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죽음이 조금은 아쉬운 일이 되도록

죽음이라는 진리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by Rain

을 나서는 새벽, 출근 시간은 변함이 없지만 '봄'이라는 화사한 손님이 내 앞으로 훌쩍 다가온 덕에 요즘의 발걸음은 짐짓 경쾌하다. 별을 보며 집을 나설 때는 지금이 새벽인지 밤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다. 하지만 이제는 환하게 밝은 빛 속에서 출근하며 타인들과의 기분 좋은 동질감을 맛본다. 무엇보다 길가에 아름드리 만개한 벚꽃들이 양옆에서 박수를 쳐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들뜬다.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 모두 열렬한 응원을 받는 기분이다.


하지만 오늘 아쉽게도 봄비 예보가 있다. 팝콘처럼 폭신하고 화사한 이 눈꽃송이들의 응원을 즐길 수 있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문득, 이 꽃의 피고 짐이 인간의 생애와 지독히 닮아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사납게 파고드는 웅숭깊은 통찰이 담긴 레프 톨스토이의 고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꺼내 읽었다.


예전에 《장례희망》이라는 책을 읽으며 삶의 의미를 반추했던 적이 있다. 깊어지는 부모님의 주름, 젊은 시절과는 달리 좁아지는 생각의 폭과 잦아지는 실수를 지켜보는 일은 못내 서글프다. 내게 부모님이란 존재는 그분들이 계시지 않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 필연적인 이별이 찾아왔을 때, 나는 과연 지금처럼 꿋꿋이 일상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예감이 나를 엄습하곤 한다. 이번에는 타인의 죽음이 아닌, 오로지 '나의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고 싶어 질병 서사의 정점인 이 책을 택했다. 최근 몇 번의 장례를 치르며 유무형의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 그것은 내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살아있고, 이렇게 문장을 켜켜이 얹고 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라고 적었다. 악인의 잘 된 죽음이 아닌 이상 환희까지야 아니겠지만,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비겁한 안도감 정도는 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목표를 위해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질주하다 병을 얻어 떠난 동료의 장례. 그 비보 앞에서 우리는 '이제라도 내 몸을 돌봐야겠다'는 이기적이고도 절박한 깨달음을 얻는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타인의 부지불식간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곁에 있는 이들을 좀 더 살갑게 대하고 다정한 기억 하나라도 더 보태야겠다는 숙제를 남긴다. 하지만 정작 '나의 죽음'은 내게 그 어떤 깨달음도, 후회도 남길 기회를 주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 생의 무대 위에서 나는 이미 퇴장하고 없기 때문이다. 사후의 세계가 천국일지 지옥일지, 혹은 그저 무(無)의 상태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신앙인으로서 사후 세계를 믿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이 실재한다고 증명할 길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죽음 이후는 철저히 죽은 자들의 영역이며, 살아있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일 뿐이다.


