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환각의 강]
Ch.17 아르고스
그리스 신화에서 아르고스 파놉테스는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이다.
그는 잠들 때조차 완전히 잠들지 못했다. 눈의 절반만 감고, 나머지 절반으로 세계를 근엄하게 감시하는 자경단의 역할을 자처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생에 여러 공적을 쌓은 이 용맹한 거인 영웅에게 어느 날 따분한 임무가 내려왔다. 신들의 여왕인 헤라는 투기로 그득 찬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오를 그에게 맡겼고, 충실한 아르고스는 이 순진한 암소를 나무에 묶어둔 채 한순간도 시선들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수십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꿰뚫어 본 그도 결국 스스로의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그를 죽인 것은 날카로운 칼이나 창이 아니라 따분한 이야기였다. 모든 것을 보는 존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그 순간, 바로 그 마지막 한 개의 눈마저 스르르 감겼을 때, 그는 그의 짧고, 집약적인 생의 결말에 비로소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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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7일의 아침은 조용했다.
IRIS는 오늘의 조도를 6월 평균보다 1.3% 낮다고 읽었다. 엷은 구름이 아직 태양 앞을 끼어들고 있었고, 출근길의 플라타너스 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제 배를 뒤집었다. 잎맥의 떨림과 흔들리는 방향이 시야 위에 숫자로 떠올랐다.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의 체온은 36.4도였고, 옆 건물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이 3.2초 간격으로 눈을 찌르고 있었다. 나는 IRIS가 측정한 그 간격을 다시 직접 세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이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
4월 말, 서재에서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이미지. 연구실. 마이클의 눈물, 리사의 전화, 벽 스크린 위의 날짜. 두 달 뒤라고 생각했던 날이 한달음에 달려와 내 눈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미래란 늘 닫히지 않은 가능성의 얼굴을 지으며 다가오지만, 오늘은 이미 문처럼 닫혀 있는 채 굳은 얼굴을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이 이 날짜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오기 전까지는 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긴장과 함께 아침 약을 삼켰다. 아리피프라졸 15밀리그램. 물과 함께 넘겼지만 혀끝에는 금속 같은 쓴맛이 잠시 남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몇 주째 도둑잠만 취한 사람의 손이었다. 뇌는 계속 깨어 있었고, 몸은 그 각성의 대가를 천천히 치르고 있었다. 빚은 늘 몸으로 돌아왔다. 눈 밑의 무게로, 손끝의 떨림으로, 아침마다 늦게 도착하는 맥박으로. 이상한 것은 몸이 이렇게까지 느려지고 약해질수록 사고는 오히려 더 가늘고 차갑게 벼려진다는 점이었다. 감정은 아직 이름을 고르고 있는데 머리는 이미 패턴을 찾고, 계단 몇 층을 오르는 것도 고단해하면서도 눈은 사소한 불일치를 먼저 발견했다. 하지만 이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빚이 아침마다 점점 이자를 붙여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모두 평소와 같았다. 마이클은 코드를 검토하고 있었고, 제이슨은 새로 나올 프로토타입 모델을 조정하고 있었고, 리사는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커피 냄새가 아주 묽게 남아 있었고, 공조기에서 나온 건조한 바람이 피부를 스쳤으며, 형광등은 사람의 얼굴에서 불필요한 음영을 지운 채 모든 것을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IRIS는 각자의 심박을 떠올렸다. 64, 71, 68. 이상 없음. 숫자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숫자들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심박은 현재를 보여주지만, 현재가 곧바로 안전을 뜻하지는 않는다. 위험은 종종 생체 신호보다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먼저 자란다.
리사의 책상 위에 새 모니터가 있었다. IRIS가 제조사와 모델명을 스캔했다. 4월의 이미지에서 본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베젤의 곡률, 받침대의 각도까지. 손끝이 갑자기 차가워졌고, 피가 피부 아래에서 한 걸음 물러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도 머리는 먼저 이 불일치의 성격을 분류하고 있었다. 단순한 우연인지, 예지가 맞아떨어진 것인지, 혹은 내 뇌가 이미 본 것을 현실 위에 덧씌우고 있는 것인지. 사람은 무너지는 순간에도 판단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과학자는 그렇다. 감정은 뒤늦게 밀려오고, 분류는 먼저 시작된다. 나는 묻지 않았다. 그 모니터가 언제 들어왔는지, 왜 하필 이 모델인지, 누가 승인했는지. 사소한 질문 하나가 오늘을 현실로 만들 것 같았다.
