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유통, 독자…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작가가 필요하다!
올해 초 한국소설 순위에 돌풍이 일었다. 김동식 소설집 『회색인간』이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이다. 작가는 주물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온라인 사이트인 ‘오늘의 유머’ 공포게시판에 반전이 가득한 초단편 소설을 꾸준히 올려 인기를 끌어왔다. 정식으로 소설 공부를 해본 적이 한 차례도 없었지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배우고 댓글을 통한 독자들의 비판과 격려를 통해 요령을 익혀 소설가의 길로 들어섰다.
교과서 수록 작품 말고는 문학작품을 전혀 접하지 못했던 작가가 온라인 부족 공동체 내부에서 소설을 읽고, 자신도 쓰고 싶다는 갈망을 일으켜 작품을 창작하고, 동료의 댓글을 통해 성장한 끝에 마침내 작가로 데뷔하는 소설의 생산-소비 구조에 일종의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하루에 수천 편씩 소설 작품이 올라오는 웹소설 사이트에서도 분명히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동식의 경우, 아직 미숙한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조회 숫자를 노리는 상업주의에 매몰되는 대신 특유의 유머와 기발한 반전을 통해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정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특한 주목을 받았다.
초연결사회를 맞이해 콘텐츠 소비 패턴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남에 따라, 『회색인간』의 경우처럼, 전 세계적으로 초단편 작품들이 이야기산업의 주목을 받고 있다.
종이에 비해 현저히 낮은 해상도, 이야기의 전체성을 좇기에는 좁은 화면 크기 등으로 인해 모바일 기기는 눈이 쉽게 피로해지는 단점이 있어 프린트 미디어에 최적화된 상태로 발전해 온 기존의 장편소설 등을 읽기에 썩 적합하지 않다.
또 언제 어디에서나 콘텐츠에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모바일 기기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이 짬짬이 시간이 날 때마다 즐길 거리를 주로 찾는다. 이에 발 맞추어, 장편소설은 적절한 분량으로 쪼개져 연재 형태로 소비되는 중이며, 예전에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던 초단편소설이 침체에 빠진 한국문학의 새로운 활로로 각광을 받는 중이다.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으면서도 삶의 놀라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이다.
아마존 등 해외에서도 전자책 시장을 중심으로 해서, 모바일 기기에서 보기 좋고, 그때그때 빨리 읽고 빨리 소비할 수 있는 초단편 작품들이 유행 중이다.
이에 따라 출판계 움직임도 가팔라지고 있다. 성석제, 손보미, 장강명, 조남주, 천명관 등 인기 작가들이 네이버 ‘3분 초단편’에 작품을 발표했고, 다음카카오에서는 상금을 걸고 초단편소설 백일장을 개최하기도 했다. 마음산책은 김금희, 김숨, 이기호, 이승우, 정이현 등의 초단편 소설에 아름다운 그림을 덧붙인 ‘마음산책 짧은 소설’ 시리즈를 선보여 인기를 끄는 중이며, 신생 문학출판사 걷는사람은 백가흠, 백민석, 이제하, 최정화, 한창훈 등의 초단편소설을 하나로 묶은 앤솔러지 ‘짧아도 괜찮아’ 시리즈를 펴내서 독자들 사랑을 한껏 받았다.
요즈음 초단편소설의 잠재력에 주목한 출판사들이 작가들과 잇따라 출판 계약에 나서고 있기에, 시간이 흐르면 좀 더 독특한 스타일의 작품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측된다.
소설의 역사를 살펴볼 때, 초단편은 아주 낯선 형식은 아니다. 1970년대 이후 사보와 잡지의 융성에 따라 생산 및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다가 1990년대 후반에 절정에 이르렀다. 한때는 해마다 2만여 편가량 작품이 생산되고, 이들을 묶은 단행본 서적이 120~130권이나 출판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사보가 잇따라 폐간되거나 웹진으로 옮겨가면서 생산이 급속히 줄어서 얼마 전까지 사실상 존재감조차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초단편은 아이러니나 풍자 등을 담은 하나의 에피소드로 독자에게 일회성 즐거움을 제공하는 짤막한 이야기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이 장르는 콩트, 장편소설(掌篇小說), 손바닥소설, 엽편소설, 단형 서사 등 갖은 이름으로 불리면서 오랫동안 숨을 이어왔다.
초단편이라는 말이 쓰인 것도 최신의 일이며, 플래시 소설, 미니픽션 등으로 호명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이 장르의 정체성이 아직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생산은 무척이나 많이 되지만 독자적 미학의 성립, 즉 반드시 이 길이로만 표현할 수 있는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무엇보다 초단편의 가장 큰 특징은 ‘기발함’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곡된 인생의 순간적 단면을 포착해 비판정신을 갖춘 예리한 시선으로 절개한 후, 이를 반어적 또는 해학적으로 접붙여서 독자를 놀라게 하는 기법을 주로 쓴다.
초단편 대부분은 인생의 한 순간을 보여주되 이야기의 필연성과 통일성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시와 구분되며,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에 독자가 전혀 예상치 못하는 반전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에세이와 분별된다. 물론 삶의 진실에 대한 따뜻한 성찰을 보여주는 에세이 형태의 작품도 있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미학성이 많이 떨어진다.
모파상, 카프카, 보르헤스 등의 초단편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인생의 깊은 진실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하기도 하지만, 200자 원고지 20매 내외로 완결되는 이야기의 짤막한 길이 탓에 사유의 깊이나 복합적 감성에 도달하지 못한 채 쓴웃음이나 놀람 등 표피적 감수성을 건드리는 데 경우가 많다. 우연히 한 작품을 마주하거나 몇 작품 정도 읽을 때에는 상관없지만, 연속해서 여러 작품을 읽는 경우에는 비슷한 인식론적 충격의 반복 때문에 아주 쉽게 지루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초단편소설이 ‘일시적 유행’에 그칠 뿐, 높은 미학적 수준을 갖춘 장르로 발돋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만 생각해선 곤란하다. 『어우야담』 같은 야담집이 보여주듯, 구술문학 시대의 이야기는 대부분 짤막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해야 하는 장르 특성상, 기억의 한계로 인해 일정한 길이 이상으로 작품이 길어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야담은 풍자, 골계 등과 같은 이야기 미학을 갖추는 형태로 발달함과 동시에 누구나 참여하고 소비하는 다중의 문학 장르로도 발전해 갔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길고 정교한 이야기를 미학적으로 구축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없지만, 자신이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발한 사건들을 짧은 글 속에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참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바이트 같은 모바일 사이트가 등장하고, 문학 자판기 같은 사업체가 들어서는 것은, 이 장르의 잠재력이 만만치 않다는 증거다.
또한 앞에서도 말했지만, 초단편소설은 짬짬이 소비에 길들여진 독자한테 문학적 읽기 습관을 길러 주는 새로운 통로로 기능할 수 있다. 초단편소설을 즐기는 새로운 독자층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이들을 다양한 소설 장르로 연결해 주는 간이역 역할을 할 가망성이 높다. 초단편소설은 시와 함께 문학 장르 중에서는 초연결사회에 가장 적합한 형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특한 형태의 문학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독자한테 가 닿을 통로가 있으며, 읽는 독자들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이 장르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을 주체는 어디까지나 작가다. 초단편소설에는 지금, 한국의 레이먼드 카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