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만 보의 신화, 그리고 진짜 숫자
"하루에 만 보를 걸어야 건강하다."
1965년, 일본의 야마사 시계계기 사가 만보계를 출시하면서 내건 마케팅 문구가 시작이었다. 10,000이라는 숫자가 깔끔했고, 외우기 좋아서 사람들은 그것을 과학처럼 받아들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만 보는 건강의 기준선처럼 굳어졌지만, 실제 연구 결과는 달랐다.
하버드 의대 예방의학과의 이민 리 교수 연구팀이 2019년에 발표한 결과부터 보자. 평균 나이 72세, 브리검 여성병원의 16,741명의 참가자들은 일주일간 허리에 가속도계를 차고 걸음 수를 측정했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기준으로 4년 넘게 사망 여부를 추적한 결과, 하루 4,400보를 걷는 여성은 2,700보를 걷는 여성보다 사망 위험이 41% 낮았다. 7,500보를 넘기는 순간부터는 곡선이 완만해졌다. 만 보를 향해 계속 올라가는 직선이 아니라, 일찍 가파르게 꺾이고 이후 평탄해지는 곡선이었다 (JAMA Internal Medicine, 2019).
이듬해, 미국 국립암연구소(NCI)의 세인트모리스 연구팀이 40세 이상 미국 성인 4,840명을 대상으로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추적 기간은 평균 10.1년. 하루 8,000보를 걷는 사람은 4,000보 미만인 사람보다 사망 위험이 51% 낮았다. 12,000보에서는 65%. 이민 리의 72세 여성 코호트보다 젊은 집단이어서, 더 많이 걸을 수록 건강에 긍정적영향을 주었다 (JAMA, 2020).
이처럼 더 걸을수록 더 좋았지만, 증가폭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4,000보에서 8,000보로 올리면 사망 위험이 반으로 줄지만, 8,000보에서 12,000보로 올려도 추가 감소는 14%포인트에 그친다. 가장 큰 이득은 '거의 안 걷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걷는 상태'로 넘어가는 구간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 한 가지 예상 밖의 발견이 있었다. 같은 8,000보라도 빠르게 걸어 40분 만에 채운 사람과 느릿느릿 하루 종일에 걸쳐 채운 사람의 사망 위험 감소가 비슷했다. 같은 걸음 수라면, 속도는 상관없었다.
2023년, 폴란드 우치 의대의 바나흐 교수 연구팀이 17개 코호트 연구, 총 226,889명을 종합한 메타분석을 내놓았다 . 전체 사망 위험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지점은 하루 3,967보. 심혈관 질환 사망만 따지면 2,337보였다. 1,000보를 더 걸을 때마다 전체 사망 위험 15% 감소, 500보를 더 걸을 때마다 심혈관 사망 위험 7% 감소. 만 보가 주었던 압박은, 데이터 위에 올려놓고 보면 꼭 필요한 짐은 아니었다 (European Journal of Preventive Cardiology, 2023).
나이에 따라 레벨링 구간도 다르다.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 캠퍼스의 팰룩 교수가 이끈 연구팀은 15개국 47,471명의 데이터를 종합했다. 60세 이상은 하루 6,000~8,000보가 적합했고, 60세 미만은 8,000~10,000보가 적정한 걸음이었다 (The Lancet Public Health, 2022).
만 보는 더 이상 기준이 아니다. 상징일 뿐이다. 출근길에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네 층. 점심시간에 사무실 주변 한 바퀴, 약 10분. 퇴근 후 편의점까지 왕복 700미터. 그런 이동이 쌓여 심장과 혈관, 대사 시스템을 조금씩 바꾼다.
서울시 '손목닥터 9988'은 이 연구 흐름을 정책으로 옮긴 사례다. 19~69세는 하루 8,000보, 70세 이상은 5,000보. 팰룩 메타분석이 보여준 연령별 레벨링 구간을 그대로 반영한 설계다. 60대 이상에게 6,000~8,000보면 충분하다는 데이터가 있으니, 70대의 문턱을 낮춰 참여 장벽을 줄인 것이다.
그렇다면 매일 빠짐없이 걸어야만 효과가 있을까?
교토 대학교의 이노우에 코스케 연구팀이 미국 성인 3,101명을 10년간 추적하여 일주일 중 8,000보 이상 걸은 '날수'로 그룹을 나눴다. 이 때, 주 1~2일만 8,000보를 넘긴 사람은, 한 번도 넘기지 않은 사람보다 10년간 사망 위험이 14.9% 낮았다. 하지만 주 3~7일 걸은 사람은 16.5%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 주 1~2일, 그러니까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제대로 걸어도 매일 걷는 사람에 근접하는 효과를 얻은 셈이다. 주 3~4일이면 충분했고, 그 이상 걸었을 때 더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JAMA Network Open, 2023).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질문이 있다.
