’은 안락한 평화에 안주하는 대신, 고통의 ‘원인’을 향해 정면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프롤로그에서 우리가 던졌던 고통스러운 질문, 즉 ‘정의가 짓밟힐 때 사랑은 분노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정직한 응답이다. 압제 받는 자의 편에 서서 침묵을 깨고, 구조적인 악에 맞서 ‘아니오’라고 외친다. 우리가 앞에서 만났던 본회퍼의 단호한 저항과 백장미단의 치열한 외침이 바로 이 ‘검의 사랑’이 남긴 눈부신 칼자국이다. 그것은 정의를 향한 수직적 결단이며,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날카로운 의지이다.


우리는 이 ‘검의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앞서 2화에서 마주했던 『벌레 이야기』의 그 참혹한 비극을 다시 소환해야 한다. 자식을 죽인, 살인범이 내미는 그 뻔뻔한 평온 앞에서, 미쳐가던 어머니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녀의 곁에서 같이 울어주는 따뜻한 ‘손’은 절실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가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분노가 정당성을 잃었고 갈 곳을 잃었기 때문이다. 살인범은 평온을 가장하고, 주변은 용서를 강요하는 그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탓하며 질식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 그녀의 옆에 서서 살인범을 향해 대신 고함쳐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녀 대신 삿대질을 하며, 차라리 이렇게 거친 욕설을 퍼부어주었다면 어땠을까? “닥쳐라, 이 파렴치한아! 피해자는 피를 토하고 있는데, 네가 감히 신의 이름을 빌려 구원을 입에 담느냐!” 이 거친 분노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다. 그것은 자식을 잃은 어미에게 “네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다. 네가 용서하지 못한다면 저놈도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해 주는 최선의 위로이다. 또한 값싼 용서로 받은 가짜 구원을 단숨에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검의 사랑’이다.


예수 역시 그러했다. 예수는 베다니에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흘렸지만, 성전에서는 장사치들의 상을 엎어버리고 채찍을 휘둘렀다. 그리고 인간을 억압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항상 그는 눈물을 흘리며 같이 아파했지만, 때로 그는 불의 앞에서 분노했고, 짓밟힌 자들을 대신해 싸웠다. 사랑은 항상 같이 울어주는 부드러운 ‘손’이어야 하지만, 때로는 불의한 자들의 멱살을 잡고 대신 소리쳐주는 단호한 ‘검’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손의 사랑’과 ‘검의 사랑’이 충돌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그 충돌은 양방향에서 우리를 찢어놓는다.

첫째, ‘검’이 ‘손’을 가로막는 딜레마이다. 회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연명하는 아버지가 있다. 당신은 매일 그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다. 당신의 ‘손의 사랑’은, 그를 돌보는 구체적인 행위는, 이 끔찍한 고통을 당장 멈추게 해달라고 절규한다. 아버지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한 마지막 사랑의 행위로, 고통 없는 죽음을 선택하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이것은 시몬 베유가 말한, 고통받는 존재를 향한 가장 순수한 ‘주의 기울임’에서 비롯된 지극히 숭고한 사랑의 발로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검의 사랑’이 당신의 손을 가로막는다. ‘검의 사랑’은 보편적 정의와 원칙을 묻는다. 제33장의 ‘인내천’이 선언했듯,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하늘’인데, 우리가 감히 그 하늘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는가? 또한 이 ‘검’은 사회 전체를 향한다. 만약 이 ‘손’의 사랑을 허용한다면, 경제적 이유나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고통 속에서 버틸 힘을 잃은 다른 약자들의 생명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미끄러운 비탈길’이 되지는 않겠는가? 이 ‘검’은 지금 내 눈앞의 아버지가 아닌, 얼굴 없는 미래의 모든 약자들을 지키려는 또 다른 형태의 ‘보편적 사랑’이다.


둘째, ‘손’이 ‘검’을 부수어야 하는 딜레마이다. 이 비극은 반대 방향에서 더욱 날카롭게 나타난다. 우리가 2부에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세웠던,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검’은 “살인하지 말라”는 신의 보편적 율법과 ‘원수 사랑’이라는 아가페의 궁극적 원칙을 굳게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히틀러라는 구체적인 광기 아래 신음하며 가스실로 끌려가는 ‘지금 여기’의 이웃들을 보았다.

그의 딜레마는 끔찍했다. ‘검’(보편적 원칙)을 지키며 자신의 신앙적 순수성을 유지하면 ‘손’(구체적 이웃)이 죽고, ‘손’을 들어 이웃을 구하려면 ‘검’을 피로 물들여야 했다. 그는 결국 ‘손’을 택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신의 심판대에서 파멸할지라도, 지금 눈앞의 이웃을 구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보편적 원칙의 파괴를, ‘책임 있는 저항’이라는 이름으로 감행했다.


