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서명 하나에 시체가 된 유학생

벼룩시장: 이방인의 기억 가판대

by 목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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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라 강남 간다지만 잘 모르니 은행도 따라간다. 일단 은행 계좌를 만들어야 하고 은행은 도이치 은행에서 개설하기로 했다. 문제가 생긴다. 여행자 수표로 전환한 목돈을 새로 개설한 계좌로 옮기려 한다. 직원이 작성하라는 서류에 여행자 수표에 멋지게 갈긴 나만의 서명과 똑같은 서명을 했는데, 별안간 지긋한 나이의 여직원이 눈에서 레이저를 쏘아 댄다. 왜 여권의 서명과 여행자 수표의 서명이 다르냐고 따진다. 모르겠다. 아니 사실 여권에 내가 서명을 어떻게 했는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여권은 직원의 손에 있고 이 여자는 내 여권의 서명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겨우 더듬은 기억의 조각은 난감했다. 몇 년 전, 부모님은 부부 동반 해외여행을 준비했었다. 그런데 출발을 앞두고 어머니가 갑자기 몸이 불편해져, 아버지의 ‘파트너’가 제대 후 복학을 준비하던 나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급하게 발급된 여권.


그리고… 단체여행을 진행하던 여행사 직원이 내 이름으로 대충 갈겨 놓은 서명. 이런 일이 가능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나는 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추론’해 만든 엉성한 서명을, 내 손으로 다시 재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서양사람들의 서명은 우리나라의 인감도장이라는 사실을 난 몰랐던 거다. 서명쯤을 인기 연예인이 팬에게 건네는 기념품 정도로 여겼던 내가 통탄스럽다. 이 기괴한 서사를 독일어로 설명하려는 내 친구는 거의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거의 시체가 될 무렵 드디어 직원은 내 여권의 서명을 보여 주고 나는 그 기묘한 필체를 따라 억지로 흉내 내고,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녀는 그럴듯하게 따라 서명한 나를 용서해 준다.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희롱하는 건 세상 이치일까. 언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실수가 일상인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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