오전 10시. 노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과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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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가 지정한 장소는 CORTEX 본관에서 세 블록 떨어진 주차장이었다.
건물을 나서는 길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발을 옮길 때마다 무릎 안쪽이 비어 있는 것처럼 힘이 풀렸고, 계단을 오를수록 심장이 몸보다 앞질러 올라가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수주 간 쌓여온 피로와 불면과 잔류기억과 미래의 단편들이 오늘 아침 한꺼번에 청구서를 보냈다. 사람은 때때로 지금 이 순간 하나의 감정만을 겪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공포와 피로와 기대와 체념과 불안이 모두 같은 몸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자리를 밀어낸다. 어떤 날에는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도착한다.
6층. 옥상.
문을 열자 바람이 먼저 얼굴을 스쳤다. 콘크리트 바닥은 이미 6월의 열을 조금씩 머금고 있었고, 신발 밑창을 통해 올라오는 온기가 생각보다 또렷했다. 주차된 차는 없었다. 안테나 탑 하나가 하늘을 향해 서 있었고, 난간 너머로 팔로 알토의 지붕들이 모형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그 뒤로는 산타크루즈 산맥이 연무 속에 잠겨 있어 도시 전체가 평소보다 멀게 보였다. 아니, 멀게 보였다기보다 이곳만 따로 세계에서 분리된 채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IRIS가 스캔을 시작하자마자 거의 즉시 그만두었다.
사람 둘. 콘크리트. 하늘. 바람. 조도 4200럭스. 차량 없음. 등록 개체 없음.
오버레이 레이어가 거의 비어 있었다. 스캔할 것이 없었다.
나는 한동안 그 텅 빈 시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IRIS를 달고 난 뒤로 내 시야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체온, 심박, 이름, 소속, 물질의 구성, 빛의 각도, 물체의 열 분포. 현실은 언제나 표면보다 먼저 데이터로 도착했고, 데이터가 먼저 도착하는 세계에 오래 살다 보면 외피는 점점 신뢰를 잃는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비어 있어서 이상했다. 비어 있는 시야는 해방이 아니라 결핍처럼 느껴졌다. 물속에서 오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물이 없는 공간에 놓인다면, 숨이 쉬어지는 것보다 먼저 몸이 불안을 느낄 것이다. 그와 비슷했다. 동시에 머리 한구석에서는 노라가 왜 하필 이 장소를 골랐는지 이미 계산하고 있었다. 차단 가능한 디지털 표면이 없고, 접근 방향이 단순하며, 감시 장치의 설치 가능성이 낮고, IRIS가 쓸데없이 확장 정보를 읽지 못하는 환경. 좋은 보안은 기술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개입할 역할 자체를 지우는 것이다.
노라가 난간 쪽에 서 있었다. 바람이 그녀의 셔츠 자락을 미세하게 흔들고 있었고, IRIS는 곧바로 그녀를 스캔했다. 체온 36.2도. 심박 61. 누구와는 다른 지나치게 평온한 수치로 평상시와 같았다.
"왜 여기예요?"
"디지털 기기가 없으니까요." 노라는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은 채 말했다.
"버그를 심을 표면이 없고, 360도 개방이라 접근자를 미리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가 잠시 멈추었다.
"당신의 IRIS가 쓸데없이 스캔할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장은 배려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보고서의 문장처럼도 들렸다. 노라는 대개 배려와 경계를 같은 어조로 말했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선 먼저 그 사람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증명해야 한다는 듯이.
그녀는 종이 묶음을 꺼냈다. 태블릿이 아니라 종이였다. 그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종이라는 것은 전자기기보다 느리고, 느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다. 그것은 눈앞의 문장을 삭제할 수 없게 만들고, 스크롤로 지나갈 수 없게 만들고, 손으로 직접 만지게 만든다. 디지털 문서는 흔적을 감추는 방식이 다양하지만, 종이는 숨기려 할수록 숨긴 흔적이 남는다. 보안이 충분히 높아지면 사람은 다시 아날로그로 되돌아간다. 기술은 언제나 가장 오래된 형태의 매체 앞에서 잠시 무력해진다.