이 두 가지 딜레마는, ‘사랑’이 마주하는 최종 시험대이자, 이 책의 모든 논증이 완성되는 마지막 증명의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회퍼의 딜레마 앞에서 망설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은 딜레마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핵심 논증을 완벽하게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검)이, 인류를 파멸시키는 거대한 악(히틀러)을 보호하고 ‘구체적인 이웃’(손)을 파괴하는 도구로 전락했음을 목격했다. 그 순간, 그 ‘검’은 이미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제3장에서 보았던 ‘우상’일 뿐이었다. 본회퍼는 그 ‘검’을 기꺼이 부러뜨리고 ‘손’을 택했다. 이것이야말로 제25장에서 우리가 외쳤던 ‘절름발이’ 교리(검)를 버리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길’(손)을 따른 것이다. 그는 딜레마 속의 죄인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 사랑을 완성한 증인이었다.


이 ‘절름발이 신앙’이 한 숭고한 영혼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에 대한 서늘한 문학적 증언이 바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다. 주인공 알리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성경의 문구를 인간적인 행복을 철저히 포기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가혹한 ‘금욕의 길’로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자신의 진실한 사랑(제롬)마저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낸다. 그녀는 신이 인간을 ‘구속’하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그 ‘구속(율법)’을 완벽하게 따르기 위해 자신의 ‘삶(사랑)’을 제물로 바쳤다. 그녀는 그 좁은 문의 끝에서 ‘기쁨의 높이’에 닿기를 고대했으나, 그녀가 도달한 마지막은 천국이 아니었다. 그녀가 남긴 일기장의 마지막은 ‘주여, 당신 덕분에 충만합니다.’라는 찬가가 아닌, “주님, 저는 지쳤습니다.”라는 잿더미 위에서의 탄식뿐이었다. 알리사의 비극은, ‘율법’이 ‘사랑’을 억압할 때, 그것이 어떻게 한 인간의 ‘영혼’마저 살해하는지를 증명한다. 그녀는 ‘신’을 인간을 구원하는 존재가 아닌 인간을 구속하는 존재로 오해했기에, 스스로 이 책이 말하는 ‘신성모독’의 비극적인 희생자가 되었다.


반대로, 여기 ‘사랑(손)’을 위해 기꺼이 ‘신성(검)’을 짓밟은 또 다른 숭고한 배교자가 있다. 치셤 신부가 평생 동안 교리라는 검을 내려놓고 가난한 이들의 손을 잡았다면,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속 로드리고 신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검을 부러뜨리고, 자신의 영혼마저 진흙탕에 던진다.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강요당한다. 관군들은 그에게 예수의 얼굴이 새겨진 성화(후미에)를 밟으면, 고문받는 신자들을 풀어주겠다고 협박한다. 그는 신에게 울부짖는다. “주여, 왜 침묵하십니까?” 그때, 침묵을 깨고 성화 속 예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세상에 왔다. 네 발의 그 아픔을,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러니 밟아라.” 그는 성화를 밟았다. 교회의 율법(검)으로 볼 때 그는 배교자였으나, 고통받는 인간을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신앙마저 내던진 그 순간, 그는 역설적으로 예수가 걸었던 아가페의 길을 가장 완벽하게 따르고 있었다. 알리사가 율법을 위해 사랑을 죽였다면, 로드리고는 사랑을 위해 율법을, 아니 신의 얼굴마저 밟았다.


고통받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안락사의 딜레마 역시 가혹하지만, 질문의 본질은 동일하다. ‘검’(생명의 원칙)이 ‘손’(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손’이 ‘검’을 위해 고통받아야 하는가? 즉, 인간을 위해 율법이 존재하는가, 율법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가? 이 책의 여정을 돌아보면 그 대답은 아주 명료하다.

검은 원칙을 위해 존재하지만, 손은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 차가운 금속성의 정의가 따뜻한 살갗을 위협할 때, 우리는 주저 없이 검을 내려놓아야 한다. 치셤 신부가 교리를 넘어서고, 본회퍼가 신념을 꺾고, 로드리고가 성화를 밟으며 증명했듯, 진정한 위대함은 날카로운 검을 쥐는 것이 아니라 투박한 손으로 이웃을 끌어안는 데 있다.


사랑은 ‘답이 없음’을 핑계로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저 바라만 보는 방관자의 태도가 아니다. 사랑은 그 전장의 한복판에서 어느 쪽이 ‘손’이고 어느 쪽이 ‘검’인지를 명확히 분별하고, 본회퍼가 그랬듯 비록 내 영혼이 파멸할지라도 기꺼이 ‘손’을 위해 ‘검’을 깨뜨리는 가장 고통스럽고 위대한 ‘결단’이다. 딜레마의 긴장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딜레마를 ‘사랑’으로 종결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제1부부터 제4부까지 관통하며 증명해 온 ‘아가페’의 완성이며, 그리고 다음 화에서 ‘당신과 나의 응답’이 시작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