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기계의 눈]
과학에는 경계가 있다. 관측 가능한 것과 관측 불가능한 것. 설명 가능한 것과 설명 불가능한 것. 그 사이에 그어진 선이 존재한다. 나는 평생 그 선의 이쪽에 서 있었다. 빛이 닿으며 과학의 언어로 서술 가능한 쪽.
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나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자의 윤리이자 정직이며, 또 무엇보다도 나의 영역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선이 움직여 비로소 국경이 걷히기 시작하면 양쪽의 시민 모두 이방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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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3년 4월 말, 서재에서 잠들기 직전이었다.
IRIS는 꺼둔 상태였다. 낮 동안 분주히 움직인 뇌에 재정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밤에는 IRIS를 끄는 것이 루틴이 되어 있었다. 어둠이 돌아왔다. 10개월간의 어둠과 같지만, 더 이상 공포가 아닌 어둠. IRIS가 꺼지면 슬며시 귀가 먼저 열렸다. 서재의 벽시계, 에어컨의 저주파, 창밖 올리브 나무의 잎이 서로 스치는 속삭임이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시각이 물러난 자리를 다른 것들이 조용히 채우고 있었다.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과 깸의 경계에서 의식이 풀어지기 시작하는 순간, 그 얇아진 틈으로 이미지가 왔다.
IRIS가 꺼져 있었다. 카메라 입력도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AI 변환 엔진도 비활성 상태였다. 512 채널 프로브에 전력이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 볼 수 있는 경로가 하나도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 보였다. 눈도, 기계도, 회로도 닫혀 있는 칠흑 한가운데서.
이전의 잔류기억과 달랐다. 이전 것들은 과거의 이미지로 이미 존재했던 장면이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이미지는 —
연구실이었다. CORTEX의 2층. 하지만 내가 아는 연구실이 아니었다. 빛의 각도가 달랐다. 오후의 빛이 아니라 아침의 빛이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고, 리사의 책상 위에 본 적 없는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화면 위로 읽을 수 없는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지는 내가 원하는 곳을 보여주지 않았다. 스스로 움직이는 카메라처럼 시선을 끌고 다녔다.
사람들이 보였다. 팀원들이었지만 표정이 달랐다. 마이클이 울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이 턱선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보이는데 그것을 닦지 않고 있었다. 제이슨이 노트북을 닫은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리사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술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시각으로 무게를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방의 공기는 납빛이었다.
화면 한구석에 텍스트가 스쳤다. "A"로 시작하는 무언가. 읽으려는 순간 다른 이미지가 밀려와 덮었다. 복도. 누군가가 빠르게 걸어가는 뒷모습. 양복. 넓은 어깨. 데이비온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전에 이미지가 접혔고, 그 아래에서 또 다른 장면이 올라왔다. 빈 사무실. 책상 위의 물 잔. 이것도 0.5초 만에 사라졌다.
이미지만 있고 맥락은 없었다. 왜 마이클이 울고 있는지, 리사가 누구에게 전화하고 있는지, 이 방의 공기가 왜 이렇게 무거운지.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벽에 걸린 스크린 위로 날짜가 보였다.
2043년 6월 17일. 두 달 뒤의 날짜. 이미지가 꺼지고 다시 어둠의 그림자가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팔걸이를 붙잡은 채 반쯤 일어선 자세로 멈추었다. 가슴 안쪽에서는 주먹으로 벽을 두드리듯 심장이 뛰고 있었고, 그 진동이 목을 타고 올라와 귀 안쪽에서 맥박으로 들렸다. 등이 축축하고 차가웠다. 언제 흘렸는지 모르는 땀이 등줄기를 따라 허리까지 내려가 셔츠를 피부에 고정하고 있었다. 들숨은 연구개 쪽에서만 맴돌아 폐까지 닿지 않았고, 말라서 금이 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둠이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어둠과 달랐다. 빛의 잔상이 어둠에 새겨져 있는 것 같았다.
꿈인가. 잠의 경계에서 본 꿈인가.