노라는 문서를 내게 바로 건네지 않고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람이 넘기지 않도록 주위를 둘러보다가, 아무 말 없이 구두 한 짝을 벗어 묶음 위에 올려두었다. 검은 구두와 백색 문서가 한 화면 안에 놓인 장면이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깨끗한 것 위에 더러운 것을 올려놓는 동작처럼 보이기도 했고, 반대로 너무 멀끔한 것을 현실에 붙들어두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거운 것을 얹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읽으세요. 질문은 다 읽은 뒤에."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섰다. 난간 가까이, 나를 보지 않고 지평선을 주시했다. 감시하는 것인지, 배려하는 것인지, 혹은 이 사람에게는 그 둘이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앉았다. 열기가 허벅지 아래에서 천천히 올라왔고, 종이 묶음을 무릎 위에 올린 뒤 한동안 첫 장을 넘기지 못했다. 손바닥을 표지 위에 얹고 있자 활자의 아주 미세한 눌림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바람은 일정한 간격으로 지나가고 있었고, 멀리서 도시의 소리가 부서져 올라왔다. 텅 빈 오버레이. 콘크리트의 열기. 종이의 감촉. 이 순간은 지나치게 단순해서, 오히려 무엇인가가 크게 무너질 직전의 고요처럼 느껴졌다.
문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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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페이지. 분류 등급 TS/SCI. 프로젝트명 ARGOS.
*TS는 Top Secret으로, 유출 출시 국가 안보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최고 등급 기밀'을 의미하며, SCI는 Sensitive Compartmented Information으로, 허가받은 사람만 접근 가능한 '특수 분류된 정보'를 의미합니다.
기관명은 삭제되어 있었고, 계약 상대는 국방부 산하 특수 프로그램으로만 표기되어 있었다. IRIS가 활자를 하나하나 읽어 올렸다. 문장의 경계가 지나치게 명료했다. 이미 분류된 진실은 대개 모호하게 쓰이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 오해하지 않도록 충분히 선명하게, 그러나 정작 책임질 이름은 지운 채 쓰인다. 그것은 기밀문서의 오래된 미학이자 비겁함이다.
1단계. Sentinel(보초).
IRIS의 시각 증강 기술을 군사 정찰 위성과 드론에 탑재. 적외선, 자외선, 암시야를 포함한 확장 시각을 원격 감시에 활용.
데이비온이 설명한 부분으로, 이 단계까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기술은 언제나 더 넓은 시야를 서약하며 시작하지만, 더 넓은 시야는 곧 더 강한 권력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연구실에서 가능성이라고 부르던 것이 계약서 안에 들어가는 순간 효율이 되고, 효율은 그들에게 우위와 지배로 번역된다. 군사 기술은 늘 더 많이 본다는 명분으로 시작해, 더 멀리 겨눈다는 결과로 끝난다.
2단계. MIRAGE(신기루).
종이를 넘기는 손끝에서 맥박이 뛰는 걸 느끼며 IRIS가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BCI를 통한 시각 정보…
그다음부터 특정 단어들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침투. 변조. 조작. 주입. 단어들 위로 얇은 픽셀 노이즈가 겹쳤고, 글자들은 마치 습기를 먹은 잉크처럼 가장자리부터 번져나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시선을 다시 고정했다. 노이즈가 잠시 잦아들었다.
대상자의 시각 BCI에 침투하여 보이는 것을 변조하는 기술. 실제 환경과 다른 이미지를 뇌에 직접 주입하여, 대상자가 현실을 오인하게 만드는 것.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글자 위로 무언가 겹쳐졌다. 여성의 어깨선 같은 것, 머리카락의 윤곽 같은 것. 어머니인지 아닌지조차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잔상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끔찍했다. 0.1초도 되지 않아 사라졌고, 종이 위의 활자가 다시 선명해졌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문서인가, 환각인가, 아니면 문서를 읽는 나의 공포가 스스로에게 만들어낸 이미지인가.
MIRAGE의 설명을 읽는 도중에 내 뇌가 바로 그 현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현실과 허상이 같은 평면 위에 겹쳐지고, 그 둘이 서로를 반사하며 더 깊어졌다. 거울 앞에 거울을 비추었을 때 끝없이 안쪽으로 꺼지는 복도처럼, 내게서 확신이 계속 뒤로 달아났다.
오늘 아침 약을 먹었다. 지금은 낮이고, 나는 깨어 있다. 그 사실들이 아무 안전도 보장하지 못했다.
