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안으로 자란다 [기다림2]
기다림은 꼭 누군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아닌 것 같다.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쉽게 끝내지 못하는 마음,
끝났다고 말하면서도 끝끝내 접히지 않는 마음.
어쩌면 그것도 기다림이다.
젊은 날의 기다림은 대개 바깥을 향해 있었다.
문자 한 통, 발소리 하나, 약속한 시간의 그림자 같은 것들.
그때의 기다림은 아파도 설렘이 먼저였다.
오지 않아도 올 것 같았고, 늦어도 결국은 닿을 것 같았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그 안에는 아직 환한 쪽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기다림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를 기다린다기보다, 내 안에서 끝나지 않은 어떤 것을 오래 붙들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하지 못한 말,
미처 풀지 못한 오해,
닿지 못한 진심,
끝내 다 이해되지 않았던 관계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마음은 거기서 완전히 나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다 끝난 일처럼 말하는데, 내 마음만 아직 그 앞에 서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문이 닫힌 것은 아는데, 이상하게 발은 그 앞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신앙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한때는 기도하면 금방 길이 열릴 것 같았다.
진심으로 매달리면 하나님이 바로 대답하실 것 같았다.
그런데 살다 보니 믿음은 늘 그렇게 환하게 오지 않았다.
기도는 오래 머물렀고, 대답은 더디거나 없었다.
기다림은 신앙의 언저리가 아니라,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어떤 날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마음조차 지친다.
이쯤이면 끝났다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기도는 끝까지 다 접히지 않는다.
더는 기대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나도 모르게 또 하늘 쪽을 올려다보게 된다.
그것이 믿음인지 미련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나는 그런 기다림을 많이 지나왔다.
기도해도 달라지지 않는 시간,
붙들어도 풀리지 않는 관계,
이해하려 해도 끝내 이해되지 않는 일들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겉으로는 잘 사는 사람처럼 보여도, 마음 한쪽에는 오래 닫히지 않는 문 하나가 늘 남아 있었다.
누가 다시 열어 주기를 바란다기보다, 왜 그 문이 생겼는지조차 끝내 다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기다림은 때로 참 외롭다.
이미 지난 일인데 나만 아직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 같고,
다들 잊은 일인데 내 안에서는 아직 조용히 끝나지 않은 것 같을 때가 있다.
머리는 이제 내려놓자고 하는데, 가슴은 아직 조금 더 있어 보자고 한다.
예전에는 그런 마음이 약한 줄 알았다.
빨리 접지 못해서, 빨리 잊지 못해서, 오래 붙들고 있어서 약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다.
기다림은 약한 마음이라기보다, 견디는 마음의 다른 이름에 가깝다.
금방 잊고, 금방 돌아서고, 금방 다른 것으로 갈아타는 것이 더 쉬운 세상에서
오래 한 자리에 마음을 두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든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완전히 닫혀 버리지 않으려고, 내 안의 마지막 불씨를 함부로 꺼뜨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시간에 더 가깝다.
기다리는 동안 사람은 많이 닳는다.
마음은 마르고, 자주 흔들리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정말 기다릴 만한 일이었는지, 내가 괜히 붙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이제는 놓아야 하는 것 아닌지.
그런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또 밀려간다.
그런데도 그 시간을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내가 정말 무엇을 소중히 여겼는지, 무엇을 끝내 놓지 못하는 사람인지, 어디에서 가장 깊이 아팠는지.
기다림은 감추고 있던 마음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좀 서늘하게 정직하다.
나이가 들수록 기다림은 더 조용해진다.
젊은 날처럼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데, 대신 더 깊어진다.
드러나지 않는데 오래 가고, 말하지 않는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이기도 하고, 한 시절을 기다리는 마음이기도 하고,
언젠가 내 안의 어떤 아픔이 다 이해되는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끝내 기다림은 하늘 쪽으로 기운다.
사람에게서 다 받지 못한 위로,
끝내 풀리지 않은 관계,
여기서는 다 닿지 못한 마음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제자리를 찾기를 바라는 마음.
이 땅에서는 끝끝내 해석되지 않았던 시간들이 그분 앞에서는 더 이상 억울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믿음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아직 다 오지 않은 것을 향해,
그래도 마음을 거두지 않는 일.
그래서 이제는 기다림을 그저 슬픈 일이라고만 말할 수가 없다.
너무 오래 지나와 버렸다.
너무 많이 닳아 봤고,
또 이상하게 그 시간 덕분에 버틴 날도 있었다.
기다림은 분명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 속에도 사람을 아주 무너지지 않게 붙드는 무엇이 있다.
끝났다고 다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다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사랑했던 것은 모양만 바꾼 채 오래 남았다.
기다리고 나서야 그런 것을 조금 알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다 알지는 못해도 마음은 안다.
그 기다림이 나를 자꾸 흔들면서도,
이상하게 또 여기까지 버티게 했다는 것을.
아직 떠나지 않은 마음이 있다면,
그건 아직 내 안에서 다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아마 그것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