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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Apr 03. 2022

20. 이제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을 뿐이다.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를 만지고 싶었을 뿐이다……. 이건 누군가를 사랑하면 당연히 하고 싶은 것들이다. 그런데 그녀가 단지 열두 살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어쨌든 나는 끌려가고 있다. 주위엔 부서진 돌과 모래만이 가득하다. 황량한 벌판이다. 나는 사형당할 것이다.

  수갑에 묶인 손을 양옆으로 힘껏 당겨본다. 꿈쩍도 안 한다. 이것만 아니면 이 새끼들을 단번에 때려눕힐 수 있을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이를테면 똥이 마렵다고 하는 것이다. 사형수에게도 똥 쌀 권리는 있을 테니까. 그럼 이들은 어떻게 할지 논의하다 세 명 중 한 명이 감시하기로 결정하고 나를 어디론가 데리고 가겠지. 예를 들어 저쪽에 있는 바위 뒤편이라든가. 수갑을 찬 채로 바지를 내릴 순 없으니 도와달라 해야겠지. 녀석이 내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바지를 내리는 순간, 무릎으로 있는 힘껏 얼굴을 뭉개버리는 거다. 녀석은 나자빠질 테고 그럼 얼굴을 마구 밟는다. 정신을 잃을 때까지. 열쇠를 가지고 있을 확률은 1/3. 없을 확률이 두 배지만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100의 확률로 죽는 것보단 나으니까.

  “부탁이 있어.”

  내가 말한다. 순간 모두 걸음을 멈춘다. 앞에 있는 녀석이 뒤를 돌아본다.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똥이 마려워.”

  녀석은 내 뒤에 있는 녀석 둘과 눈빛을 교환한다. 그러더니 약속이라고 한 듯 폭소하기 시작한다.

  “똥 마렵다는 게 웃기는 일이야?”

  녀석은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웃는다. 이윽고 웃음이 그친다.

  “곧 뒤질 놈이 똥은 무슨 똥이야. 어차피 뒤지면 알아서 쏟아질 텐데.”

  말하더니 다시 웃는다.

  “곧 죽을 사람에게도 똥 쌀 권리는 있잖아?”

  내가 말한다. 뒤에서 누가 내 머리를 내려친다. 나는 휘청거린다.

  “범죄자 새끼가 어디서 권리를 운운해. 똥을 처먹여버릴까 보다.”

  앞에 있는 녀석은 다시 몸을 돌리고 쇠줄을 끈다. 나는 다시 걷는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나는 어디서 죽을까? 그때까지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곳을 지난 수많은 사람 중 몇 명이나 살았을까? 예전에 사형장으로 가던 중 죄수가 탈출했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 내가 여섯 살 때였다. 엄마는 나를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때 엄마는 젊었고 아직 살아있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두고 가니? 엄마는 나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려던 게 아니다……. 나에겐 시간이 없다. 그를 생각해야 한다. 그는 어떻게 탈출했을까? 어떤 방법을 썼을까?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죽을 때도 여전히 젊었다.

  그녀가 떠오른다. 그녀는 지금쯤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아저씨가 좋아요. 그녀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그녀가 ‘사랑한다’는 표현을 알았다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는 내 머릿결을 쓰다듬었고 검지로 내 코를 눌렀다. 내 속눈썹에 묻은 눈곱을 떼주고 오른쪽 볼 사마귀에 난 털을 뽑아줬다. 그건 사랑해야지만 할 수 있는 행위다.

  나는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다. 착각하고 있는 건 나보고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 사람들이다. 특히 그녀의 부모다. 그들이 치안판사에게 고발하지만 않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도덕이라는 미명 아래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그녀가 네댓 살만 더 많았더라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근데 그깟 몇 년이 뭐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억울하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 멍청이들한테는 아무리 말해봤자 못 알아먹는다.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는 대가리 없는 새끼들. 나를 이해해줄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한 명쯤은 존재할 텐데. 그가 있다면 말하고 싶다. 도덕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랑이 더 본질적인 게 아닌가요? 나이라는 건 도대체 누가 만든 건데요? 아, 그리고 사실 저는 그 애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 귀 아프게 떠들어대는 도덕이라는 이름을 걸고 얘기해봐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말입니다. 제 건 그 애한테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앞에 걷는 녀석이 멈춘다. 소매로 이마에 난 땀을 닦는다. 뒤를 돌아 나머지 둘은 바라본다.

  “좀 쉬다 가지.”

  앞 녀석은 쇠사슬이 연결된 손잡이를 바닥에 툭 내려놓는다. 그러더니 허리춤에 찬 총을 꺼내 든다. 그리고 나에게 겨눈다.

  “토끼면 바로 뒤통수에 꽂는다.”

  녀석은 한번씩 웃더니 총을 거둔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 문다. 나는 주먹을 쥔다. 지가 안전한 거 알고 깝죽대는 꼴 좀 봐라. 제가 이래서 인간이 싫어요. 모든 인간은 아니지만, 아니 엄마와 그녀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인간이라고 해야겠군요. 아, 당신도 빼야겠군요. 저 역겨운 꼴을 좀 보세요. 이 수갑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제 앞에서 발발 기었을 겁니다. 제가 이래서 법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을 싫어하는 겁니다. 그걸 믿고 까부는 녀석들이 너무 많다 이거예요. 당신이 정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면 제 말을 들어줬을 텐데, 그리고 이해해줬을 텐데.