손바닥으로 종이를 눌렀다. 활자의 눌림이 피부에 닿았고, 아래에서는 콘크리트의 열기가 올라왔다. 물리적인 것들은 무게와 온도가 있었고, 접촉하면 닿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현실을 확인했다. 언제부터 땀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손끝은 이미 축축했다.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원리는 즉시 파악되었다. 공포가 이해를 늦춰주지 않는다는 점이 더 끔찍했다. 이것은... IRIS의 원리와 너무 닮아 있었다. 정확히 역방향으로. IRIS는 카메라가 받은 데이터를 뇌의 이미지 생성 경로로 전달한다. 그렇다면 그 경로를 역으로 열었을 때 일어나는 일 역시 단순하다. 거짓 데이터를 주입하면 거짓 현실이 보인다. 총알은 진짜인데 눈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 사람은 넘어지고 피를 흘리는데, 정작 마지막까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세계. 그리고 이 기술이 무서운 이유는 복잡해서가 아니라, 내 기술과 너무 적은 수정만으로 맞물릴 수 있다는 데 있었다. 파괴적인 기술은 대개 정교한 덧셈이 아니라, 익숙한 구조에 가해지는 작은 방향 전환의 형태로 완성된다.
3단계. ARGOS(아르고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오버레이가 크게 흔들렸다.
단어 몇 개 수준이 아니라 단락 전체가 픽셀 노이즈로 덮이기 시작했다. 먹물이 물에 번지듯 문장 전체가 흐려졌고, 아무리 집중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은 피로나 환각의 방식과는 달랐다. 내 눈의 안쪽으로 누군가 손을 넣어 특정 문장만 지우고 있는 것처럼, 목적이 너무 분명했다.
나는 검지로 첫 줄을 짚었다. 활자는 종이 위에 미세하게 눌려 있었고, 손끝으로 따라가면 볼 수 없는 것도 읽을 수 있었다. 촉각은 아직 해킹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그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지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믿고 싶었다.
원격 감시로 대상을 추적하면서 동시에 대상의 시각을 조작하는 것. 완벽한 감시와 완벽한 통제.
그제야 이름이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아르고스.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 항상 보고 있으면서 대상이 보는 것까지 결정하는.
마지막 페이지. 사고 관련.
IRIS의 오버레이가 거의 완전히 블랙아웃되었다. 종이 위에 글자가 있다 사실은 알 수 있었지만, IRIS는 그것을 읽어주지 않았다. 텍스트 레이어 전체가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손끝 아래에는 활자의 결이 남아 있었다. 글자는 여기 있는데, 내 눈만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때 이해했다.
누군가가 지금 내 눈을 통해 보고 있었다.
IRIS의 카메라가 찍는 것이 누군가에게 실시간으로 전송되고 있었다. 내가 이 종이를 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민감한 부분이 나타날 때마다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내가 계속 앞을 보고 있다고 믿는 동안, 정작 알아야 할 것만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감시는 늘 멀리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위성, 서버, 검은 모니터, 익명의 방. 그러나 가장 완벽한 감시는 나의 시선을 빌리는 감시였다. 내 눈으로 세계를 훑으면서 동시에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선별하는 것. 눈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도록 유도된 것을 본다.
아르고스는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눈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손이 굳었다. 손가락 끝에 땀이 맺혔다. 바람이 옥상 위를 스쳐갔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Aria."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시 말했다.
"Aria, 무선 연결 차단."
짧은 정적 뒤에 IRIS의 오버레이에서 외부 데이터 스트림이 사라지며 연결 아이콘이 꺼졌다. 오버레이는 로컬 처리 모드로 전환되어 기본 시각 보조 기능만 남긴 채 단순해졌다. 시야가 갑자기 가벼워졌지만, 그 가벼움은 자유의 무게라기보다 잘려나간 사지의 가벼움 같았다. 방금 전까지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지고, 사라진 자리가 먼저 느껴지는 방식의 가벼움이었다.
이 음성 명령 자체가 전송 데이터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행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린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종이 위의 글자가 돌아왔다.
해킹에 사용된 기술적 서명이 특수 프로그램이 이전에 사용한 공격 도구의 서명과 87% 일치.
그리고 여백에 노라의 각질 필체가 적혀 있었다.
가설: 대상의 프로필(MIT 시각피질 우회 이론 + CORTEX BCI 역량)을 고려하면, 실명 시 자체 시각 BCI 개발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음. V1 우회 접근법은 대상 고유의 이론적 기반. 성공 시 MIRAGE 기술의 직접적인 토대 제공.
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첫 번째는 활자로 읽었고, 두 번째는 의미로 읽었고, 세 번째는 상실로 읽었다.
세 번째에 이르렀을 때 바람 소리가 사라졌다. 도시의 소리도, 콘크리트의 열기도, 노라의 그림자도, 종이도. 나만 남았다. 심장이 한 번 크게 뛰고, 그다음 박동이 너무 늦게 와서 멈춘 줄 알았다.
나를 IRIS의 설계자로 만들기 위해 먼저 실명시킨 것이다.