과학자의 뇌가 앞서 작동하여 떠오르는 질문들을 메꾸려 했다. 꿈일 수 있었다. 하지만 꿈치고는 너무 생생했다. 리사의 책상 위 아직 출시되지 않은 모니터의 모델명까지 읽을 수 있었고, 제이슨이 입고 있던 셔츠의 체크무늬, 벽의 스크린에 표시된 날짜의 폰트까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선명했다. 꿈은 대개 안갯속 풍경을 내보이며 디테일을 생략하지만 금방 목도한 것은 창문 너머의 풍경처럼 또렷했다. 그리고 한 가지, 소리가 없었고 오직 이미지만 있었다. 마이클이 울고 있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리사의 입술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역시 그 목소리는 내게 닿지 않았다.
나는 분석하고 있었다. 팔걸이를 잡은 손이 아직 떨리고 있는데 머리는 이미 가설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설이 서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손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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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르티스에게 전화했다. 새벽 2시.
이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르티스뿐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전화를 걸기까지 오래 걸렸다. 첫 번째, 전화기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거는 것은 기술적 자문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벽에 전화를 거는 사람은 대개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고, 나는 그녀에게 도움을 구할 자격이 있는지를 몰랐다. 두 번째, 아르티스의 이름을 누르고 벨이 한 번 울렸을 때 다시 끊으려 했다. 말하지 않으면 아직 꿈일 수 있었으며 그녀의 잠을 깨우지 않아도 되었다. 세 번째, 벨이 두 번째 울리는 동안 서재의 그늘 속에서 내 가슴 안쪽의 천자 소리를 들으며 기다렸다. 마침내 아르티스가 받았다.
아르티스가 받자마자 말이 먼저 나왔다. 인사도, 준비도 없이.
"미안해. 이 시간에."
"괜찮아요." 아르티스의 목소리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지만 불평이 없었다. "무슨 일이에요?"
"이상한 것을 보았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전화기 너머로 아르티스가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스치는 작은 마찰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잔류기억이요?"
"아니. 다른 거야."
나는 본 것을 설명했다. 연구실. 팀원들의 표정. 마이클의 눈물. 그리고 미래의 날짜. 2043년 6월 17일. 말하는 동안 서재의 어둠이 조금 더 깊어진 것 같았다. 말이 어둠에 무게를 더해가며, 한 문장, 한 문장이 입 밖으로 나갈 때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늘어났다.
아르티스가 오래 침묵했다. 전화기 너머로 숨소리조차 사라져 서재의 벽시계 초침만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었다.
"IRIS가 꺼져 있었다고요? 카메라 입력도, 서버 잔류 데이터도 전달될 수 없는 상태에서."
"알아."
"당신의 뇌가 자체적으로 생성한 거예요."
"꿈이겠지."
"꿈이에요?"
이 질문이 나를 멈추게 했다.
"아마."
"'아마'예요?"
나는 정직해야 했다.
"아니, 꿈이 아니었어. 꿈과 다른 점이 있었어."
"어떤?"
"디테일. 꿈에서는 볼 수 없는 수준의 디테일이 있었어. 모니터의 모델명, 셔츠의 패턴, 날짜의 폰트. 그리고 감각.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어. 마이클이 우는 소리는 안 들렸지만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이 공기로 전달되었어. IRIS를 켜고 있을 때보다 비시각 감각이 더 선명했어."
"IRIS의 경험과 비슷해요?"
"... 비슷해. IRIS로 보는 것과 같은 질감이 있었어. 꿈의 질감이 아니라 IRIS의 질감."
아르티스가 다시 말을 멈추었다.
"한 가지 가설이 있어요."
"말해."
"IRIS가 7개월간 당신의 뇌에 시각 신호를 전달하면서 뇌의 이미지 생성 회로가 변했을 수 있어요. 이전에는 꿈을 만드는 데만 쓰이던 경로가 IRIS의 데이터를 처리하면서 확장되고 강화된 거예요. 이 강화된 경로가 IRIS 없이도 작동하기 시작한 거라면 —"
"뇌가 스스로 IRIS 수준의 이미지를 생성하고 있다?"
"네."
"하지만... 미래의 이미지를?"
"그건 모르겠어요."
아르티스가 '모르겠다'라고 말한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대체로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를 썼고, '모르겠다'는 답의 범주 자체가 보이지 않을 때에만 꺼내는 말이었다.
"달시, 하나만." 아르티스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낮아진 것이 아니라 좁아졌다. 말이 지나가는 통로가 좁아진 것처럼.
"이 현상이 멈출 수 있는 건가요?"
