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신은 반드시 존재합니다. 정말입니다

모순 투성이

by 낭만적 반역자

신의 존재에 대한 불확정성과 그것의 지속성은 하나의 역설적 명제를 우리 앞에 놓는다. 그것은 바로 ‘신의 존재가 불확정적이기에, 신은 인간의 사유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 숨 쉬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 역설은 겉보기에 모순된 명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존재론적 사유의 핵심이 담겨 있다. 이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신의 존재 여부가 각각 확정된 두 세계를 사고실험으로서 가정해볼 수 있다.


첫째,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될 수는 없지만, 논의를 위한 가상 전제로서 그런 세계를 상상해 보자. 이 경우 신은 완전히 부재함으로 확정되고, 그 존재를 전제로 한 모든 신앙적 행위는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기도는 응답 없는 독백이 되고, 구원의 희망은 무의미한 신화로 전락한다. 인간은 우주의 고독한 주체로서, 더 이상 초월적 질서나 목적에 기대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이는 자율과 책임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깊은 허무주의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신이 명확히 부재할 때, 삶의 궁극적인 의문인 ‘왜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더 이상 초월적인 답을 향해 열려 있지 않고 닫힌 체계 속에서 맴돌 뿐이다. 신이 부재함으로써 삶의 궁극적인 의미나 도덕적 기준의 초월적 원천이 사라지고, 인간은 오직 자신의 이성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찾아야 하는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답은 초월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며, 오로지 인간과 물질 세계 내에서 순환하며 인간에게 끝없는 갈증과 무의미함을 느끼게 한다.


둘째, 반대로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명확히 실재함이 드러난 세계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인간은 자신을 창조한 존재 앞에 철저히 종속된 피조물에 불과하다. 모든 행위, 모든 사유는 신의 뜻에 의해 예정된 결과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악마적인 범죄조차 신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형해화되고 만다. 여기서 전능성과 자유의지는 서로 충돌하게 된다. 두 개념은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이를 억지로 조화시키려 한다면, 그 순간 신은 더 이상 전능하지 않거나,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전능한 신의 존재가 명확해지는 순간, 인간은 자율성을 상실하고, 그 존재의 의미는 무화된다. 신은 압도적인 실재가 될 수는 있으나, 의미 있는 신으로서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가 불확정적일 때,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인간은 신을 결코 완전히 잊을 수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는 이 상태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신을 사유하고, 질문하며, 탐색하게 만든다. 신이 망상인지 혹은 실재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신은 인간에게 ‘영원히 탐색될 가능성’으로서 실재하는 존재로 남는다. 설령 신이 실제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존재에 대한 회의와 탐색이 사라지지 않는 한, 신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 의미 있는 실재로 작용한다. 이는 개개인의 신앙 유무를 넘어선 문제이며, 신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존재의 의미 탐구가 인간 정신의 토대를 이루는 이상, 그 실재성은 문화적이고 집단적인 층위에서 지속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령 신의 존재가 불확정적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존재하든지 아니든지 둘 중 하나이지 않겠는가? 결국 진리는 하나일 것이며, 그 불확정성은 일시적인 무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물음은 전제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코 하나의 인식으로 통일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수많은 문화, 종교, 철학적 전통을 통해 세계와 존재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해 왔다.

예를 들어, 인류학은 특정 사회가 자연 현상을 신화적으로 해석하고, 또 다른 사회는 과학적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등, 동일한 현상에 대한 인식 체계가 문화권마다 상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공동체에서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관념이 다른 공동체에서는 완전히 낯설거나 심지어 비합리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지식의 유무를 넘어, 사고방식과 가치체계 자체가 다양하게 분화되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도 인간의 인식은 개인의 경험, 사회적 배경, 교육 수준, 심지어 계층적 위치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사회적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본다. 객관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삶과 연결될 때는 저마다 다른 의미와 감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인간 인식은 본질적으로 다원적이고 파편적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와 같은 근원적 질문에 대해 인류가 완전한 합의에 도달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신은 끝없이 논쟁되고 사유되며, 인간에게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 남는다. 신은 확정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 그리고 의미 부여의 과정 속에서 ‘존재 방식’을 얻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의미를 갈구하는 존재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 죽음 이후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 이 모든 것은 결국 신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 신에 대한 불확정성은 이러한 사유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자, 사유의 공간을 지속적으로 열어놓는 조건이 된다. ‘알 수 없음’은 무지의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는 탐색과 성찰을 자극하는 열린 구조인 것이다.


한편, 이 불확정성은 앞서 가정한 형이상학적 차원, 즉 신의 존재가 확증될 경우, 인간은 ‘꼭두각시’가 되어 자유의지를 상실한다는 정의를 넘어, 훨씬 더 현실적인 윤리적, 사회적 층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다고 맹신’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를 생각해 보자. 만약 다수의 인류가, 혹은 특정 집단이 동일한 신의 실재를 ‘절대적 진리’로 확신하게 된다면, 그들은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그 신념을 필연적으로 유일한 진리로 주장하게 되고, 타자를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논리로 쉽게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신의 존재가 불확정된 상태에서는 그 누구도 절대적 진리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이 불확정성은 다양한 믿음의 공존 가능성을 열어주며, 종교적 관용과 해석의 여지를 보장하는 윤리적 기반이 된다. 따라서 신의 불확정성은 단순한 철학적 난제가 아니라, 공존과 성찰의 토대가 되는 가능성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이 지독한 논쟁이야말로, 신이 실재하는지와 무관하게 적어도 인간의 사유 속에서는 반드시 존재함을 가장 명료하게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