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판과 살갗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기초로 이루어졌으므로,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현해야 함은 자명하다.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남긴 가르침은 무엇인가? 나사로의 소생이나 안식일의 치료 이야기, 바리새인들과의 충돌,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마지막 행위들, 즉 자신을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하고, 회개하는 강도를 구원하며, 어머니와 제자를 서로에게 맡겼던, 그 행위들은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서로를 사랑하라는, 유대교 율법에도 이미 존재하던 ‘이웃 사랑’을 두고, 예수는 어째서 ‘새 계명’이라 하였는가. 그것은 유대교의 계명과 달리 예수가 선사한 계명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즉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기준으로 하라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계명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단지 신적 권위의 새로운 법령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명령이자 인간적 초대이다. 십계명이든, 혹은 유대교 전통에 따라 구약의 첫 다섯 권인 모세오경 안에 담겨 있다고 보는, 삶의 모든 영역을 규율하는 613개의 방대한 율법이든, 그것은 불완전했기 때문에 새로운 계명이 필요했다. 율법은 형식이었고, 그리스도의 계명은 방향이었다. 전자는 죄를 기록하고 처벌을 명령했지만, 후자는 회복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기독교인의 윤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따를 수 있는 ‘가치 있는 윤리’이기도 하다.
물론, 모세의 율법은 당시 혼돈 속에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백성들이 신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야만의 시대에 인간 사회가 나아가야 할 최소한의 도덕적 기준이자, 공동체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규범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과 인간 이해의 심화 속에서 율법은 그 한계를 드러냈고, 마침내 사랑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윤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율법이 지향하던 공동체의 선을 더욱 깊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장하며, 죄를 넘어선 회복과 용서의 길을 열었다.
사복음서에는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으며 예수를 시험했다. 율법을 내세워 정죄하려는 무리 앞에서, 예수는 말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은 심판의 권리를 해체했고, 정죄의 폭력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장면은 신의 윤리가 어떻게 전복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모세의 율법은 정죄를 명했지만, 그리스도의 윤리는 회복을 선택했다. 신성함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벌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을 일으키는 것인가? 신의 권능이 무섭고 윽박지르는 것이라면, 그것은 피조물에게 억압과 고통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신의 권능이 사랑과 용서라면, 그것은 인간에게 자유와 책임을 선물하는 힘이 된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신을 다시 정의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의 얼굴을 다시 보여주었다. 인간을 두렵게 만들었던 신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신, 율법의 문자보다 타인의 고통을 먼저 보는 신, 돌을 드는 손보다 먼저 죄인의 눈을 바라보는 신, 이 새로운 신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도래했다.
그렇다면 역설적인 질문이 가능해진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자로 정죄하고,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고 했을 때, “이 사람을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라는 협박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넘겼을 때, 그때 과연 신성모독자는 누구였는가? 예수가 아니라 그를 거부한 자들이야말로 신성모독자였다. 그들은 사랑이라는 살아있는 살갗을 거부하고, 다시금 형벌과 공포라는 차가운 돌판을 숭배했다. 그들은 인간을 위해 내려온 신을 다시 하늘로 유배 보냈으며, 그 빈자리에 두려움이라는 낡은 우상을 세웠다. 그리스도를 통한 여호와의 ‘수정’은 무시되었고, 인간에게 두려움을 강요하는 낡은 여호와만이 살아남았다. 모세가 전한 율법이 그 시대적 한계와 상황 속에서 나름의 필요성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이미 더 나은 길을 보여주었음에도 이를 거부한 자들은 오히려 신의 이름을 욕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성모독이란, 하늘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일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향해 내미는 손을 뿌리치는 것이다. 진정한 신성은 죄를 가려내는 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넘어서는 사랑에 있다. 진정한 신성모독은 신의 이름으로 돌을 드는 것이며, 신의 이름으로 타인을 벌하고 억압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배척한 자들은 신을 모독했을 뿐만 아니라, 신을 왜곡하고 조작하고 폭력의 수단으로 만든 자들이다.
오늘날의 기독교도 이 질문 앞에 자유롭지만은 않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르기보다, 율법을 무기로 타인을 심판하고, 다른 신념을 가진 이들을 정죄하며, 사랑보다 교리를, 사람보다 제도를, 예수보다 권위를 택한다면, 그 역시 신성모독이다.
부활한 예수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며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까지 회복시켜 주셨던 그 위대한 용서를 기억해 보자. 훗날 베드로는 로마에서 순교할 때 “나는 주님과 똑같이 죽을 자격이 없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진다. 평생 그 용서의 무게를 잊지 않고 삶으로 증명해 낸 것이다.
그 위대한 용서 앞에서 오늘의 교회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도, 스스로를 돌아보며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를 따라 용서하고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타인을 돌로 치고 있진 않은가?’ 신성은 신 앞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앞에 멈춰 서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신의 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