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으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
이 글은 흩어져 있던 글을 브런치북의 흐름 안으로 다시 데려온 재수록 글입니다.
교회를 떠난 횟수를 헤아리다 보면, 신앙의 연수보다 내가 견뎌온 계절의 수가 먼저 떠오른다.
수십여 년, 나는 숱한 교회의 문턱을 밟았다. 언제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헌신했고, 언제나 같은 이유로 그 문을 나섰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헌신이 모자란 탓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마음을 내주었고, 너무 오래 머물렀기에 상처는 늘 골수까지 깊게 패였다.
사람이 그리워 찾아간 그곳에서, 나는 말씀보다 먼저 사람의 얼굴을 찾았고 기도보다 먼저 안부를 건넸다. 그 다정함이 곧 약점이 된다는 것을, 그곳에서 참 자주도 배워야 했다.
상처를 입고 돌아설 때마다 다짐했다. 이번엔 정말 끝이라고.
그러나 상처의 가에 굳은살이 돋을 즈음이면, 어김없이 교회가 그리워졌다. 그리움은 참 이상한 것이어서, 그곳에서 받은 아픔보다 잠시 누렸던 온기를 더 또렷하게 불러오곤 했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문을 열었고, 마지막이라는 결심을 다시금 속으로 삼켰다.
지금의 나는 또다시 교회에 가지 않는다. 기도를 멈춰서도,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마음이 많이 '해져' 있을 뿐이다.
요즘은 지친 마음에 발칙한 상상을 하곤 한다.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상상이다.
오직 '헌금'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면, 나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설 수 있지 않을까 꿈꾼다.
신앙보다 봉사, 성실함을 증명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는, 더 이상 다치지 않아도 되는 방식을 원한다.
나의 다정함이 누군가에게 더 이상 약점이 되지 않을 만큼,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싶다.
이 생각이 옳은지, 혹은 천박한 것인지 나는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이것이 상처 입은 신앙이 도달한 어느 '시린 지점'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안다.
교회는 여전히 그립다. 사람의 얼굴에 설레었다가 사람 때문에 멀어졌던 그곳. 그러나 지금의 그리움은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심이라기보다, 아직 완전히 떠나지 못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나는 오늘도 집에 남아, 불 꺼진 예배당을 마음으로만 지나간다.
문은 닫혀 있고 나는 두드리지 않는다. 다만 오래 서성였던 사람처럼 조용히 기억할 뿐이다.
언젠가 다시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이 그리움으로 신앙을 대신 살아가게 될까 고민한다.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떠났어도 그리움까지 버리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리움은 내가 아직 믿고 있다는, 가장 '서러운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