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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Apr 08. 2022

21. 택배

  어느 날 아침, 우영은 잠결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봤다. 현관문을 열고 택배를 가져와 박스를 뜯었다. ‘뭐야, 김치를 시켰더니 웬 배추가 왔어?’ 다시 보니 배추가 아니었다. 5만 원권이었다. 어림 잡아도 수천 장은 될 듯한 5만 원권이 비닐에 가득 담겨있었다.

  순간 잠이 달아났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아무리 봐도 5만 원권이었다. 우영은 생각했다. '이게 왜? 나한테?' 우영은 박스에 붙은 운송장을 뜯어 ‘받는 분’ 칸을 확인했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 진송빌라 105호’까지는 일치했다. 다른 건 이름뿐이었다. ‘원노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전에 살던 사람이 원노윤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 년을 살고 재계약을 해 이 년째 사는 중이었다.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고지서가 두어 번 잘못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고지서에 적힌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잘못 온 적이 없었다. 근데 일 년이나 뛰어넘어 택배가 잘못 오다니? 뭔가 이상했다.

  우영은 집주인에게 연락해 예전에 여기 살던 사람 이름이 뭐였냐고 물어볼까 고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두기로 했다. 뜬금없이 전에 살던 사람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는 건 어딘가 의심쩍은 데가 있고 만에 하나 그 사람 이름이 정말 원노윤이면 큰 문제였다. 이게 왜 큰 문제일까? 우영은 생각했지만 곧이어 떠오른 생각에 자리를 내주었다. 핸드폰으로 카카오맵 어플을 켜 ‘진송빌라’라고 검색했다. 3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진송빌라가 있었다. 거리뷰 버튼을 눌러 그곳의 사진을 봤다. 그가 살고 있는 진송빌라와 별 차이가 없는 흔하디 흔한 원룸 건물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회전시켰다. '여기에도 105호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곳에 원노윤이 살고 있을까?' 그는 돈뭉치를 바라봤고 탁상시계를 바라봤다. 7시 31분이었다.

  우영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햄버거집에 전화를 걸어 몸이 안 좋아 쉬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침을 먹는데 맛이 잘 안 느껴진다고. 코로나일지도 모른다고. 전화를 끊고 비닐봉지를 뜯었다. 직사각형의 돈뭉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그는 돈을 세기 시작했다. 중간에 어디까지 셌는지 까먹기도 하고 한번 센 뒤 잘 셌나 싶어 다시 한번 세니 9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정확히 6400장. 3억 2천만 원이었다. 이 돈을 어떻게 할까? 우영은 생각했다. 이 돈을 어떻게 내 걸로 만들 수 있을까?

  우영은 앞서 떠오른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전에 이곳에 살던 원노윤과 이곳 근처에 또 다른 진송빌라에 사는 원노윤. 후자일 가능성이 높지만 전자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었다. 택배를 보낸 사람은—그러고 보니 택배를 누가 보냈지? 그는 다시 운송장을 확인했다.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 ○○-○○ 원네트워크.’ 핸드폰으로 네이버를 켜 '원네트워크'라고 검색했다. 동일명의 다른 장소는 떴지만 중구 회현동의 원네트워크는 뜨지 않았다. 구글, 카카오맵에 검색해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면 회사명 같지만 사실 등록이 되지 않은 장소일지도 몰랐다.

  택배를 보낸 사람은 원노윤이 이사를 간 지 모르고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추측도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진송빌라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택배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 중 실수가 있었다. 보낸 사람이 주소를 잘못 적었거나 아니면 등록하는 사람이 잘못 등록했거나. 둘 중 하나의 실수로 택배는 그에게 배송된다.

  우영은 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왜 굳이 택배로 보냈을까? 계좌이체를 하거나 직접 전달하지 않고 어째서 택배를 이용했을까? 언뜻 봐도 예사롭지 않은 돈인 건 확실했다. 아무 증거 없이 뇌물을 주기 위해 택배를 이용하다 적발됐다는 뉴스 기사를 본 것도 같았다. 어쩌면 원노윤은 정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자일지 모른다. 그는 인터넷을 켜 원노윤을 검색했다. 아무런 결과도 뜨지 않았다. 그는 누구일까?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열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돈을 박스에 담고 장롱을 열어 안쪽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뭘 좀 먹어야겠어. 오는 길에 그곳에 한번 들러봐야지.’ 그는 옷을 입었다. 나가기 전에 이중창이 제대로 잠겨있는지 확인했다. 현관을 나오고서도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했다. 그는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또 다른 진송빌라로 향했다.

