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잘한다는 말이 제일 듣기 싫었어요"

새벽 5시의 두통과 사회 시험 8개의 오답, 그 너머에서 찾은 자유

1. 칭찬의 이율배반: 듣고 싶지만, 들으면 괴로운 말

튼튼이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기준이 높은 아이였습니다. 주변에서 "와, 튼튼이 진짜 잘한다!"라고 칭찬하면, 아이의 표정은 묘하게 어두워졌습니다. 칭찬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막상 들으면 "다음에는 더 잘해야 해", "실망시키면 안 돼"라는 무거운 압박감을 동시에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아이를 늘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습니다. 바이올린을 켜다가도 자신의 소리가 완벽하지 않으면 스스로에게 화를 냈고, 100점을 맞지 못하면 엉엉 울었습니다.


2. 모래상자 속의 고백: "나도 자유롭고 싶어"

3학년 어느 날, 마음이 닫힌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제안했습니다. "튼튼아, 우리 오랜만에 모래놀이 할까?"

튼튼이가 꾸민 모래상자에는 넓은 초원에 동물들이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얘네는 뭐 하고 있니?"
"놀고 있어."
"규칙이 있는 놀이야, 없는 놀이야?"
"규칙 없어. 그냥 자유롭게 노는 거야."


평소 규칙 있는 게임(축구)을 좋아하던 아이가 의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동물들을 보니 어떤 느낌이 들어?"라고 묻자, 아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좋겠다... 부러워. 나도 자유롭고 싶어."


그 눈물 속에서 저는 아이의 진짜 마음을 읽었습니다.


"잘한다는 칭찬이 너무 힘들어요."


우리는 그날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그럼 '잘한다'는 칭찬 말고, '열심히 했다'는 칭찬은 어때?"


아이는 눈물을 닦으며 그건 마음에 부담이 없을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즉시 선생님들께 이 사실을 알렸고, '과정 중심 칭찬'으로 바꾸자 아이는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습니다.


3. 새벽 5시의 기상: 강박이 아니라 몸이 깨어나는 시간


튼튼이는 3학년 때까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 5시면 눈이 떠지는 아이였습니다. 이것은 강박이 아니라, 튼튼이가 타고난 '고유의 신체 리듬'이었습니다.


문제는 팬데믹으로 학교를 안 가면서 생겼습니다. 5시에 눈이 떠지는데 할 일은 없고, 다시 자려해도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심한 두통을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완벽주의 성향의 아이는 이 시간조차 무언가 생산적인 것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고, 그 스트레스가 일기장에 "죽고 싶다"는 비명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그때 튼튼이를 구원해 준 것은 3학년 담임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일기장을 보고 즉시 저에게 연락을 주셨고, 아이를 따뜻하게 보듬어주셨습니다.


학교에서 '습관 만들기 프로젝트'를 할 때, 선생님은 5시에 일어나는 튼튼이에게 특별한 처방을 내려주셨습니다.


"튼튼아, 5시는 너무 일러. 우리 목표를 '6시에 일어나기'로 잡아보는 건 어떨까? 눈이 떠져도 침대에서 1시간 더 뒹굴거려도 돼. 그게 튼튼이의 미션이야."


취침 시간(8시)은 그대로 두되, 기상 목표를 늦춰주신 것입니다. 비록 몸은 5시에 깨어있을지라도, "지금 안 일어나도 돼. 쉬어도 돼"라는 선생님의 공식적인 허용은 아이의 마음에 쉼표를 찍어주었습니다.


4. 빨간 사선 대신 '별표'를, 점수 대신 '가치'를


튼튼이는 틀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습니다. 1개라도 틀리면 엉엉 울어댔죠.

저는 아이에게 시험의 의미를 다시 가르쳤습니다.


"평가는 네가 나쁜 아이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니야.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야."


