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상처보다 힘이 세다 [그리움 3]
이 그리움은 두 편으로 나누어 적어보려 합니다.
하나는 교회라는 자리에서, 다른 하나는 조금 더 넓은 보편의 언어로 쓰려 합니다.
내가 그리운 것은 교회라는 이름도 예배당도 아니다.
그 교회다웠던 시간이 그립다.
텅 빈 주차장 한 칸이 떠오른다.
누군가 늘 차를 세워두던 자리. 그 차가 사라진 날부터 그곳은 비어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 빈자리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 꽉 차 있는 것 같은 자리. 그리움은 늘 그렇게 텅 빈 자리에서 먼저 말을 건다.
내게도 그런 자리가 하나 있었다.
금요일 저녁의 예배당이다. 사람이 많지 않았고, 소수의 사람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누구의 시선도 오래 머물지 않는 그 자리에서, 나는 비로소 긴장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매주 그 의자에 앉아 내 지친 몸을 조용히 내려놓던 시간이 있었다.
금요일이 되면 마음이 먼저 그곳으로 움직인다. 발은 제자리에 멈춰 있는데, 마음은 혼자 그 시절의 공기 쪽으로 기운다.
예배 시작 전의 정적, 사람들이 모여들기 전의 빈 공간, 오래된 나무 의자의 서늘한 감촉. 몸이 마음보다 먼저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그 시절의 금요일은 내게 조금 특별했다.
찬양은 길었고, 기도는 자유로웠다.
성도도 많지 않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조용히 앉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자리, 예배가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드려지는 일로 남아 있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일예배보다 금요예배를 더 좋아했다. 한 주를 마감하는 그날의 공기가 좋았고, 그 시간에는 기도를 더 오래, 더 깊이 할 수 있었다. 상처가 가득한데도 여전히 그 시간이 그리운 이유는, 그곳에서는 적어도 편안히 숨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아지는 자리에서는 자꾸 숨이 막혔다. 그래서 더 조용한 시간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 바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상처를 받았고, 결국 나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리움은 남았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교회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교회다웠던 시간들이다. 그리고 그 많은 시간들 중 하나가 금요일의 공기다.
조용한 의자, 찬양이 끝난 뒤 남던 여백, 기도 후 아무 말 없이 돌아서던 발걸음. 그 안에서 분명히 숨 쉬고 있었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 공기가 남아 있다.
그리움은 상처를 향하지 않는다. 그리움은 숨을 향한다.
그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잊었다 싶으면 다시 떠올랐고, 마음을 열었다 싶으면 다시 닫아야 했다. 열고 닫기를 반복하는 동안 마음의 문은 점점 무거워졌다. 상처가 쌓일수록 그리움도 함께 깊어졌다.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다쳤으면 잊으면 될 것을, 왜 자꾸 그리워지는지.
수십 년을 지나며 알게 됐다. 그리움은 그 아픔 속에서도 내가 숨 쉬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불러주던 목소리.
같은 시간을 함께 버텨주던 사람들.
예배가 끝난 뒤 조용히 흩어지던 뒷모습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자리.
이름은 흐려졌어도 그 기억은 남아 있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은 결국 그 순간들이었다.
사람이 싫어진 것이 아니었다.
너무 많이 마음을 열었다가 깊이 다친 탓에,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먼저 닫혀버린 것이었다.
상처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었다. 상처는 사랑이 남긴 흔적이었다.
이제 나는 이 그리움을 다르게 읽기로 한다. 돌아가야 한다는 신호가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로 읽기로 한다. 이렇게 다치고도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내 마음이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마음 편히 예배드리고 사람들과 무탈하게 지내는 때에는 그 숨 막힘이 사라진다. 그래서 안다. 이것은 나의 고장이 아니라, 관계의 공기와 기억이 내 몸에 남긴 정직한 반응이라는 것을.
상태가 좋아지면 가라앉고, 상처가 닿으면 다시 올라온다.
그리움은 병이 아니다.
너무 많이 사랑했던 마음이 끝내 사라지지 않고 남긴, 가장 정직한 증거다.
목요일에는 [그리움 4] 「빈자리가 말을 건다」를 올립니다.
이 그리움을 조금 더 보편의 언어로 옮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