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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Apr 24. 2022

22. 저주인형 (3)

  나는 인형을 서랍 속에 처박았어. 마음 같아선 당장 버리고 싶었지만 상담원인지 뭔지 그 이상한 여자가 한 말이 자꾸 거슬렸어. 말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버릴 수 없었지. 나는 이상한 장소에 빠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어. 방금 전까지 익숙하고 편한 곳에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처음 보는 낯선 장소에 와버린 것 같았어.

  그 사람은 이 주 정도 회사에 나오지 않았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 사람이 다시 출근하는 날 주기 위해 선물을 준비했어. 바나나 모양의 쿠션이었는데 등에 대거나 허벅에 위에 놓을 수 있는 거였지. 별로 안 좋은 기억이긴 했지만 우리 둘과 연관이 있는 선물이었고 어쩌면 이 선물을 통해 관계를 개선시켜볼 수도 있을 것 같았어. 인형에 대한 기억도 다 잊고 싶었어. 비록 서랍 깊숙한 곳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이 주가 지나고 그 사람이 회사에 나왔어. 발에 깁스를 하고 있었지. 사람들이 다가와 안부를 물었고 그 사람은 웃으며 대답했어.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지. 잠시 뒤 사람들이 물러갔고 나는 그 사람에 다가갔어. 쿠션을 건네며 말했지.

  “대리님, 쾌유 기원 선물이에요. 귀엽죠?”

  그 사람은 쿠션은 받지 않고 나를 빤히 올려다봤어. 예전에 바나나우유를 사갔을 때와 비슷한 표정이었어.

  “선물? 난 이런 거 받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

  “네?”

  “미나 씨는 말을 한 번에 잘 못 알아듣네요? 미나 씨나 써요. 나는 필요 없으니까.”

  순간 얼굴이 몹시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어. 주위 사람이 우리 둘을 곁눈질하고 있었어.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어. 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어. 돌덩이가 된 것처럼.

  “볼 일 끝났으면 그만 가지 그래요?”

  그 사람이 다시 말했어. 그때야 나는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왔어. 돌아와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여 온 몸을 흔들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어. 얼굴에 물을 묻히고 심호흡을 했어. 조금씩 진정이 되기 시작했지.

  나는 스스로를 탓했어. 내가 미쳤었나? 어째서 그 사람이랑 잘 지내보려고 했을까? 그렇게 당하고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또다시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어. 하지만 이번엔 뜨거움이 아닌 차가운 분노였어. 거울에 대고 속으로 중얼거렸어. 나는 당신을 언제든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나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또 무슨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며칠 뒤 비품을 채우러 탕비실에 갔는데 그 사람이 안에 있었어. 쿠션 사건이 있고 난 뒤 그 사람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 사람도 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 부딪혀봐야 스트레스받을 게 뻔하니 그냥 서로 있는 듯 없는 듯 여기는 게 훨씬 낫겠다 싶었어. 비품만 꺼내고 빨리 나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나를 불렀어. 나는 나가려다 멈춰 그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지.

  “뭔가 이상한 것 같아.”

  그 사람이 말했어.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하려나 짜증이 났지.

  “미나 씨 오고 나서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긴단 말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대리님?”

  나는 그 사람을 똑바로 쳐다봤고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어.

  “표정 좀 봐. 미나 씨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성격 나오네?”

  “대리님 진짜 말조심하세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미나 씨 역시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그 사람이 말했어. “그래서 꿈에도 나오고 하는 건가?”

  “꿈이라뇨?”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어. 그 사람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하기 시작했어.

  “입원했을 때 꿈을 꿨어. 나는 십자로 된 나무판자에 묶여있었고 내 앞에는 미나 씨가 서있었지. 아주 큰 바늘을 들고 있었고 그걸로 내 몸 마구 찔러댔어. 나는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빠져나갈 수 없었고 미나 씨는 내 일그러진 표정에 기뻐하며 더욱 찔러댔지. 나는 소리를 질렀고 그러다 잠에서 깨어났어. 실제로 소리를 지른 모양인지 병실 사람들이 다 깨고 간호사까지 나를 찾아왔더라. 나는 사람들한테 죄송하다 말하고 다시 잠을 잤지. 근데 잠이 오지 않더라. 하긴 그런 꿈을 꿨는데 쉽게 잠이 올 리가 없지. 나는 생각했어.”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끊었어. “왜 그런 꿈을 꾼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미나 씨가 나오는 꿈을, 왜 하필 지금?” 그리고는 내 반응을 살피려는 듯 눈을 치켜떴지.

  속으로는 엄청 놀랐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어. 그 짧은 사이에 무슨 말로 받아쳐야 할까 고민했지.

  “대리님도 무의식적으로는 저한테 미안했었나 보죠. 저한테 얼마나 못 되게 굴었으면 그런 꿈까지 꾸겠어요?”

  “평소 같았으면 악몽이겠거니 하고 넘겼을 텐데 이상하게 그 꿈은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든단 말이야. 그냥 꿈이 아닌 것 같달까.”

  “제가 왜 대리님이 꾼 꿈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만 가볼게요.”

  나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어.

  “미나 씨 조심해.” 그 여자가 뒤에서 말했어. “나 당하고만 사는 사람 아니야.”

