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낡은 카디건과 여행의 소음

벼룩시장: 이방인의 기억 가판대

by 목림

오래된 컨트리풍의 야외 활동복인 말보로 빈티지 카디건을 중고품 전자시장 ‘당근’에 만원에 내놓았다. 지독하게 낡은 추억. 누군가 그걸 산다면, 그냥 주고 싶다.

카디건의 기억

그곳은 대낮에도 어둡다. 곧 비가 내리겠지. 프랑크푸르트 국제공항에서 뮌헨 공항으로 갈아타는 여정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 일이다.


“Where ist boarding? Munich?” ‘어디서’는 영어고 ‘이예요?’는 독일어고 ‘탑승’은 영어였다. 엉망진창이었지만 용케 알아듣고 뮌헨행 비행기 탑승구를 알려 주는 공항 직원이 고마웠지. 헐레벌떡 시작되는 일들은 늘 실수와 기대를 안겨준다. 어차피 싫은 곳을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과연 좋은 일들 속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호사는 누릴 수 있을까. 28년 전 처음 밟아 본 독일 땅은 잔뜩 찌 부린 얼굴로 나를 맞이했던 나라였고 언제나 비가 왔었다.


강철탑 같은 밀도로 너 따위가 싫어하거나, 좋아할 만한 대상은 아니라는 표정을 잊을 수는 없다. 안식처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그 무심했던 얼굴. 왜 다시 온 걸까. 비는 추적추적 참 잘도 내린다.


‘배운 자들은 무력하고 가증스럽다. 그들은 비스마르크를 논하고 하버마스를 존중하지만 정작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잔인하다. 역사는 잔악한 자들이 쓰는 모양 좋은 교향시란 건 그들만 모른다. 시간을 살아낸 다른 이들의 삶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정한 곳 없이 떠다니는 생각들은 두서없이 여행을 참견하고 언제나 다른 이들을 정죄할 뿐이다.


언젠가 건조하고 끔찍하게 길었던 군 생활이 끝날 무렵, 새로운 미래로 잠 못 이루는 전역 예정자들이 우글거리는 전역자 내무반에서,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훈련소 동기가 모두가 들으라는 듯 군대의 효용을 늘어놓은 기억이 별안간 떠오른다. 사는 건 훈련이고 벗어날 수 없는 일터라는 건 그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다. 난 그냥 빠져나가는 날숨에 올라탄 소리처럼 살고 싶은데 들숨을 잊어버렸다.


왜 기억은 가장 어울리지 않는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찾아오는 걸까. 설레듯 앞서가는 아내가 여행길을 재촉한다. 아내가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