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 잘하려고 버티는 사람이 먼저 무너진다

by.강수민

by Min

취업 전 웨이팅을 타던 시절엔 먼저 입사한 친구들, 학생 간호사 시절엔 같은 과 선배님들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간호사로 병원에 다니려면 진짜 아무 생각 없이 다녀야 한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생각이 차고 넘치는 나는 노력으로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 없이 다닌다는 표현보다는, 완벽주의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다.

이번 목차의 답으로써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거밖에 없어 필자는 다수의 독자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정말이지 현실이 그렇다.

임상에서는 욕심 많은 사람이 불리하다는 걸 머지않아 깨닫는 일이 또 생겼다.

임상에 나가며 나라는 사람에 관한 걸 한 번 더 깨달았다. 남에겐 관대해지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너그러워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래온 내 버릇은 임상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재 학생 간호사인 아는 후배들에게도 가끔 말해주지만, 임상에 나가기 전 공부를 열심히 해놓을 필요도 없고,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딱 한 가지 “자신의 실수에 너그러운 태도를 가지는 연습이 필요하다”라고 해준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 버티지 못했으니까.



신규로써 실수하는 건 당연하다.

버티려면 그 답이 태움으로 돌아오더라도 체념해야 한다

현직 간호사인 친구가 많은 내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학교 다닐 적 같이 실습할 때 ‘저 친구는 간호사가 되면 잘할 것 같다’라거나, ‘쟤가 친구가 아니라 선배 간호사였다면 정말 무서운 상사였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드는 친구들마저도 종종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수와 태움은 피하지 못한다.

그 친구들도 불과 몇 달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맨날 혼나면서 크는 신규’다. 이제 막 2년 차가 다 되어 가는 내 친구들은 아직 연차가 낮아서 그런가 아무리 똑 부러진 친구라도 여전히 피하지 못하는 태움을 겪고 있는 듯하다.


행동은 물처럼 유연하게 굴면서 욕심은 태양을 찌르고 속고집은 누구보다 강하다. 그래서 완벽하게 잘하는 것을 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의 나는 ‘나대지마’라는 이 한마디로 나를 멈춰 세웠다. 이 습관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간호사가 되기 전까진 미처 몰랐다.


그런 나에겐 “실행이 느린 신규”라는 프레임이 따라왔다. 그리고 이 습관이 나 자신을 계속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도 내가 한번 심하게 무너지기 전까진 미처 몰랐다.

확실히 알고 있다면 천천히 작은 동작으로나마 움직였지만, 애매하게 알고 있을 땐 ‘나보다는 선배들이 더 잘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혼나는 걸 반복했다. 잘하려고 할수록 나는 더 작아졌다.

“수민아 너는 관찰하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야”


“네…”


겉으로는 “네”라고 답했지만, 저 한마디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나는 먼저 상황을 관찰한 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려고 했다. 애매하거나 어렵다는 판단이 들면 나보다 잘하는 누군가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가끔은 선배 간호사들이 도와주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매번 혼이 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확한 피드백은 없었고, 결국 답도 스스로 찾아야 했다.


‘일단 덤벼봐야 한다’라는 임상이라는 환경이 나를 단단하게 성장시키는 곳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곳은 준비되지 않은 나를 그대로 부딪치며 무너지게 하고 있었다.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늘 배웠다는 느낌보다 에너지가 소모된 것 같은 느낌이 더 강했다. 이것이 반복되었다.

한참 지나고 돌아보면 분명 조금 더 빨라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내일모레조차 단 한 번도 나아졌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신규 간호사라는 환경 자체가 내게 있는 강점인 관찰력과 신중함을 부정당하는 환경이었다.


‘지시에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바로 따르고 행동해’라는 구조에 스스로 해왔던 판단력을 잃어가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곳은 완벽하게 잘하려고 버티는 내가 강하게 돋보일 수 있는 환경이 절대 아니었다.


그 환경은 구조를 읽고 납득을 원하는 내게는 상극이었다.


상사들의 공통 언어를 보면 그랬다.


‘내 지시와 통제에 납득을 원하지 마라. 무조건 해라’



언제부턴가 처음 겪는 환경에서 무너지며 깨달았다.