평생 나는 남들 위에 있었다. MIT에서도, CORTEX에서도, IRIS 이후의 세상에서도. 누구보다 멀리 보고, 제일 먼저 보는 사람. 그것이 내가 아는 나였다. 재능과 집요함과 상실이 결합해 만든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나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가 설계한 결핍의 궤도였다면.
사고의 밤이 돌아왔다. 비가 오던 고속도로, 반응하지 않던 브레이크, 잠긴 핸들, 가드레일이 다가오던 각도, 유리 파편이 시각피질을 향해 들어가던 감각. 오랫동안 사고라고 불렀던 것이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면. 그날 밤 이후 내가 견딘 상실과 재건과 광기 어린 집착까지 모두 어떤 장기적인 계산 안에 있었다면.
그리고 어머니의 잔류기억 데이터. 22년간 서버에 보관했던 조각들. 어머니의 목소리, 별을 가리키던 손끝, 냄새, 체온. 그것마저 처음부터 이 계획의 재료였다면.
그 순간 슬픔보다 먼저 올라온 것은 모욕감이었다. 누군가 어머니와 나 사이에만 있어야 할 기억의 온도를 기술 문서의 하위 항목으로 옮겨 적고, 사람의 안쪽을 허가 없이 분해하고 표본으로 만들었다. 국가안보나 기술진보나 불가피한 희생 같은 말 따위는 내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치되지 않았다. 그날의 고통은 그 자리에 그대로, 열여섯 살 소년과 함께 남아 있었다.
구역감이 치밀었다. 일어서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리가 없는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목 뒤가 뜨거웠다. IRIS가 나 자신의 생체 신호를 읽었다. 심박 160. 호흡 얕고 불규칙. 숫자는 언제나 침착했다. 사람이 무너질 때조차.
사고는 해킹이었고, 해킹의 목적은 단순한 제거가 아니었다. 나를 죽이려 했다기보다, 나를 특정 방향으로 남겨두려 했다. 완전한 파괴가 아니라 계산된 손상과 설계된 형질. 그것이 더 끔찍했다. 사람을 없애는 일은 순간으로 끝나지만, 원하는 형태로 남겨두는 일은 그 사람의 시간을 끝없이 고쳐 쓰며 같은 상처를 다시 통과하게 만든다. 고통의 영원 회귀. 이는 훨씬 더 많은, 그리고 더 잔혹한 지성을 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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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온은...?" 내가 말했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모르는 목소리였다.
노라가 가까이 왔다. 그녀는 여전히 서 있었고, 나는 콘크리트 바닥 위에 앉아 있었다. 그 높이 차이가 나를 더 추락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노라가 말했다. “처음부터 특수 프로그램의 협력자였거나, 1단계까지만 알고 그 이후는 이용당했거나. 지금의 증거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어요.”
나는 웃지 않았지만, 웃음과 비슷한 무언가가 목 안에서 부서졌다.
"마커스부터." 나는 말했다. "마커스 임상실험. 나는 몰랐어. CEO인 내가."
노라가 잠시 멈추었다. "네."
"어떻게 내가..." 질문인지 확인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노라는 정확히 이해한 얼굴이었다.
"컴파트먼탈라이제이션입니다." 노라의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다. "칸막이. 같은 건물 안에서도 프로젝트별로 정보를 완전히 분리됩니다. 군사 기밀 프로젝트에서는 표준이에요. 연구 인력은 등급 B. ARGOS는 등급 A 이상만 접근 가능했고요."
"자기 회사에서 자기가 배제된 거네." 내가 먼저 말했다.
배제. 그것은 정보 접근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중심에서 조용히 밀려나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름은 CEO였고 역할은 설계자였지만, 실상은 자기 파괴를 모르는 채 완성해 가는 도구였다는 뜻이었다. 보안과 분리는 언제나 보호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분산하는 데 더 효율적이다. 모두가 자기 층만 알고 있으면, 아무도 건물 전체를 무너뜨렸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노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당신의 잔류기억 현상과 IRIS가 당신의 뇌에 일으키고 있는 변화. 그것 역시 ARGOS 관점에서는 가치 있는 데이터예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IRIS가 잔류기억을 수신할 수 있다면, MIRAGE는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대상자의 뇌에 심을 수도 있습니다. 경험하지 않은 일을 겪었다고 믿게 만드는 것. 거짓된 잔류기억."
