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지론적 신성
그리스도 역시 다른 어떤 위대한 스승 못지않았다. 예수를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가 어떤지는 차치하더라도, 그리스도 자체가 위대하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특정한 신앙의 틀을 넘어 인류 보편의 윤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라는 오래된 논란은, 앞서 논의했듯 확정 불가능한 사안에 대한 지적 오만에 가깝기에 철학적으로는 무익하다. 대신 우리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예수가 인간의 눈앞에서 실재했을 때, 과연 그는 전능한 신의 명징한 모습이었는가?’
만약 그리스도가 전능한 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절대자가 되었을 것이고, 신앙은 자유로운 사유가 아니라 물리적 복종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은 철학하는 존재가 아니라 신 앞에서 무릎 꿇는 존재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다른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 속에서, 그의 사랑은 어떤 특별한 길을 보여주는가? 우리는 유교에서 ‘사람(人)과 사람(二)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며 ‘어진 마음’을 뜻했던 ‘인(仁)’의 윤리와, 불교의 ‘자비’가 보여주는 연민의 깊이를 존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들과 구별되는 ‘아가페’, 즉 조건 없이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적 사랑이라는 독특한 얼굴을 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아가페’만이 유일한 진리라거나, 그것이 다른 위대한 스승의 진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아가페’가 인류 보편의 사랑이라는 진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가 남긴 윤리적 메시지와 삶의 방식은, 신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이 아가페를 실천했기에 더 큰 설득력을 갖는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율법을 내세워 예수를 비난했을 때, 그는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응답했다(마가복음 3:4 등). 이 장면은 교리나 형식을 넘어, 눈앞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의 작은 증명이었다. 율법은 질서를 위한 장치이지만, 사랑은 고통 앞에서 멈추지 않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이라는 추상적 규율을 넘어, 구체적인 인간의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는 병든 자, 소외된 자, 죄인이라 낙인찍힌 자들의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외면하지 않았다. 율법은 형식을 지시했지만, 그리스도는 그 얼굴이 던지는 ‘나를 외면하지 말라’는 무언의 요청에 응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 행위를 깊이 있게 설명해 줄 철학적 언어는, 어쩌면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마련되었을지 모른다. 레비나스는 진정한 윤리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에 시작된다고 설파했다. 타인의 얼굴이 우리에게 말을 걸 때, 우리는 비로소 계산과 이성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윤리적 책임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아가페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 응답의 가장 순수한 형태였다.
이러한 아가페의 본질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는 ‘원수 사랑’의 가르침에서 가장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단순히 용서를 넘어, 원수까지도 적극적인 사랑과 선행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급진적인 명령이자,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까지 끌어안는 극단적인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불가능해 보이는 가르침을,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완성했다. 다른 스승들이 깨달음의 ‘길’을 제시했다면,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파괴하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기도함으로써 그 사랑을 ‘증명’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그가 보여준 이 역설적인 숭고함을 ‘불가지론적 신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는 신의 존재 여부는 논리적으로 확신할 수 없더라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초월적인 사랑의 힘만큼은 '신성'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뜻한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었으나, 그 고통 속에서 피어난 원수를 향한 용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그의 삶과 죽음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신적인 사랑의 가능성’이 어떻게 현현하는지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이 숭고한 사랑의 증명 앞에서, 인류의 역사는 비극적인 역설을 만들어낸다. 아가페라는 가장 숭고한 사랑의 상징이었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는 또다시 억압과 독단의 이름으로 호출되기 시작했다. 십자가는 사랑의 증표가 아닌 전쟁의 깃발이 되었고, 그의 가르침은 타인을 정죄하는 율법이 되었다.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식민지 선교 등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행해진 수많은 폭력은 그의 윤리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보편적 윤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의 가르침을 경직된 율법 속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방식- 즉 율법의 경계를 넘어 고통에 응답하고, 원수마저 끌어안으려 했던 아가페적 태도를 계승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는 신의 불확정성과 윤리의 실재성 사이를 아가페라는 사랑으로 연결하는 상징이다. 그는 전능한 신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인간에게 더 깊은 윤리적 울림을 남겼다.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라는 무익한 질문을 남긴 인물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가’라는 영원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 존재다. 그가 신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는 우리의 고백은, 어쩌면 그의 불확정성 속에서 그의 신적인 사랑을 발견하는 가장 정직한 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