‘나의 판단력과 관찰력이 학교 다니던 시절엔 유리했지만, 임상에서는 아니구나’


‘모든 상황에서 살아남기 좋은 건 아니구나, 그럼 내 성격도 모든 상황에서 강하다는 설명이 따라오진 않겠네?’


학교 다닐 때는 나보다 더 무르게 보였던 친구들이 오히려 먼저 입사해서 지금도 잘 버티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임상이라는 환경에서는 단순히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잘 맞추고 버티는 사람이 더 오래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들이 자신을 조금씩 지우면서까지 그 흐름에 맞춰온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 버티며 강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착한 친구 한 명이 본인이 태움을 심하게 당하고 있음에도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깊이 생각 안 하고, 납득 없이도 잘 길들어야 살아남기 좋아”


나의 프리셉터를 보면 저 친구가 많이 떠올랐다. 반대로 저 친구를 볼 때도 나의 프리셉터가 떠오르기도 했다.


프리셉터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렇게 순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데서 버텼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문장에 대한 답을 오래가지 않아 깨달았다. 저 말을 해준 친구와 아주 비슷한 사람이었다.


환경에 맞춰 길들이기 쉬운 사람



과학 시간에 배웠던 자연선택이 떠올랐다.


나는 유년 시절부터 말로 담아내기 버거울 정도로 힘든 일이 많았다.


외향적이진 않아도 분명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을 것이고 지금의 나로 진화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내 방식대로 진화한 채 잘 버티고 이겨냈을 거다.


그리고 진화한 내 모습만 본 주변 사람들은 나를 “강한사람”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


여기에 덧붙여 임상은 예외로 내가 버티기 힘들었던 환경이라는 것도 같이 깨달았다. 어쩌면 체감으로 깨닫기 한참 전인 아주 오래전부터 지레짐작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버티려고 했다.


'버텨서 안 되는 일 없다'는 내가 만든 공식을 끝까지 깨고 싶지 않았지만, 나만의 버티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버틴 결과가 과호흡이었다.



나는 내 환경을 종종 탓해왔었다. 그러나 그 약간의 불만과 허탈함도 이 환경을 겪은 후 '내가 못 버티는 곳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인정한 순간에 없어졌다.


‘나도 내 나름대로 환경에서 힘듦을 거쳐왔지만, 임상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환경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살아남기에 나쁘진 않았으니까 그땐 내가 자연선택 되었구나’


나는 내가 그저 강해서 인생에 힘든 일들 다 버티고 이겨냈다는 생각에 무언가를 못 버티는 타인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왜 저래?’ 이런 생각을 자주 했으나, 이제 안 하려고 노력 중이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나를 감싸고 있던 환경이 꼭 내게 나쁘게 작용했다고만 할 수 없겠다는 것을.


그리고 다시 ‘강하다고 선택될 수 있는 환경에서만 살았을 수도 있겠다’로 재정의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어도 강하게 받쳐주는 환경이 아니라면? 강하게 보일 수 있을까? 마치 간호계에서의 나처럼



쉬운 예시를 들자면 다수의 독자는 과학 시간에 배워서 알 거다.


힘이 쎈 노랑나비와 힘이 약한 흰나비가 흰 바탕에 같이 앉아 있다면 누가 천적에게 더 잡아먹히기 좋을까? 답은 당연히 알 거다.


그 환경에서 노랑나비가 흰나비를 본다면 흰나비가 자신보다 강해 보일 거다.


즉 ‘그 환경이니까, 학교였으니까, 집이었으니까. 그 환경에서는 내 특징이 강점으로 작용하고 강함으로 선택되니까, 같은 환경에서 본 사람들이 나를 강하다는 카테고리에 선택해서 넣었겠지.’


누구든 강하게 받쳐질 수 있는 환경이라면 강한 사람의 카테고리에 분류될 거다. 이걸 그제야 깨달았다.


‘이때까지 내 환경이 완전히 나빴다고만 할 순 없었네’라는 서사로 재정의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환경의 틀에 맞춰 구기면서 버티는 게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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