  나는 뒤를 돌았어. 들고 있던 비품을 바닥에 내던지고 그 사람한테 성큼성큼 다가갔어.

  “지금 장난하세요? 대리님이 혼자 싸돌아다니다 코로나 걸리고 혼자 넘어져서 금 간 거 가지고 지금 제 탓하시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대리님이 저한테 한 짓은 생각 안 하세요?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이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네요.”

  “지금 선배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그 사람이 소리쳤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를 노려봤어. 밖에서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누군가 비품실 문을 두드렸어. 우리는 잠시 더 대치했고 그 사람이 내 어깨를 밀치고 밖으로 나갔어. 나는 잠시 더 서있다가 바닥에 흩어진 비품을 들고 밖으로 나갔지.

  소문이 어떻게 퍼진 모양인지 오후에 부장님이 그 사람과 나를 따로 불러 주의를 줬어. 회사에 이런 일이 생기면 안 좋다, 좀 더 배려해라 하는 뻔한 말들이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죄송하다 말했지만 속은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한 앙심으로 들끓고 있었어. 그 사람이 부장님한테 미리 선수를 쳐 자기 유리한 대로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지.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했고 이러니 더욱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이미지만 떠올랐어. 저주인형.

  나는 돌아오자마자 서랍에서 인형을 꺼냈어. 그리고 가스레인지 앞으로 갔지. 인형을 위에 올려뒀어. 이제 스위치만 돌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였지. 하지만 나는 망설였어. 왜 이렇게 모질지 못한 거야? 그러니까 당하고 살지.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불을 켤 수가 없었어. 이 불을 켜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순간 그 사람이 꾸었다는 꿈이 떠올랐어.

  뭔가 눈치챈 게 아닐까. 내가 무슨 짓을 했기 때문에 자기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자기는 당하기만 하는 사람 아니라는, 조심하라는 경고. 그게 무슨 뜻일까? 나는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고객센터의 여자가 떠올랐고 나는 당장 전화를 걸었어.

  “네, 고객님. 저주를 당한 사람의 반응 때문에 많이 놀라셨군요. 때로 저주를 당한 사람의 꿈에 의식을 거행하는 자가 나타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저희 쪽에서도 이에 대한 원인을 찾아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혹시 저주를 당한 사람이 역으로 의식을 거행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경우도 있나요?”

  “네. 드문 사례긴 하지만 간혹 있습니다, 고객님.”

  “그럼 어떻게 되나요?”

“네. 역으로 저주를 걸어도 별다른 차이 없이 똑같이 적용됩니다. 다만 서로에 대한 저주가 맞부딪치면 더욱 약한 쪽의 힘이 소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저한테 저주를 걸면 제가 거는 저주가 소용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고객님.”

  나는 전화를 끊었어. 다시 전자레인지 앞으로 갔어. 더욱 지체할 수가 없었지. 나는 인형을 위에 올려뒀어. 그리고 불을 켰어. 타닥타닥 하는 소리를 내며 인형이 타기 시작했어.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어. 어느 정도 타기 시작하자 불을 끄고 인형이 타는 모습을 지켜봤어. 인형 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  타버리고  그것은  이상 인형이라고 부를  없었어. 재가 틀에 덕지덕지 붙어있었어. 나는 싱크대에 틀을 넣고 물을 틀었어. 검은 물이 개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

  그리고 다음날, 그 사람이 실종됐어.

  그 사람이 전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건물 CCTV에 찍혔어. 하지만 이후에 나오는 모습은 화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지. 다른 누군가가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간 흔적도 없었어. 경찰은 방의 창문을 모두 조사했지만 사람이 드나든 흔적을 찾을 순 없었어. 들어간 사람이 어디 나온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였지. 경찰은 끝내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결론지었어. 유일하게 이상한 점은 식탁 위에 불어 터진 라면이 놓여있었대. 아마 자기가 먹으려고 끓였을 텐데 금방 라면을 먹으려고 했던 사람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사람들은 얘기했지.

  그 이후로 나는 한 달 정도 회사를 더 다니다 관뒀어. 사람들이 나를 쉬쉬하고 멀리하는 게 느껴졌거든. 왜 그러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 물론 내 의사도 있었어.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었거든. 새로 시작하고 싶었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지. 그 사람이 꿈에 나오기 시작한 거야.

  꿈이 시작되면 사람 모양의 검은 형체가 나를 따라와.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니 얼굴이라 할 만한 것이 없지만 나는 그게 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어.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있는 힘껏 달리지만 곧 붙잡히고 말아. 그 사람은 내 목을 조르고 아주 긴 바늘로 나를 찔러. 마지막으로 내 몸에 불을 붙여. 그 순간 나는 놀라 잠에서 깨어나지.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몸이 점점 쇠약해지고 있어. 잔병에 자주 걸리고 공황장애 증상까지 생기는 것 같아. 얼마 전에는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꺼내려다 넘어져 손목을 삐었지. 이 모든 게 단지 내 잘못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그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 살아있다는 말이 되겠지. 그럼 다행이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 사람이 살아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저주할 수도 있는 걸까?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언제까지 꿈을 꾸고 고통받아야 할까? 이걸 끝내려면 그 사람을 또 저주해야 하는 걸까? 죽은 사람을 저주할 수도 있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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