  그곳은 삼 층 건물이었고 층마다 세 개의 호수만이 있었다. 우영은 굳이 3층까지 올라가 ‘303호’까지 적힌 문을 봤다. 이제 가능성은 전에 살던 원노윤 쪽으로 굳어졌다. 건물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우영은 순간 이것이 택배와 관련된 전화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진동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진동이 그쳤다. 하지만 이내 또 진동이 울렸다. 같은 번호였다. ‘택배와 관련된 번호가 확실해.’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잠잠해졌고 더는 울리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장롱 문을 열었다. 박스는 그대로 있었다.

  ‘한 달.’ 우영은 생각했다. ‘딱 한 달이야. 그때까진 여기에 보관해두자. 한 달이 지나서도 아무 일이 없으면 이 돈은 내 돈이 되는 거야. 아니 이미 이 돈은 내 돈이야.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한 달이야. 딱 한 달만 지나면……’ 우영은 장롱 문을 닫았다. 3억 2천.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걸로 무얼 할 수 있을까?’ 그는 상상했다. ‘우선 이 지긋지긋한 반지하를 탈출할 거야. 전망 좋은 방으로 가야지. 그리고 최신형 컴퓨터를 살 거야. 현질도 무진장할 수 있겠지. 야식도 마음껏 시켜먹어야지……’ 그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아침 우영은 잠에서 깨자마자 장롱 문을 열었다. 여전히 박스는 그곳에 있었다. 혹시 몰라 박스를 열어봤다. 안에는 노란 지폐가 가득했다. 그제야 안심하고 문을 닫았다.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조금 쪼들리긴 하겠지만   정도는 버틸  있을  같았다. 그는 햄버거집에 전화를 걸어 일을 관두겠다고 말했다. 매니저는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말했다. “윗사람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아랫것들한테  대하는 네가 개같아서 관두려고요.” 그는 말했다. 저쪽에서 뭐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혼자 실실 웃었다. 진동이 울렸고 햄버거집이겠거니 확인했지만 그게 아닌 ‘070’으로 시작하는 어제  번호였다. 그는 진동이 끊이자마자 번호를 차단했다.

  ‘지네가 진작 잘 보냈어야지. 내 잘못이 아니야. 아니 나는 택배를 받은 적이 없어. 아니 내가 받은 건 김치야. 내가 시킨 김치야. 김치를 사러 가야겠어.’     

  그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근처 식자재 마트로 가서 자기가 시킨 것과 똑같은 김치를 샀다. 인터넷에 접속해 구매 사이트에 들어가 ‘구매확정’ 버튼을 눌렀다. 집에 돌아와 장롱을 열고 박스에 붙은 운송장을 떼 갈기갈기 찢었다. ‘이제 증거는 없어.’ 그는 운송장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근데 내 진짜 택배는 어디로 간 걸까? 설마 그 사람한테 간 건 아니겠지?’ 다음 날 현관 앞에는 그가 원래 시킨 택배가 도착해있었다. 그는 냉장고에 담긴 두 개의 김치를 바라봤고 이제 완전히 안심했다.

  일주일이 지나갔다. 그동안 우영은 매일 아침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장롱 안을 확인했다. 종일 이곳에 있었던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지만,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지만 왠지 불안감이 들었고, 박스에 담긴 돈을 확인하고 나서야 편인해졌다. 두어 시간 간격으로 장롱을 열어 확인했고, 그 간격은 점차 줄어들었다. 한 시간, 삼십 분, 십 분, 오 분…….

  우영은 집에서만 생활했다. 반지하라는 점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쯤 택배의 진짜 주인, 원노윤은 자기 돈을 되찾기 위해 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큰돈을 주고받는 사람이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이곳을 찾아내는 것쯤은 굉장히 쉬운 일일 것 같았다. 그는 창문 너머로 사람의 형체가 지나갈 때마다, 벽 너머로 누군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원노윤이 아닐까, 혹은 그가 보낸 사람이 아닐까 불안했다. 형체가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야, 다른 문에서 도어락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야 편안해졌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고 또 다른 형체가 나타나거나 또 다른 소리가 나면 불안해졌다.