성공한 외형의 삶을 살았던 이반 일리치는 고백한다. 업무상의 기쁨은 자존심의 충족이었고, 사회생활의 기쁨은 허영심의 발로였다고.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소소한 즐거움을 주는 취미도 가졌으며 무엇보다 굴곡이 있었지만 승승장구했다. 나는 그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세간에서 말하는 '성공한 인생'의 업적을 남기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언제 죽든 많은 이의 아쉬움 속에 생을 마감할 일은 없을지 모른다. 다만 가족에게만은 예외이고 싶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이조차도 내가 건강하게 제 몫을 해낼 때의 이야기다. 육체와 정신이 온전치 못해 지출되는 비용이 커진다면, 근근이 이어가는 생이 오히려 민망해질 것 같다. 예전 어른들이 타인의 죽음 앞에서 얼마나 오래 누워 돈을 쓰고 갔는지를 계산하는 대화들이 못내 불편했으나, 이제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연명 치료 거부를 결정하신 부모님이 너무 멀리 있는 일을 굳이 끄집어 내 앞으로 가지고 온 것 같아 서운했지만 그 결단조차 결국 나를 위한 배려였음을 깨닫는 이제 '어른의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죽음에 대한 몇 가지 태도를 정해 본다. 첫째, 건강하게 살다가 오래 아프지 않고 빠르게 죽어야 한다. 그것이 품위 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품위 있게 떠나기 위해 부단히 운동하고 정기적으로 검진하며 내 몸을 돌볼 것. 의미 없는 연명 치료로 남은 이들의 정신적인 그리고 재정적인 희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만은 사양하고 싶다. 다만, 장기 기증이나 의료 발전을 위한 시신 기증까지 결심하기엔 나는 아직 겁이 많다. 숭고한 희생보다는 내 몸 하나 온전히 보존하고 싶은 이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두려움을 굳이 포장하고 싶지 않다. 고작 이 정도 깊이의 '덜 된 어른'일뿐이다. 죽음 앞에서조차 완벽할 필요는 없으니까. 둘째, 지금보다 조금 더 '열심히 다정할 것'. 내 죽음이 너무 담백하게 잊히는 건 나 역시 아쉬우니, 차라리 '오지랖'이라 불릴 만큼의 일들을 좀 더 해야겠다. 감성 아재라 놀려도 좀 더 오글거리는 용기를 주는 말을 하고 온기 있는 문장을 남기고 싶다. 아내는 더 많이 안아주고, 사춘기 딸들은 조금 덜 안아주며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다정함을 실천하려 한다. 여전히 죄짓는 것을 경계하며 귀찮아도 주위를 돌아보고 나누기 위해 애써야겠다. 이반 일리치의 하인 게라심의 말처럼, 어차피 우리 모두 죽을 운명이라면 서로를 위해 기꺼이 수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서늘한 빛을 보았다. 모든 것이 한결같다는. 산을 오른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줄곧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는 깨달음.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단발마의 고통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산 아래를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산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보다, 무릎의 통증을 견디며 안전하게 내려가는 하산이 더 중요하고 힘든 과정임을 올라 본 사람들은 안다. 삶을 잘 꾸려가는 것만큼이나, 생을 잘 매듭짓는 '품위 있는 하산'이 중요한 이유다. 키제베터의 삼단논법 ('카이사르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은 늘 남의 일처럼만 들렸다. 그 명제가 이반 일리치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끝내 외면하며 산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우리는 그 화살이 적어도 '지금의 나'는 비껴갈 것이라 믿으며 하루를 그저 하루로 버틴다. 오늘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떨어질 벚꽃 잎은 제 운명을 예감했을까. 그 말갛던 찬란함이 오늘로 다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여기서 나는 마지막 결론에 닿는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소중하고 충실하게 살아낼 것. 여기서 말하는 '충실함'이란 결코 거창한 성취나 애면글면 고된 수고만을 뜻하지 않는다. 휴식과 사랑, 우정과 취미, 그리고 사소한 다정함처럼 덜 수고로운 일들조차 뜨겁게 애정하는 태도다. 내일의 보장 따위는 접어두고, 오직 오늘만 허락된 이 생의 감각들을 더 깊이 사랑하자. 오늘이 정말 마지막인 것처럼.


배우 조현철이 건넨 시상식 소감은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교정해 주었다. 그는 투병 중인 아버지를 향해 죽음이란 그저 '존재 양식의 변화'일뿐이라고, 그러니 겁내지 말라고 담담히 위로를 건넸다. "이 소란스러운 일들 잘 정리하고 가겠다"는 그 짧은 문장은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무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실제로 천국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있음'이 '없음'으로 치환되는 무(無)의 상태일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죽음을 경험해 본 산 자도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각자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에 기대어 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비에 젖어 떨어지는 벚꽃 잎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가장 화려한 순간에 행하는 존재 양식의 변화이다. 꽃잎이 진 자리에 초록의 생명이 돋아나듯, 나의 생의 마지막 또한 누군가에게 다정한 기억의 싹이 되기를 소망한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나는 오늘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수고하며 이 찬란한 하산의 길을 나의 속도로 걷기로 한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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