가짜 기억의 이식. 이 문장이 착지하는 동안 나는 내가 지금까지 본 것들 가운데 무엇이 정말 나의 것인지 짧고 깊게 의심했다. 어머니의 목소리, 4월의 예지, 사고 이후 반복되던 파편들. 그것들이 모두 진짜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진짜와 거짓을 가르는 기준이 결국 내 뇌뿐이라면, 그 뇌가 이미 열린 문이라면.
"내 잔류기억 데이터를 모니터링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CORTEX 서버에 대한 외부 접근 흔적이 있어요. 미세하지만 반복적입니다.”
"다르시야, 별 봐"
어머니의 말이 누군가의 저장소를 지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순간 분노가 왔다. 다른 것들보다 먼저, 더 뜨겁게. 그제야 나는 보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행위인지 이해했다. 시선은 때때로 더 차갑고, 더 오래 남고, 더 깊이 훼손할 수 있었다. ARGOS는 이 폭력을 시스템화한 것이었다.
"IRIS 무선을 방금 차단했어." 내가 말했다.
노라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 훈련된 사람이 놀랄 때 보이는 최소한의 반응.
“알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결국 그 선택을 할 거라는 걸.”
위로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내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들렸다. 누군가의 계산 속에 있었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선택만큼은 아직 내 것일 수 있다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람이 문서의 가장자리를 들었다가 다 내려놓았다.
ARGOS를 언론과 의회에 공개한다. 데이비온과 대면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첫 번째는 너무 거대했고, 두 번째는 너무 개인적이었고, 세 번째는 너무 쉬웠다.
"시간이 필요해."
"있습니다. 하지만 많지 않아요. 2주."
그때 전화가 울렸다.
데이비온.
나는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데이비온의 이름이 떠 있는 작은 직사각형이 낯설었다. 이름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은 어느 날 문득, 같은 이름이 전혀 다른 무게로 느껴지는 때 알게 된다. 무너진 것은 지금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이었다는 것을.
세 번째 진동이 오고 나서야 전화를 받았다.
"노라가 너한테 문서를 줬다는 거 알아." 데이비온의 목소리는 낮았다. 평소에도 낮은 편이었지만, 지금은 침착함을 넘어 너무 오래 눌러두어 표면만 매끄럽게 남은 공포의 톤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얕고, 불규칙한 호흡이 넘어왔다.
“달시.”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한 가지만 말할게. 이사회에 국방부 출신이 셋이야. 내가 아니어도 이건 진행돼. 그래서 내가 핸들을 잡고 있는 거야.”
핸들.
그 단어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한 번의 사고로 시력을 잃었고, 이제는 누군가가 그 사고의 핸들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금 알았다. 그런데 데이비온은 같은 단어를 구원처럼 말했다. 통제하고 있다는 뜻으로. 최악을 막고 있다는 뜻으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잠깐 더 선명해졌다. 그 짧은 정적 사이로 아주 오래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MIT 복도의 차가운 형광등, 새벽 세 시의 자판기 커피, 마감 직전의 발표 자료를 함께 붙잡고 있던 밤, 첫 투자를 유치하던 날 악수하면서 그의 눈가에 생겼던 잔주름. 어떤 우정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 배신조차 그 형태를 갖추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배신은 늘 칼처럼 날카롭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세월 전체가 조용히 다른 의미로 바뀌는 방식으로 도착하기도 한다. 같은 기억들이 더 이상 같은 의미가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언제부터였어?”
내 목소리는 낮았고, 생각보다 차분했다. 너무 깊이 다친 사람의 목소리는 오히려 작아진다. 소리를 높일 힘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화기를 사이에 둔 침묵의 밀도가 느껴졌다. 그는 지금 거짓말을 고르는 것인지, 진실을 고르는 것인지, 아니면 둘을 구별할 수 없게 된 사람처럼 적당한 문장을 찾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는 아니야.”
그 말은 부정처럼 들렸지만, 실은 인정의 다른 윤곽이었다. 처음부터가 아니었다면 중간부터였다는 뜻이었고, 중간부터였다면 어느 지점에서는 분명히 알았다는 뜻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늘 흐릿하게 말한다. 연도도, 날짜도, 방의 구조도, 그때의 냄새도 모두 기억하면서도, 정작 “그날부터”라는 문장은 끝내 또렷하게 말하지 못한다. 선을 넘는 순간은 대개 너무 분명해서, 오히려 평생 흐리게 말하게 된다.
“달시, 내 말 들어. 내가 없으면—”
“그만.”