이 질문에는 가르침이 없었다. 방향도 없었다. 답을 아는 사람이 상대를 이끄는 질문이 아니라, 답을 모르는 두 사람이 같은 은어둠 속에서 서로의 윤곽을 더듬는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전화기를 잡은 손만 귀 옆에 붙어 있었고, 입은 열리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벽시계의 초침만이 그 적막의 길이를 재고 있었다.
"달시."
"응."
"이 현상이 예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예요."
"6월 17일을 기다리는 것."
"네."
"그때까지 뭘 해야 해?"
"기록하세요. 과학자니까. 관찰하고 기록하세요. 하지만 —"
"하지만?"
"해석하려 하지 마세요. 아직." 아르티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어투.
"해석하지 않으면 뭘 해?"
아르티스가 잠시 멈추었다. 그 잠깐 사이에 이 사람이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전화기 사이의 정적을 통해 내게 도달했다. 때론 말하지 않아도 닿는 것이 있었다.
"느끼세요."
느끼라는 것. 당장 분석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데이터를 데이터로 두지 않고 경험을 경험으로 두라는 것. 과학자에게 이보다 어려운 조언은 없었다. 별을 보는 것과 별의 파장을 측정하는 것 둘 다 하늘을 향한 행위이지만 같은 경험이 아니다. 나는 평생 측정하는 편에만 서 있었고, 그냥 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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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이 왔다. 캘리포니아의 공기가 건조해지면서 올리브 나무의 냄새가 진해졌고, 연구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각도가 한 뼘씩 높아지고 있었다. 계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가만히 침식되고 있었다. 과거의 이미지와 미래의 단편이 IRIS의 켜짐과 꺼짐에 상관없이 밀물처럼 왔다가 휩쓸려 나갔다. 그렇게 예고 없이 나의 의식을 침범하여 범람시키고 빠져나간 자리에는 전보다 조금씩 더 얇아진 내가 남았다. 나는 나를 잃어가고 있었다.
5월 12일 아침, 로비에서였다. 루이스가 평소와 같이 인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다른 것이 추가되었다.
"닥터 태드, 괜찮으십니까?"
내가 멈추었다. "왜?"
"아닙니다. 최근에 좀..." 루이스가 말을 멈추었다. 목소리의 끝이 평소와 달리 내려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루이스는 1년 넘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사람이다. 실명했을 때도, IRIS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톤으로 같은 인사만 했다. 그 일관성이 좌표였고, 그 좌표는 여태껏 흔들린 적이 없었다. 이 사람이 무언가를 물었다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피부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자 손이 먼저 움직여 아르티스의 이름을 눌렀다. 머리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벨이 울리는 동안 엘리베이터의 금속 벽이 등줄기를 통해 차갑게 전해졌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왜요?"
"... 산책. 오랜만에."
아르티스가 1초 침묵했다. "좋아요."
이 1초의 침묵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놀라움인지, 안도인지, 아니면 이 전화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 아르티스는 나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는 사람이었다. 목소리의 속도가 달라진 것을, 말 사이의 공백이 길어진 것을, 전화로도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좋아요"라고 말한 것은 산책에 대한 답이 아니었을 수 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것에 대한 답이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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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이전처럼 메시지가 아니라 직접.
"사고 당일 블랙박스 데이터를 복원했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려야 합니다."
나는 잔류기억의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유령들의 패턴을 쫓고 있었다. 봉투의 내용도 물론 알고 있었다. CORTEX 내부 시스템과의 기술적 서명 일치.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듣고 싶지 않았다. 진실은 내게 매섭게 달려와 손을 뻗고 있었고, 나는 가능한 그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내 안의 유령들로부터 도망치느라 나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이 거절할 수 없는 술래잡기에 지쳐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진실이.
"다음 달에."
쌀쌀맞은 답변에도 노라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서지 않고 문 앞에 서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사람은 기다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음 달이면 6월이군요."
"..."
"닥터 태드." 노라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지며 부드러워졌다. 위협이 아니라 양보였다. "지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압니다. 하지만 미루실수록 선택지가 줄어듭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 위의 잔류기억 로그를 보고 있었다. 아니, 보고 있는 척을 하고 있었다.
노라가 한 발 물러섰다. "일주일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때는 들으셔야 합니다."