  그러고 보면 나를 바로 죽이지 않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그냥 마빡에   박아버리면 끝날 일을 굳이   데까지 데리고 와서 ‘사형 ‘집행하는  뭐람. 이런 절차나 의식 같은 것이  역겹다. 이렇게 생각하니 치안판사 놈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피고와 피고의 행위는 마을의 안전은 물론 향후 자라나거나 태어날 아이의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있어서도 굉장한 악영향을 끼칠 용의가 농후하다. 그러므로  법관은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궁금한  있어. 바른 가치관이라는  도대체 뭐야? 그걸 누가 만들고 누가 인정하는 거야? 나는 나를 알지도 못하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들 때문에 죽는 거야?

  그녀는 분명 자신은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가 아직 사리분별을 하기에 이른 나이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진짜 지랄 좀 그만하라고 해라. 그녀가 괜찮다는데 당신들이 뭔데 난리야? 당신들은 그녀가 괜찮아도 괜찮지 않기를 바라는 거 아냐? 그래야만 당신들이 말하는 도덕이 흐트러지지 않으니까. 법과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녀가 커서도 괜찮다고 말한다면, 사리분별을 하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 때가 돼서도 괜찮다고 말한다면 그때는 뭐라 할 수 있겠어?

  “하나 빨래?”

  앞 녀석이 내게 다가와 말한다.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 내 앞에서 흔들거린다. 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진짜야. 이 정도 친절은 있다고.”

  나는 그를 계속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내 입술에 물어주려는 순간, 반대 손으로 내 얼굴을 후려친다.

  “개새끼야.”

  내가 소리친다. 녀석은 뒤로 넘어갈 듯이 웃는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간다.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수치심이 차오른다. 이런 채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더욱 견딜 수가 없다. 이들의 짓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이건 범죄가 아닌가? 나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사형을 당해야 하고 이들은 이렇게 피해를 주는 데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순이다.

  그들은 담배를 마저 피고 대형을 갖춘다. 그리고 다시 출발한다.

  그녀가 괜찮다고가 아닌,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좋다고 말했으면 지금과는 달랐을까? 아니면 같았을까? 그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을까? 그건 진짜 좋음이 아니야. 너는 아직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판단할 수 없단다. 네가 큰다면 그게 아주 나쁜 것이었음을 깨달을 거야.

  부디 그 말에 속지 말아줘. 네가 컸을 때 나는 이미 이 세상에 없겠지만 그러니 부디 속지 말아줘. 네가 느꼈던 마음을 다른 무언가에 왜곡시키지 말아줘. 네가 날 사랑했고 내가 널 사랑했다는 걸 잊지 말아줘. 그거면 된 거야. 그럼 난 편히 죽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저 멀리, 무언가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구조물이. 계속 걸어가자 서서히 윤곽이 잡힌다. 교수형대다. 벌판 한가운데 교수형대가 놓여있다. 양쪽 기둥으로 받친 보 중앙에 밧줄이 달려 있다. 그 밑에 판자가 있고 그 앞에는 나무 계단이 있다. 앞 녀석은 걸음을 멈춘다. 뒤돌아 뒷 녀석들과 눈빛을 교환한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밧줄을 붙잡고 아래로 당겨본다. 그러더니 밧줄을 붙잡고 매달린다. 잠시 뒤 땅에 내려온다.

  “튼튼하군.”

  뒷 녀석 중 하나가 막대기로 나를 찌른다. 나는 앞으로 걸어간다. 계단을 오른다. 밧줄 앞에 선다. 앞 녀석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보자기다. 그것을 내 머리에 씌운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소매 사이사이로 배경이 보인다. 밧줄이 내 머리를 스치고 이내 내 목을 감싼다. 이제 준비는 끝난 것이다.

  교수형대는 얼마나 오래 썼을까? 어쩌면 보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보가 부러지면 고쳐야겠지. 그동안은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절차와 의식을 그렇게 신경 쓰는 녀석들이니 나를 쉽게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시간을 벌 수 있다. 시간이 생긴다는 건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보가 부러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순간 바닥이 꺼진다. 까치발을 들지만 밑엔 아무것도 없다. 나는 허공에서 바둥거린다. 있는 힘껏 몸부림친다. 목이 막힌다. 사람이 죽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엄마, 저는 아직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엄마가 아직 살아계신다면, 그래서 이 모든 상황을 모두 봤다면 제게 뭐라 말했을까요? 저는 사람들이 싫어요. 왜냐면 사람들이 저를 싫어하니까요. 근데 그 아이는 제게 잘해줬어요. 그래서 저도 잘해줬을 뿐이에요. 그게 죄인가요? 단지 그들이 저를 싫어하기 때문에 죄라고 여긴 건 아닐까요? 이제 곧 엄마를 만날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만나고 싶지 않아요. 만나고 싶은데 만나고 싶지 않아요. 왜 그런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가. 보자기 사이사이로 보이는 벌판 저 멀리서 무언가가 이쪽으로 매섭게 달려오고 있다. 검고 노란 무언가. 거대한 무언가. 저건…… 모래 폭풍이다.



  모래 폭풍이 그들을 감싼다. 모든 것은 한 데 섞인다. 사랑, 도덕, 욕망, 멸시, 질서, 의식, 법, 조롱, 기억, 절망, 삶…… 모든 것이 뒤섞인다. 이제 뭐가 뭔지 구별할 수가 없다. 이윽고 모래 폭풍은 지나간다.

  이제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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