그의 말을 끊었다. 단지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듣고 있으면, 그가 자신을 변호하는 동안 내 안의 어떤 부분이 그 논리를 이해해 버릴 것 같았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의 비겁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떤 공포가 그를 그 자리로 밀었는지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그 상상이 시작되기 전에 멈추고 싶었다. 게다가 데이비온은 이미 스스로를 폭로하고 있었다. “내가 핸들을 잡고 있다”는 말은 통제의 문장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책임의 비대칭을 감추기 위한 포장이다. 정말로 통제하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이 길어진다는 것은 이미 자신도 누군가에게 통제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람이 옥상 위를 가로질렀다. 전화기를 쥔 손바닥에 땀이 배어 있었다. 종이의 가장자리가 무릎 위에서 아주 조금 떨리고 있었다.
"2주 줘."
내가 말했다.
데이비온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낮게, 거의 숨처럼 말했다.
“고마워.”
그 말은 내가 평생 들어온 어떤 감사보다도 더 비참하게 들렸다.
전화가 끊겼다.
화면이 꺼진 뒤에도 한동안 귀가 멍했다. 나는 이미 그를 잃었다는 사실과, 그 상실이 아마 오래전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삼키고 있었다. 사람이 가장 깊이 무너질 때는 적을 잃을 때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여겼던 사람을 적으로 다시 읽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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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내려가면서 난간을 잡았다. 3층에서 잠시 멈추었다. 이 정도 거리를 걷는 일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있었나. 몸은 진실보다 먼저 진실의 무게를 안다.
밖으로 나오자 6월의 캘리포니아 햇빛이 무선이 끊긴 IRIS를 통해 쏟아졌다. 외부 데이터 없이 색온도만 읽혔다. 6월의 햇빛이어야 할 것이 피부 위에서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 빛이 진짜인지, IRIS가 만든 것인지. 아니, 이제는 IRIS가 만든 것도, IRIS가 보여준다는 것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파란 하늘도 누군가 칠한 것처럼 보였다. 내 시각, 내 기억, 내 선택, 20년의 우정, 심지어 발밑의 보도블록마저 확신할 수 없는 지반 위에 서 있었다.
시각은 진실의 기관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보는 일이 통제가 되는 순간, 눈은 진실의 기관이 아니라 통치의 기관이 된다. 그리고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눈은 결국 그 소유자까지 멸망시킨다.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도 죽었다.
오만.
나는 이 단어를 데이비온에게도, 특수 프로그램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쓸 수 있었다. IRIS로 모든 것을 보려 했던 나. 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던 나. 기술을 구원과 비슷한 말로 오해했던 나.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그곳이 뚫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시각이라는 하나의 돌출된 성취만 바라보느라 그것이 연결될 수 있는 권력과 군사와 통제의 구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데이터가 아닌 방식으로. 측정값이 아니라 얼굴이 뜨거워지는 방식으로.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세 블록째에서 IRIS가 뒤편의 열원을 감지했다. 주차된 검은 세단 안에 움직이지 않는 한 점의 온기. 감시인지 우연인지 판단하지 않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감시일 수 있었고, 모든 우연이 준비된 장면일 수 있었다. 증거가 불충분한 상황에서 판단을 유예하는 과학자로서의 형질은 아직 남아 있었고, 이것이 나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마지막 공식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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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계단을 올라가면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진실은 공유되는 순간 정보가 아니라 하중이 되어 누군가에게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삶까지 바뀔 것이다. 복도의 형광등은 지나치게 희었고, IRIS가 조도를 읽고 있었지만 그 숫자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멈추었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마이클의 눈물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이 턱선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는데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사람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소식을 들으면 놀랍도록 비실용적이 된다. 닦으면 될 눈물도 그대로 흘러두고, 앉으면 될 자리에 계속 서 있고, 말하면 될 문장을 입 안에서 끝없이 반추하게 된다. 제이슨은 노트북을 닫은 채 벽에 기대어 있었고, 리사는 전화를 붙든 채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입술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랐고, 턱에 들어간 힘이 그녀가 지금 겨우 무너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리사의 책상 위 새 모니터에는 "ARGOS"라는 단어가 떠 있었다.
이 장면을 나는 이미 본 적이 있었다. 4월의 밤, 서재에서, IRIS가 꺼진 뒤의 어둠 속에서. 마이클의 눈물, 리사의 전화, “A”로 시작하는 텍스트, 그리고 2043년 6월 17일이라는 날짜. 모든 디테일이 일치했다. 모니터의 모델, 제이슨의 셔츠, 방 안의 공기가 납빛으로 무거운 것까지도.
다리에 힘이 빠져 문틀을 잡았다. 공포.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은 없었다. 내가 본 것이 진짜였다는 전율과 그것조차 누군가 심어놓은 것일 수 있다는 공포가 같은 자리에 겹쳐 있었다.