문이 닫혔다. 노라의 구두 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나는 여전히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로그의 숫자들이 화면 위에 있었지만 읽히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미루는 것이 도피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유령들과 미래의 단편들과 약의 부작용과 잠들지 못하는 밤들 사이에서 진실까지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나의 삶 전체에 퍼진 균열로 내가 끝없이 새어 나가고 있었다.
"6월"이라는 단어가 뒤늦게 걸렸다. 다음 달이 6월. 미래 단편의 날짜가 6월 17일이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6월을 연결하지 못했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로 머릿속이 차 있어 나의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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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를 끄고 어둠에 누우면 단편들이 왔다. 잠의 문턱에서, 혹은 그보다 더 앞에서.
비 오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둠 속이었다. 빗방울이 얼굴에 닿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온도까지 느껴졌다. 어디인지 몰랐다. 하지만 무언가 평화로웠다.
아르티스의 손이 내 손 위에 있었다. 빛이 아니라 온기만 있는 장소에서.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맥박이 느껴졌다.
노라가 굳은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서류를 건냈다. 데이비온이 혼자 빈 사무실에 앉아 있었으며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책상 위의 물 잔에 파문이 일었다.
이 단편들이 미래인지 뇌의 시뮬레이션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IRIS에 의해 강화된 뇌가 과거의 기억 데이터를 재조합하여 극도로 생생한 시뮬레이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4월의 연구실 이미지가 떠올랐다. 2043년 6월 17일이라는 날짜. 만약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이 '만약' 앞에서 키보드 위의 손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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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아르티스와 만났다.
캠퍼스 벤치. 5월의 햇살이 나무 벤치 위에 내려앉아 표면을 데우고 있었고, 벤치에 앉으면 허벅지 아래로 그 열기가 천천히 올라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유칼립투스 냄새가 주차장 아스팔트의 열기와 섞여 왔다. 며칠 전 이 자리를 지나갈 때 주차장 위에 다른 것이 겹쳐 보였다. 과수원이었다.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고 가지에 열매가 달려 있었으며 풀이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이 캠퍼스가 과수원이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 기억은 3초 만에 사라졌고 이내 아스팔트가 돌아왔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장소를 택했다. 과수원이 다시 보이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지만 과거의 과수원은 보이지 않았으며, 그 대신 IRIS가 보여주는 것은 아스팔트의 균열과 그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주차선의 벗겨진 노란 페인트, 그리고 빈 주차 구역에 세워진 전기차 충전기의 금속 표면뿐이었다. 유령은 부를 때는 오지 않았고, 부르지 않아도 왔다.
"아르티스, 물어볼 게 있어."
"네."
"너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믿어?"
아르티스가 3초 침묵했다.
"'믿다'라는 단어의 정의에 따라 달라요."
"과학적 증거가 없는데도 존재를 인정하느냐는 뜻이야."
"그렇다면 네."
"예를 들어?"
"의식이요."
"의식?"
"의식은 과학으로 완전히 설명되지 않아요. 뉴런의 전기 신호가 왜 '느낌'을 만드는지. 이것은 2043년 현재도 설명되지 않아요."
"하지만 의식이 존재한다는 건 —"
"자명하죠. 내가 경험하고 있으니까."
"그래."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 의식이 그래요. 그리고 다른 것들도 그럴 수 있어요."
확신이 사라진 자리에는 다른 종류의 것이 자라고 있었다.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만 뿌리가 있는, 측정할 수 없지만 손끝에 닿는 종류의.
"아르티스, 나는 과학자야. 설명 불가능한 것을 '존재한다'라고 인정할 수 없어."
"그렇다면 달시가 겪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경험은 어떻게 설명해요?" 아르티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미묘하게 화가 서린 듯한 목소리로, 그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질문이 아니라 곁에 앉아 따지는 톤에 가까웠다.
"멈추지 않잖아요. 매일 오잖아요. 당신이 원하지 않아도."
이것이 핵심이었다. 설명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매일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보고 있었고, 미래의 단편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을 보고 있었고, 타인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경험들이 설명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모든 것들은 앞서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 모르겠어."
내가 말했다. 입 안이 건조했다.
이전의 '모르겠어'는 아직 답을 찾지 못한 것이었다. 이번의 '모르겠어'는 답의 종류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지도의 끝에 도달한 탐험가가 바다를 보고 있었다.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은 바다를.
"괜찮아요." 아르티스가 말했다.