  이주일이 지났을 무렵 우영은 꿈을 꿨다. 그는 어두운 주택가 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인 듯했지만 자세히 뜯어보니 전혀 다른 곳이었다. 이 골목을 돌면 분명 저 골목이 나와야 했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지형지물이 나왔다. 어서 집을 찾아야 했다. 장롱 문을 열고 돈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골목을 뛰어다녔지만 좀처럼 집은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집을 찾아냈을 때 저 멀리서 누가 현관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원노윤이었다! 그의 손에는 돈뭉치가 쥐어져 있었다. 우영은 그 돈이 자신의 돈임을 깨달았다. 그를 쫓아갔지만 따라잡을 수 없었다. 무어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이 목에서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답답했고 어떻게든 소리치려 노력했다. 내놔…… 내 돈 내놔…… 내 돈 내놓으라고! 그렇게 소리쳤을 때 잠에서 깨어났다. 동틀녘이었고 그는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침대에서 튀어나가 장롱을 열었다. 돈은 제자리에 있었다. 그걸 보고서도 한동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꿈 이후로 우영은 원노윤이 지금 자신한테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나의 존재를 알고 있어. 내가 자기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일부러 가만히 있는 거야. 내가 자기 돈을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그걸 즐기려고.’ 그는 싱크대 서랍을 열고 식칼을 손에 쥐었다. ‘한번 와보라 그래. 누구든 오면 죽여버릴 거야. 이건 내 돈이야. 누구든 이 돈을 빼앗으려고 하면 죽여버릴 거야.’ 그는 이제 무얼 하든 식칼을 옆에 뒀다.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낮에 누군가 계단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소리였다. 또각 내려오고 잠시 사이를 두고 또각 내려왔다. 누군가 아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우영은 소리에 집중했다. 마침내 그 누군가는 계단을 모두 내려왔다. 그는 숨을 죽였다. 다른 문의 도어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새끼야.’ 그는 생각했다. 한참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밖에서 원노윤이 자기 방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 있는 모습을 떠올렸다.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이 안의 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을. 그는 칼을 쥐고 소리쳤다. “들어와 봐. 씨발, 들어와 보라고. 칼로 쑤셔줄 테니까 어디 들어와 봐.”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도 도어락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종일 꼼짝도 못한 채 칼을 쥐고만 있었고 그러다 잠들었다.

  삼 주가 지났을 무렵 그는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몹시 피곤했지만 잠에 들면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깼다. 식량이 거의 떨어졌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다. 남은 것이라곤 시리얼, 라면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뻤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한 달이었다. 일주일만 지나면 저 돈은 진정 내 것이었고 이제 자유였다. 이 상상만 하면 배가 불렀고 머리가 개운해졌다.

  한 달을 나흘 앞둔 새벽, 우영은 또다시 꿈을 꿨다. 전에 꿨던 꿈과 비슷한 꿈이었다. 깨어나자마자 장롱 문을 열었다. 돈이 그곳에 무사하길 바라면서. 하지만 돈이 없었다. 무언가 있긴 했지만 돈이 아니었다. 그건 배추였다. 노란 빛깔의 배추.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돈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다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쳤다. 배추를 땅바닥에 내던졌고 괴성을 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그 소리에 그와 같은 층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지하로 내려왔다. 사람들은 105호 현관문 주위에 모여있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괴성이 들리고 있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왔다. 경찰은 집주인이 건네준 마스터키로 문을 열었다.

  안에서는 한 남자가 칼을 든 채 발광하고 있었다. 몸 이곳저곳 상처가 나 있었다. 남자는 문을 연 경찰을 향해 달려들었고 경찰은 단숨에 그를 제압했다.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남자는 내 돈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경찰은 방 안을 둘러봤다. 바닥, 침대, 식탁 등 할 것 없이 모든 곳에 노란 무언가가 널브러져 있었다. 5만 원권이었다.

  남자는 경찰서에 도착했다. 제정신이 아니었고 제대로 된 진술을 할 수 없었다. 남자의 부모와 연락이 닿았고 잠시 뒤 부모가 도착해 남자를 데려갔다.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지만 경찰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기껏해야 2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방 안에 있던 그 많은 돈은 다 무엇이었을까? 경찰은 부모에게 다시 연락해 동의를 얻었고 남자의 집을 수색했다. 온전한 상태의 돈을 모아놓으니 3억 원가량이었다. 경찰은 돈의 출처를 찾기 시작했고 장롱에서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박스에는 무언가 뜯겨나간 흔적이 있었다. 집 안을 뒤졌고 쓰레기통에서 조각난 종이를 발견했다. 맞춰보니 운송장이었다.

  그 돈이 모 건설회사가 아파트 재건축 사업권 입찰을 위해 서울의 모 시의원에게 보내는 뇌물이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밝혀졌다. 택배는 이중∙삼중 배송을 거쳐 시의원의 자택으로 배송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시의원은 부인했지만 수사 과정에서 과거에 뇌물을 받은 이력이 추가로 밝혀졌고 결국 죄를 시인하고 말았다. “받지도 못했는데 잡혀가네!” 그는 검찰에 송치되면서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수사는 종결됐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에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뒤 계약은 종료됐고 남자의 부모가 와 그의 짐을 챙겨갔다.

  택배가 어떻게 그의 집에 도착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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