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 한 칸의 무게

기억은 빈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리움1]

by 캔디의 여백

이 글은 흩어져 있던 글을 브런치북의 흐름 안으로 다시 데려온 재수록 글입니다.


명절 끝자락의 주차장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만큼 고요하다.
기억 속에 남은 주차장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그리움의 문을 열어 본다.

어린 시절에는 온몸으로 비를 맞고, 겨울엔 하늘을 보고 눈을 삼키며 그리움을 배웠다. 하지만 어느덧 일상의 중심이 되어 버린 자동차 때문일까, 주차장은 그리움의 일번지로 다가온다.

그곳이 어디였는지, 각자 어떤 사연이 깃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가슴 속에 '비어 있는 한 칸'쯤은 품고 살기 마련이니까.

월요일 저녁, 그곳을 잠시 지나쳤다.
익숙한 각도로 핸들을 꺾어 진입한 주차장. 그 사람의 빨간 차가 파수꾼처럼 서 있던 그 칸은 이제 차가운 아스팔트의 민낯을 드러낸 채 텅 비어 있다.

차 한 대 분량의 공간. 불과 몇 평 되지 않는 그 직사각형의 공터가 오늘 밤 나를 다시 기억의 심연으로 끌어당긴다.

그 사람의 차가 그곳을 지키고 있을 때는 몰랐다. 그 작은 차가 사실은 내 영혼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주던 견고한 요새였음을.

십 분의 찰나를 영원으로 빚어내던 그 작은 아지트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제 형체 없는 정적만이 겹겹이 쌓여 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득 차 있을 때보다 더 무거운 ‘부재의 질량’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나는 잠시 차를 세우고 그 빈자리를 응시한다.
가로등 불빛이 아스팔트 위에 묻은 낡은 기름때를 비춘다. 그 사람이 머물던 자리만 온기가 증발한 듯, 유독 서늘한 바람이 발목을 감고 돈다.

저 얼룩 어딘가에 함께 머물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함께 나누었던 낮은 목소리들, 잉크보다 진했던 침묵들, 서로의 안부를 묻던 짧은 찰나의 눈빛들. 그것들은 이제 주인을 잃은 채 이 빈터 위, 주차장을 유령처럼 배회한다.

세상은 이것을 상실이라 부르겠지만, 글을 쓰는 나는 이것을 ‘기억의 침전’이 주는 선물이라 부르기로 한다.

텅 빈 주차장 칸은 이제 나만의 원고지가 되어,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을 그려 넣고 우리만의 추억을 다시 세운다.

부재는 ‘만질 수 없는 실체’다.
차가 서 있을 때보다 비어 있는 지금, 그 자리는 더 선명하게 그 사람을 증언한다.

핸들을 잡았던 야윈 손등,
피곤에 지친 어깨,
그럼에도 나를 향해 지어 보이던 애틋한 미소까지.
그 모든 환영이 텅 빈 아스팔트 위에서 눈부시게 살아 움직인다.

나는 그 빈칸을 차마 밟지 못하고 비껴 지나간다.
기억의 입구를 함부로 침범할 수 없다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 여백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주차장을 빠져나온다.

내 뒤로 남겨진 텅 빈자리는 이제 슬픔의 장소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언제든 돌아와 만날 수 있는, 내 영혼 속에 깊이 새겨진 ‘찰나의 유적’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백미러 속에 멀어지는 주차장이 비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힘이 세다는 것.

그것이 오늘 저녁 주차장의 빈칸에서 길어 올린 가장 시린 철학이다.

그 사람은 거기 없으나, 그 사람의 부재는 그곳에 가장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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