이 '괜찮아요'를 그녀는 여러 번 말했다. 내가 IRIS를 결심했을 때, 설계에 몰두하던 늦은 밤 가운데, IRIS가 처음 켜지던 날에. 매번 같은 말이었지만 무게가 달랐다. 이번의 '괜찮아요'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내 곁에 앉는 소리였다. 아무 데도 가지 않겠다는.
"모르는 채로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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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연구실에서 IRIS의 로그를 정리하고 있었다. 잔류기억 현상과 미래 단편의 발생 패턴을 분석하면서. 문득 데이터를 보다가 멈추었다.
잔류기억의 빈도 그래프. 2월 5회, 3월 23회, 4월 41회, 5월 현재까지 38회. 하루에 한 번 이상 출근길에, 회의 중에, 잠들기 직전에, 아무 예고 없이 다른 사람의 생이 내 시야를 덮쳤다. 숫자로 보면 빈도였지만 몸으로 로 겪으면 매번 사고였다. 빈도는 증가하는 추세였지만 5월에 약간 감소했다. 최근에 증량한 아리피프라졸 덕분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38회도 충분히 많았기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화면의 수치를 노려보았다.
약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IRIS를 만든 사람이었다. 인간의 시각을 초월시킨 사람이었다. 내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내가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기술의 모든 회로를, 모든 알고리즘을, 모든 신경 경로를 설계한 것이 나였다. 만든 자가 멈출 수 없다면 누가 멈추겠는가.
사실 4월부터 이미 손을 대고 있었다. 약에 의존하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먼저 AI 변환 엔진에 필터를 걸었다. 잔류기억의 신경 서명을 패턴화 하여, 해당 서명이 감지되면 프로브의 자극을 자동으로 억제하는 프로토콜을 만들기 위해 제이슨과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작업했다. 알고리즘은 작동했다. 잔류기억의 빈도가 3일간 절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동시에 IRIS의 정상 시각도 흐려졌다. 잔류기억의 신호와 정상 시각 신호가 같은 고차시각피질 경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를 억제하면 다른 하나도 눌렸다. 필터의 정밀도를 올렸다. 95%까지. 그래도 시야 가장자리가 간헐적으로 어두워졌다.
다음으로 프로브의 자극 파라미터를 조정했다. V4와 V5의 자발 발화 역치를 높여 뇌가 스스로 이미지를 생성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게 만들었다. 이틀간 효과가 있었지만 3일째에 잔류기억이 다른 경로로, 더 강하게 돌아왔다. 프로브가 닿지 않는 측두엽 깊은 곳에서. 댐의 균열을 메우면 물이 다른 틈을 찾아내는 것처럼, 흐름을 막을수록 뇌는 더 깊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의식을 파고들어 나를 좌절시켰다. 내가 만든 도구로 내 뇌를 통제할 수 없었다. IRIS는 처음부터 문을 열기 위해 만든 것으로, 닫는 것은 설계하지 않았다. 빛을 되찾고, 더 많이 보고, 더 멀리 보기 위해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 확신과 오만이 닫아야 할 문 자체를 지워버린 것이었다.
결국 필터를 해제했다. 잔류기억이 돌아왔을 때 시야가 다시 선명해졌다. 유령들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세상이 보이는 것. 이것이 거래였다. 공정하다고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 단편의 빈도는 다른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4월 1회, 5월 현재까지 7회. 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데이터를 다시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패턴을 발견했다. 출처불명의 5건. 이전부터 걸리던 것이었다. 신호 인코딩이 다른 잔류기억과 달랐다. IRIS의 AI 변환 엔진이 생성하는 패턴에는 고유한 압축 서명이 있다. 기계가 남기는 지문 같은 것. 출처불명 5건에는 이 서명이 없었다. 마치 외부에서 직접 주입된 것처럼 깨끗하고 정제된 신호였다. 너무 깨끗했다. 꿈이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뇌가 스스로 만든 이미지에는 잡음이 있기 마련이다. 이 5건에는 잡음이 없었다. 누군가가 편집한 것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단순 장비 오류나 다른 경로를 사용하여 뇌가 자체 생성한 것일 수 있었다.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내 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출처를 내가 모른다는 것. 내 기억인지, IRIS의 잔류인지, 아니면 누군가 넣은 것인지. 나는 이 관찰을 기록하고, 별표를 붙이고, 넘어갔다. 넘어간 것이 아니라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과학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표시를 남기고 다음으로 가는 것뿐이었다.