그래서 저는 채점할 때 날카로운 사선(/)을 긋는 대신, 틀린 문제에 ★(별표)를 쳐주었습니다. "이건 중요한 거야. 다시 볼 기회야"라는 의미였죠.


이 교육이 빛을 발한 건 4학년 때였습니다. 학기 초 진단 평가에서 튼튼이는 국어 1개, 수학 2개, 과학 1개를 틀렸는데, 사회 과목에서 무려 8개나 틀려버렸습니다. 예전 같으면 대성통곡을 했을 상황입니다.

하지만 튼튼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8개는 좀 아니잖아? (웃음)"

알고 보니 그날 사회 시험은 반 전체가 성적이 안 좋았습니다. INFP 성향의 4학년 담임 선생님은 사회 과목만 오답 풀이를 해주셨는데, 풀이 도중 책을 덮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얘들아, 100점 맞으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야. 점수가 낮아도 괜찮아. 공부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거야."


규칙과 점수가 중요했던 튼튼이에게 이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엄마, 우리 선생님 진짜 특이하고 재미있어!"라며 신나 하는 아이에게 저는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와, 선생님 정말 멋지시다! 엄마랑 생각이 똑같으시네. 그게 바로 진짜 공부야."


엄마의 지지와 선생님의 철학 덕분에, 튼튼이는 점수의 감옥에서 벗어나 '공부의 가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5. <디어 에반 핸슨>으로 치유한 마음


그 4학년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Dear Evan Hansen)>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불안장애를 앓으며 외로워하던 주인공이 세상과 소통하며 성장하는 이야기.

튼튼이는 그 뮤지컬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두꺼운 원서 책을 사서 정독하고, 영상을 찾아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음악과 이야기가 주는 위로는 완벽주의로 긴장해 있던 아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주었습니다.

좋은 선생님들과 예술을 만나며, 튼튼이는 팬데믹의 우울함을 스스로 치유하고 한 뼘 더 자라났습니다.


[튼튼이의 속마음] "선생님, 저 사실은 숨이 찼어요"

사람들은 제가 5시에 일어나서 공부하면 "대단하다"라고 했어요. 근데 사실 저는 머리가 아팠어요. 눈은 떠지는데 할 건 없고, 다시 자려니 잠은 안 오고... 그냥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불안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6시까지 누워있어도 돼"라고 미션을 주셨을 때, 마음이 편해졌어요. 아, 뒹굴거리는 것도 미션이구나.

그리고 사회 시험 8개 틀렸을 때, 선생님이 혼내지 않고 인생 이야기를 해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100점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걸 그때 처음 진짜로 믿게 된 것 같아요.


[주원의 거울 일기]

3학년 튼튼이의 일기장에서 "죽고 싶다"는 말을 봤을 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아이를 살린 건 엄마가 아니라 선생님이셨습니다. 아이의 타고난 리듬(5시 기상)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그 안에서 쉴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신 지혜. 그리고 점수보다 삶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실감한 시간이었습니다.


[Chapter 16을 위해 참고한 전문 문헌]

1. 완벽주의와 평가 염려 (Perfectionism & Evaluation Concern)

Frost, R. O., et al. (1990). The Dimensions of Perfectionism.

완벽주의의 구성 요소 중 '실수에 대한 염려(Concern over Mistakes)'가 아동의 불안을 높이는 주된 요인임을 설명합니다. '별표 채점법'은 이 염려를 낮추는 행동 치료적 접근입니다.


2. 교사의 정서적 지지 (Teacher Emotional Support)

Pianta, R. C. (1999). Enhancing Relationships Between Children and Teachers.

교사와의 긍정적 관계가 아동의 심리적 적응과 학교생활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을 다룹니다.


3. 예술 치료의 효과 (Arts Therapy)

Malchiodi, C. A. (2007). Expressive Therapies.

뮤지컬 등 예술 매체를 통해 자신을 투영하고 감정을 표출(Catharsis)하는 과정이 불안 감소에 효과적임을 입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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