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길은 시간을 저장한다
작년 여름, KTX를 타고 어릴 적 살던 집의 골목을 다시 찾았다. 자동차 한두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길 끝에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을 쪼르륵 따라 올라가면 파란 대문이 나왔다. 주소는 '연제로 9번 길'. 주변 산동네는 이미 재개발로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을 찾기 힘들었지만, 그 집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가운 마음 반, '만약 지금도 이 집에서 살고 있었다면 재개발은 안 되었겠구나' 하는 묘한 생각이 스쳤다. 물론 그때 우리는 세들어 살았으니 재테크와는 무관했지만.
골목 가까이에는 아버지의 공장이 있었다. 너무 어릴 때라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는데, 출근길에 지나가는 아버지를 보며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공장 앞에서 동생과 점프 놀이를 하다가 넘어져 이마를 다쳐 네 바늘을 꿰맸던 일. 공장 옆 치킨집에서 닭을 잡던 장면. 조금 내려가면 있던 시장과 작은 슈퍼마켓. 지금 눈으로 보면 평범한 공간들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복잡한 무대였다.
발걸음을 초등학교로 향했다. 지금 네이버 지도로 찍어보니 집에서 학교까지 약 1 km 거리다. 어릴 때 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학교 바로 앞에 백조 아파트라고 있었는데 거기 사는 친구들이 제일 부러웠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친구들도 지각은 하더라.
비오는 날 생각이 났다. 학교 처마 밑에 쪼르르 서 있으면 엄마나 아빠가 우산을 들고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우리 엄마는 일을 하셔서 한 번도 우산을 가지고 데리러 오신 적은 없다. 보통은 친구랑 같이 가거나 아니면 사과 박스 같은 것을 들러쓰고 집까지 뛰어 갔다. 나중에 커서 물어보니 강하게 키우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시는데 막상 부모가 되어 생각해 보니 미안한 맘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어릴 때 있던 골목골목이 그대로 있어줘서 고마웠다. 행여나 새로운 아파트 단지로 덮였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었는데, 더운 여름날 집 앞 평상에 돗자리를 깔고 부채를 부치시던 선엽이 할머니, 뜨거운 여름 밤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의 별을 같이 보던 상두형이 생각났다. 세월이 가면 언젠가 사라질테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대로 있어주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