또 잔류기억과 미래 단편이 동시에 나타나는 시점이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같은 순간에 겹치는 것.
4월 28일의 기록. 서재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형체. 아이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입모양이 보였지만 소리는 없었다. 대신 가슴 위쪽에 온기가 번졌다. 안에서 밖으로, 심장에서 쇄골까지, 천천히 퍼지는 종류의. 기억할 수 없는 나이의 기억인데 등에 손바닥의 압력이 느껴졌다. 작은 등을 감싸는 넓은 손. 뼈가 기억하는 것이 있었다. 뇌가 지운 것을 뼈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미래 단편이 같은 순간에 겹쳤다. 어머니의 이미지가 사라지기 전에 다른 이미지가 밀려들었다. 강가. 누군가의 손이 내 손 위에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물소리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물소리인지 맥박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체온과 강가의 온기가 서재의 어둠 속에서 하나의 온도로 녹았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의 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가슴이 물에 잠긴 것처럼 무겁고, 동시에 따뜻했다.
그 순간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가 여기에 있었고, 현재는 그 사이에서 결정되지 않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강물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것처럼, 표면에서는 하류로 가지만 깊은 곳에서는 되돌아오는 물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 물 안에 떠내려가면서 동시에 되돌아오고 있었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가.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노트북을 닫자 화면의 빛이 사라지고 서재가 한 겹 더 어두워졌다. 설명보다 다가온 어둠이 더 정직하게 느껴졌다.
데이터를 닫고 분석을 멈추고 설명을 시도하지 않았다.
아르티스가 말한 것을 해보려 했다. 해석 없이 느끼는 것.
서재에 앉아 IRIS를 끄고 어둠 속에 있었다. 시계의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먼저 돌아왔다. 다음은 의자 가죽이 체온을 머금고 있는 감촉.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5월 밤바람이 손등을 스치고, 그 바람 안에 잘린 풀과 먼 흙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분석하지 않았다. 초침의 주파수를 세지 않았고, 바람의 온도를 측정하지 않았다. 그저 앉아 있었다. 세상이 피부 위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과거의 유령들과 미래의 단편들, 그리고 현재의 나 사이.
나는 그 경계 위에 앉아 있었다.
의자 위에. 어둠 속에. 세상의 한가운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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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는 약속한 일주일 뒤에 오지 않았다. 이틀이 더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겼다. 이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3일째 되는 날 짧은 메시지가 왔다. "당분간 접촉을 자제합니다. 안전한 경로가 확보되면 연락하겠습니다."
"안전한 경로"라는 단어가 밟혔다. 보안 컨설턴트가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었다. 걱정해야만 했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잔류 기억의 필터링이 실패한 뒤 매일 밤 유령들은 나를 더 집요하게 괴롭혔고, 아리피프라졸의 용량은 올라갔지만 효과는 정체되어 있었으며, 불면에 양도한 밤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노라의 안전보다 내 안의 소음이 더 가까이 있어 이것이 이기심인지 생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아르티스가 느끼라고 했다.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느끼는 것이 내 안쪽으로만 향해 있어 그 외의 감각 수용체는 굳게 닫혀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노라의 침묵이 계속되던 어느 저녁, Aria가 알림을 전달했다.
노라 칼라일: "다음 주 월요일, 6월 16일에 만나야 합니다. 미룰 수 없는 내용입니다. 사고 관련입니다."
6월 16일. 미래의 단편에서 본 날짜는 6월 17일이었다.
하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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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는 경계가 있다. 관측 가능한 것과 관측 불가능한 것. 설명 가능한 것과 설명 불가능한 것. 그 사이에 그어진 선. 나는 평생 그 선의 이쪽에 서 있었다. 빛이 닿는 쪽에. 지금 나는 선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곳에서, 영원히 추방된 이방인처럼. 그리고 이 선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경계는 선이 아니라 영역이었다. 설명 가능한 것과 설명 불가능한 것 사이에 설명되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광활한 땅. 나는 그 위에 있었다.
서재의 어둠 속에서 창틀 너머로 올리브 나무의 냄새가 도착했다. 건조한 잎과 수액이 밤공기에 섞이는 냄새. 귀를 기울이면 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