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나만이라도
“그 마음은 알겠는데….”
“너만 그렇게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대개 걱정처럼 들린다. 정면으로 비난하지 않으면서 현실을 알려주겠다는 친절한 조언처럼 포장한 것이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공격은 아닌데, 듣고 나면 이상하게 위축된다.
“너만 정의로워서 되겠어.”그렇다고 핀잔도 아니다.
개인의 기준을 집단의 평균 아래로 낮추는 방식이다.
그 안에는 세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정의는 개인적인 과잉이라는 것.
둘째, 집단의 현실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셋째, 네가 옳다고 해서 세상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
정의를 직접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정의를 고립시킨다.
정의는 정말 개인의 과잉인가?
현실에서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신입 직원이 회사 비용 처리 방식이 규정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건 규정에 어긋납니다”라고 말하려 하면 돌아오는 말.
“사회생활 좀 더 해봐라.”
“너만 깨끗하다고 회사가 제대로 돌아가게 아니다.”
공개채용 과정에서 이미 내정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건 공정하지 않습니다”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괜히 나섰다가 너만 찍힌다.”
“다들 알고도 가만히 있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성과를 위해 과정을 조금 조정하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사실과 다른 보고는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원칙대로 해서 생기는 결과를 네가 책임질 거야?”
이때도 정의가 틀렸다고 직설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정의를 위험한 선택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의를 고집하면 고립되고, 손해를 본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래서 사람은 계산한다.
정의가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라, 그 정의를 표현하는 것이 이익인지 손해인지.
이 순간, 정의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손익의 문제가 된다.
왜 이런 말은 반복되는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악의를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경험에서 나온 체념일 것이다.
“나도 한때는 그랬어.”“그러다 다친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도 한 번쯤 부딪혀 보았을 것이다.
갈등을 겪고, 불이익을 경험하고, 상처를 입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의를 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줄이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언이 반복될수록 정의는 점점 본질에서 벗어난다.
원칙을 말하는 사람은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고,
기준을 묻는 사람은 조직을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정의는 기준이 아니라 개인의 성향처럼 축소된다.
이 문장에서 가장 무거운 단어는‘정의’가 아니라 ‘너만’이다.
‘너만’은 개인을 집단 밖으로 밀어낸다.
‘너만’은 다수와 소수를 나눈다.
‘너만’은 책임을 개인의 과잉으로 만든다.
그러나 구조는 언제나 소수의 선택에서 흔들린다.
다수가 침묵할 때, 한 사람의 기준이 전체의 기준이 된다.
정의는 다수가 동의할 때만 의미 있는 가치가 아니다.
다수가 흔들릴 때 더 필요한 태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고 분노로 맞설 필요는 없다. 정의를 과시할 필요도 없다.
기준을 낮출 이유는 더더욱 없다.
“너만”이 아니라 “적어도 나는”이라는 태도면 어떨까.
적어도 나는 그 선을 넘지 않겠다.
적어도 나는 그 말을 그대로 후배에게 넘기지 않겠다.
적어도 나는 알고도 모른 척하지 않겠다.
정의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이다.
“너만 정의로워서 되겠냐”는 말은 정의가 과한 것이 아니라 정의가 불편해진 시대의 신호일지 모른다.
정의는 다수가 박수칠 때만 필요한 가치가 아니다.
다수가 흔들릴 때, 기준이 모호해질 때 더 또렷해져야 하는 태도다.
그렇다고 정의를 크게 외칠 필요까지는 없다.
‘너만’이라는 말 앞에서 내 기준을 낮추지 않는 선택, 그것이면 충분하다.
적어도 나는, 그 선을 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정의가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인데 이 사회는 자꾸 정의를 돌아보게 한다.
망설이고 멈칫하게 한다. 아닌 것에 아니라고 하면 배제시킨다. 그래서 부득이
정의를 들추는 것이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적어도 나만은 정의를 정의라 말하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