걸어서 건강해진 걸까, 건강하니까 걸을 수 있는 걸까. 바로 역인과의 문제다. 입원 환자나 중증 만성 질환자는 걷기 자체가 어렵다. 이들이 '적게 걷는 그룹'에 포함되면, 걷기의 효과가 아니라 건강 상태의 차이가 숫자에 섞여 들어온다. 연구자들도 이 함정을 알고 있었다. 이민 리(2019)는 심장병·암·당뇨 환자를 분석에서 뺐고, 자가 건강 평가가 낮은 참가자도 제외했다. 추적 첫 1년 내 사망도 빼냈다. 팰룩(2022)은 첫 2년 내 사망을 제외하는 민감도 분석을 돌렸다. 두 경우 모두 효과 크기가 줄었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또 하나의 한계가 있다. 측정 기간의 문제다. 이민 리 연구에서 가속도계를 착용한 기간은 일주일이다. 그런데 사망 여부를 추적한 기간은 4년이 넘는다. 일주일의 걸음 수가 그 사람의 '평소 활동량'을 대표한다는 가정 위에 연구가 서 있는 셈이다. 건강검진에서 하루 뽑은 혈액으로 '이 사람의 평소 콜레스테롤'을 추정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측정 주간이 유독 바빴거나, 반대로 감기에 걸려 쉬었을 수도 있다. 측정 이후에 직장을 잃거나, 이사를 하거나, 무릎 수술을 받아 활동량이 크게 바뀌었을 수도 있다. 나머지 3년 51주의 삶은 측정되지 않았다.
이민 리 연구팀도 이 점을 논문의 한계로 직접 언급했다. 다만 성인의 신체 활동 패턴은 단기적으로는 요동치지만 장기적으로는 상당히 안정적이라는 선행 연구가 있고, 하버드 간호사 건강 연구처럼 2년마다 반복 측정한 코호트에서는 누적 평균이 단일 측정보다 사망률을 더 정확히 예측했다. 일주일 데이터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전혀 대표성이 없다"는 것도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관찰이 아니라 실험으로 걷기의 효과를 직접 확인한 데이터는 없을까.
웨스트버지니아 대학교 의대의 켈리 교수 연구팀이 1,176명을 대상으로 25개 걷기 무작위 대조 실험을 종합한 메타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주 5회 이상, 하루 30분 이상 빠르게 걷는 프로그램을 8주에서 최대 2년까지 실시한 결과, LDL 콜레스테롤이 평균 5%, 수치로는 5.5mg/dL 내려갔고, 총콜레스테롤/HDL 비율은 6% 감소했다. 체중이 줄지 않은 사람에게서도 이 수치는 유효했다 (Kelley et al., Preventive Medicine, 2004).
중국 동남대학교와 독일 울름 대학교의 치우 연구팀이 제2형 당뇨 환자를 대상으로 8주 이상 걷기를 실시한 18개 RCT(866명)를 종합한 결과, 당화혈색소(HbA1c)가 평균 0.5%포인트 내려갔고, BMI와 이완기 혈압도 낮아졌다. (Qiu et al., PLOS ONE, 2014).
혈압만 따로 본 데이터도 있다. 말초동맥질환 환자에게 감독 하 트레드밀 걷기를 주 1회 이상, 6주 이상 실시한 27개 연구(808명)의 메타분석에서 수축기 혈압은 평균 4mmHg, 이완기 혈압은 2mmHg 내려갔다 . 인구 집단 수준에서 이 정도의 혈압 저하는 뇌졸중 발생률을 유의미하게 낮추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Journal of Vascular Surgery, 2019).
정리하면 이렇다. 수십만 명을 추적한 관찰 연구에서 "많이 걷는 사람이 오래 산다"는 관계가 나왔다. 건강한 사람이 많이 걸은 것일 수도 있으니, 연구자들은 아픈 사람을 빼고 다시 분석했다. 여기에 더해, 걷기를 무작위로 시킨 실험에서 콜레스테롤, 혈당, 혈압이 실제로 내려갔다. "걷기가 건강에 기여한다"는 결론을 완벽히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쌓인 증거는 상당히 일관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중요한 건 만 보를 채웠는지가 아니다. 가만히 있던 몸이 오늘 움직였는지다. 2,000보면 2,000보대로 의미가 있고, 3,000보면 3,000보만큼의 변화가 시작된다. 이번 주에 하루 이틀 못 걸었어도 괜찮다. 주말에 한 시간 걸으면 그 주에는 이미 운동을 한 것이다. 걸음 수 앱의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현관문을 열고 나섰느냐는 사실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