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아이를 품다 #9

by 채온


지난해...

지난 주였는데,

벌써 지난해가 되어 버렸다.

시간의 개념이란,

때때로 사람을 참 우습게도 만들어 버린다.


12월 26일 저녁 6시, H는 P대학병원에 입원을 했다.

아프지도 않은 상태의 입원이라

겉모양새는 날라리 환자가 되어 버렸지만,

어찌 됐든 2박 3일 동안

H는 나름의 여러 검사과정을 거쳤다.


방광조영술로 방광모양을 검사하고,

신장으로 소변역류가 있는지 또한 살폈으며

혹 신장 손상이 있는지,

배변기능은 어떠한지 등등.

여러 검사를 통해서 아직까지 H에게는

의학적으로 문제시될만한

기능 손상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가장 힘든 검사는 역시나

요역동학검사였다.

H의 요도에 아주 작은 카테터를 밀어 넣고

방광으로 소변과 같은 물질을 넣어

그 용적과 크기를 검사하는 과정.

방광내압과 그 기능에 문제가 없는지

알아보는 검사이다.


성인은 1분이면 소변줄을 방광까지

밀어 넣는데 충분하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견디기

어려운 과정이다.


이제 27개월짜리 아이가

이걸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H는 관을 밀어 넣는 내내

발버둥을 쳤다.

아이였지만 반항하는 힘이

필사적이었기 때문에

검사하는 인턴 샘 외에도

간호사 두 명과

결국 나까지 붙어서

아이의 팔다리를 눌러야 했다.


나는 H의 무릎을 누른 채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비명과 함께

내 눈에서도 눈물이 줄줄줄 흘렀다.


무릎을 누르는 동안

온 힘을 쏟아붓느라,

또 아이의 간절한 애원과

울음소리를 외면하느라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땀에 흠뻑 젖어 기진맥진한 아이는

방광이 가득 차는 느낌에

소리를 질렀다.

소변을 누고 싶다는 아이에게

참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 엄마,

나를 불렀다.

그래, 그래,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우리 착한 아기. 괜찮아.

참을 수 있어. 응?

응. 조금만 참자. 응?


검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아이는 탈진해 버렸고,

어른들은 모두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엄마이기에 또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선생님에게

고생하셨다고,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곳이 얼마나 아픈지 H는

검사가 끝나서도 한동안

소변을 보지 않겠다고

떼를 쓰며 울었다.

얼마나 쓰라리고 따가울까.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서야

아이는 간신히 변기에 앉는다.

검사 시에 느꼈던 공포와

배뇨 시 느꼈던 통증이

아직도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나 보다.


가장 감사한 일은 H에게 아직까지

아무런 장애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


재활의학과 교수님은

앞으로가 문제라고 지적하셨다.

신경외과 교수님은 수술을 적극 권하셨다.


지금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척추 쪽의 신경.

수술 부위와 구체적인 설명을 듣고서

나는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물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교수님.


선생님 아들이라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는 담담히 나를 깊게 응시했다.

제 아들이라면 전 반드시 수술합니다.

나는 그의 눈빛을 믿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결국 수술에 동의하였다.

한 번이라도 칼을 대지 않는 것이

가장 원하는 일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일 것이라 믿는다.

S대 교수님의 의중은 문제가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보자는 것인데,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P대 교수님은 S대 교수님과

생각의 차이점을 설명하면서

내게 전적으로 선택을 맡겼다.

그렇다. 결국은 선택은 나의 몫이다.


H가 성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H는 엄마의 선택을 믿어줄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꼬박 한주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그리고 이제.

H는 수술날짜를 받아두고 기다리고 있다.


아이의 수술이 성공적이기만을 기도한다.

그리하여 H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무런 장애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어미의 바람이다.


새해에는...

새해에는 우리 아기

H에게 좋은 일이 있기만을 바란다.


2008. 1. 5.





2026. 2. 22.



이때가 요역동학검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적어도 2년에 한 번은

검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 첫 검사가

얼마나 호되고 끔찍했는지

H는 모든 검사를 다 받아도

이것만큼은 거부했다.


너무 어린 나이의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 준

검사였기 때문에

나는 아이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검사를 받지 않는 동안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더 신경 써서

아이의 소변줄기를 확인하고

소변 양을 체크했다.




병역판정검사를 받기 위해서

H가 스무 살이 되던 해, 겨울.


병무청에 제출할

H의 수술확인서와

병명진단서를 받기 위해

P대학 병원의 신경외과에 갔다.


진료실에 들어섰을 때,

교수님은 H와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나와 같이

세월의 장면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우리 이때 참 힘들지 않았나요.

그의 첫마디가 울컥하고 떨려 나왔다.

나 역시 지나간 시간에 눈물이 그렁해졌다.

그도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였다.


교수님이 말했다.

H야, 정말 건강하게 잘 컸구나.

너 이후에 수술한 아이들은

상태가 너만큼 좋은 애들이 없단다.

넌 정말 네 어머니에게 감사해야 해.

네 어머니가 그때 정말 고생하셨다.


H가 나를 돌아보며 두 눈 가득 웃어주었다.

나도 H를 웃으며 마주 보았다.

우리 세 사람은 먹먹하게 그렇게

옛이야기를 나누었다.


H는 어린 시절의 수술 때문에

4급 공익을 받았다.

예전에는 모두 면제였다.

그러나 H는 현역에 지원하여

지금 군생활 중이다.


우리는 진료실을 나오며 약속했다.

제대하면 다시 와서 인사드리자.

선생님 덕분에 건강하게 잘 자랐고,

의젓하게 군대도 잘 다녀왔노라고.








이전 08화병원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