리사가 전화를 끊고 나를 보았다. 눈이 빨갰다. 목소리를 고르게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프라티마 씨요." 그녀가 말했다.
"오늘 아침 자택에서 발견됐어요."
방 안의 모든 소리가 그 문장 뒤에서 아주 짧게 멎었다. 공조기 소리도, 서버 팬 소리도, 형광등이 내는 미세한 전류음도.
리사는 한 번 숨을 삼켰다.
“현장은 정리돼 있었대요. 시신은… 알아보기 어려웠다고 했어요.”
그 뒤의 침묵은 너무 얇아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은 입 안까지 올라왔다가, 목을 지나기 전에 무게를 얻고 다시 침몰했다. 프라티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등을 곧게 세우며 태블릿을 거의 방패처럼 안고 다니던 사람. 잔류 데이터 프로토콜을 물었을 때, 내가 끝내 시선을 피했던 사람. 그녀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적어도, 어떤 모양의 어둠이 자라고 있는지 짐작은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의문을 끝내 혼자 견디다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기 몫의 두려움을 정리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버에 스크립트를 남겨뒀어요. 제 이름으로."
리사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조금 더 흔들렸다.
"오늘 트리거 됐고요. 저는 한 달 넘게 그것도 몰랐어요."
마이클의 눈물이 여전히 턱선을 타고 있었다. 그는 닦지 않았다.
형광등의 빛은 차갑고 균일했지만, 방 안의 공기는 납빛으로 무거웠다. 시각으로 공기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순간일 것이다. 아무도 크게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도 제대로 앉지 않았고, 아무도 방 안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각자 다른 높이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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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 앞 올리브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6월의 마른바람이 잎을 뒤집을 때마다 짙은 초록 아래 숨어 있던 은빛 면이 번쩍였다. 오늘은 무엇보다 소리가 먼저 들렸다. 잎이 서로 스치는 마른 소리. 어둠 속에서 열두 가지로 구분하던 소리였다. 아주 얇은 종이들이 조심스럽게 부딪칠 때 나는 듯한 소리였고, 동시에 오래된 편지를 누군가 천천히 접는 듯한 소리이기도 했다. IRIS의 오버레이가 나무 위에 겹쳐졌지만, 나는 그 숫자들을 읽지 않았다. 조도도, 온도도, 잎의 흔들림 각도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설명보다 먼저 닿는 것만이 필요했다.
나는 한동안 나무 앞에 서 있었다. 손을 뻗다가 멈추었다. 껍질의 거친 감촉이 닿기 직전의 거리에서 맴돌았다. 오늘 하루가 지나간 뒤로는 모든 것이 조금씩 의심스러웠다. 내가 본 것들, 내가 기억하는 것들, 내가 미래라고 믿은 것들, 내가 진실이라고 붙들었던 것들. 이 나무까지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의심은 한 번 문을 열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추근댔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의 은빛조차 누군가 칠해놓은 장면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이 나무는 내가 심은 것이 아니다. 이 집에 왔을 때 이미 여기 있었다. 누군가 심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 나무가 어떻게 자랄지 몰랐을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어느 해에 열매를 달고, 어느 겨울에 잎을 더 많이 잃을지 몰랐을 것이다. 심는 사람은 늘 시작만 알고, 자라는 것은 그다음의 시간을 살아낸다.
지금 내 삶도 그런 것인가.
그때 바람이 다시 불어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감각은 너무 직접적이어서 잠시 생각이 멈췄다. 사람은 모든 것을 잃어갈 때 거대한 진실보다 사소하고 구체적인 감각 하나에 더 오래 매달린다. 손등 위의 바람, 발밑의 흙, 나무껍질의 거침, 그런 것들. 삶이 무너질 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대개 서사가 아니라 촉감이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우고 있었다.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이 껍질에 닿는 순간, 거칠고 차가운 질감이 피부를 통해 올라왔다. 표면은 생각보다 울퉁불퉁했고, 손금을 따라 작은 결들이 박혔다. 그 질감은 너무나 뚜렷해서 여백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거기 있었다. 누가 심었는지와 상관없이, 누구의 의도가 시작이었는지와 상관없이, 이미 자기 몫의 계절들을 지나오며 제 식대로 굳어져 있었다. 뿌리는 이미 땅 속 깊이 내려가 있었고, 줄기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렸지만 부러지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었고, 잎들이 일제히 뒤집혔다. 은빛이 어둠 속에서 잠깐 번쩍였다가 다시 초록 아래로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