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을 쓰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가면의 시간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by Rain

생 때도 이랬었나 싶다. 다 큰 직장인이 된 지금도 여러 인간 군상들로 피곤하다. 특히 파견 나와 근무 중인 이곳은 유독 심한데,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다양한 소속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업무 이해관계와 평가, 승진이라는 경쟁적 요인들이 뒤섞여 이 기묘하게 뒤틀린 공기를 만들어 냈다.

파견이 확정되기 전, 인사 담당자는 내게 구성원들의 반목과 그로 인한 업무적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실제로 파악해 보니, 이 사람은 저 사람과 사이가 안 좋고, 저 사람은 또 다른 누군가와 척을 지고 있다. 은밀한 기싸움이 아니라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다. 사무실 자리 배치 하나에 신경이 곤두서고, 편하게 밥을 먹어야 할 식당에서조차 옆자리에 누가 앉을지 검열해야 하는 일상.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드라마 제목이 떠오른다. 이렇게 정년까지 일하게 된다면 정말 그럴 것 같다. 이 공간에서 타인은 이해의 대상이 아닌, 피해야 할 장애물에 가깝다. 인간관계의 도표를 수시로 업데이트하며 업무의 관계를 조절하는 일. 이 비본질적인 노동에 에네르기를 쏟아야 한다는 사실이 실로 소모적이다. 상대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라도 낮으면 타이르기라도 하겠는데, 다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으니 그저 침묵으로 견디는 도리밖에 없다.


머릿속에 그려둔 복잡한 관계의 도표를 컴퓨터 모니터와 함께 꺼버리고 퇴근길에 오른다. 한강을 지나며 차창에 비친 내 얼굴도 낮 동안의 피로로 적당히 구겨져 있다. 하지만 집 현관문에 들어서는 순간, 한 명씩 교대로 안아주며 반기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아내의 평온한 목소리가 들리며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밖에서의 불행은 매일 새로운 이유로 우리를 괴롭히지만, 집 안의 행복은 늘 어제와 같은 온도로 우리를 기다린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렇게 날 선 사람들도 퇴근 후엔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겠지? 영화 《완벽한 타인》의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 '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하나, 사적인 하나, 그리고 비밀의 하나'처럼 말이다. 그들도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누군가의 다정한 남편이자 인자한 아버지로 변모할까. 낮 동안 날 선 화살을 주고받던 그 입술로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 옹졸하게 내뱉던 말들을 거두어 사랑을 고백할까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어쩌면 인간이란 본디 수만 개의 얼굴을 가진 존재여서, 이 좁은 사무실 안에서만 유독 가장 날카로운 조각을 꺼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밖에서는 나이와 직급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입고 전전긍긍하지만, 가정에서 그들은 그저 '아빠'이자 '남편'이라는 가장 가벼운 이름으로 존재할 것이다. 낮의 반목과 질시가 아무리 거셌던들, 사랑하는 이들과 마주 앉아 나누는 저녁 한 끼의 온기보다 강할 순 없겠지.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라고 하였다. 그들 각자와 대화를 나눠 보면 또 가정에는 충실하게 다정하였다. 그 엇비슷하고 다정한 평온함이, 내일 다시 그 유치한 전쟁터로 걸어 들어갈 용기를 줄 것이다.


나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글들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아이들보다 미숙할 때가 많은 '덜' 어른이다. 다만 이곳에서 철저한 외부인으로 기한이 정해져 있는 파견 기간 동안이라도, 소모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목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을 뿐이다.


그 목적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이 관계의 도표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선명한 일, 즉 '나부터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날 선 말들이 오가는 회의실에서 나를 먼저 낮추는 말들로 화를 흘려보내고,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곳에서 서로를 더 세워주고 마음을 여유롭게 만드는 일. 어쩌면 그들이 가진 날카로운 조각들은, 본인의 연약함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껴입은 서툰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는 연민이 든다.


파견 기간이라는 유한함은 내게 역설적인 여유를 선물한다. 어차피 떠날 사람이라는 위치는, 관계의 이해득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 타인을 객관적으로, 때로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관중석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남은 시간 동안 그들의 뾰족한 모서리에 부딪혀 상처 입기보다, 그 모서리를 조금이라도 둥글게 매만질 수 있는 한 줌의 온기가 되고 싶다.


거창한 화해나 드라마틱한 관계 개선의 해피 엔딩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업무적인 대화 끝에 덧붙이는 짧은 안부나, 탕비실에서 마주쳤을 대 건네는 먼저 내린 따뜻한 커피 한 잔이면 충분하다. 내가 집에서 충전해 온 그 엇비슷하고 평범한 행복의 에너지를, 이곳의 메마른 공기 속에 아주 조금씩만 흘려 보내려 한다.


언젠가 파견 기간이 끝나고 이곳을 떠날 때, "그 사람이 있을 때는 그래도 공기가 조금은 덜 차가웠지"라는 희미한 기억 하나 남기고 떠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어른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아이 같은 외로움들을 배려하며, 나는 내일도 머릿속 도표 대신 내 마음속의 온도를 먼저 체크할 것이다. 미숙한 어른인 내가, 더 미숙하게 아파하는 이들에게 건넬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결국 다정한 배려뿐임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나는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담백하게 버텨내고, 다시 내가 사랑하는 세계로 무사히 돌아갈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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