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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궤도이탈 Jun 03. 2022

27. 거리에서

  한때 그의 인생에서 직장과 아내와 집이 가장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성취했다. 그것들을 성취한 다음에는 그것들을 지켜내는 게 가장 중요했고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지켜냈다.

  어느 날 그는 그것들을 잃고 거리로 나가게 되었다. 그것들 없이도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거리에서 잡지를 팔고 그림을 그린다. 잡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는 일이고 그림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는 일이다.

  평일에는 오후 네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팔고 주말에는 오후 두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판다. 처음에는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팔았다. 실적이 좋지 않았다. 얼굴을 감추면 손님도 다가오지 않소. 동료 판매원이 말했다. 그는 모자를 벗었다. 표정이 점점 부드러워졌고 실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가끔 아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지날 때면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대부분 착각이었지만 이따금 진짜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 눈에 그는 보이지 않고 보인다 하더라도 그라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잡지를 팔면서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주위의 풍경, 거리의 풍경이다. 잡지만 팔기에는 시간이 많았다. 어느 날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근처 문구점으로 가 스케치북과 연필을 샀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게 언제였지. 그는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그는 사십 년이 넘도록 잊힌 감각을 되살리려 손을 움직였다. 어쩌면 소멸되었을지도 모르는 감각. 처음에는 엉망이었지만 계속 그리다 보니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가 되었다. 과거의 감각인지 현재의 새로운 감각인지는 모르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림도 그리시나 봐요. 손님이 말한다. 이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자다. 아 네. 그가 말한다. 혹시 저도 그려주실 수 있나요? 여자가 말한다. 그는 잠시 여자를 올려다본다. 괜찮으시다면요. 그가 말한다. 네 괜찮아요. 여자가 말하고 쭈그려 앉는다. 그는 허벅지 위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연필을 든다. 이런 적은 처음이어서 손이 떨린다. 제가 스케치 정도만 할 줄 알아서요. 그가 말한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기를 마치고 종이를 뜯어 여자에게 건넨다. 와 진짜 잘 그리세요. 여자가 말한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한다. 여자는 종이를 잡지에 끼워넣고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넨다. 괜찮습니다. 그냥 그린 거라서요. 그가 말한다. 아니에요. 제가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여자는 그의 손에 지폐를 쥐어주고 간다. 그는 돈을 손에 쥔 채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일까 내가 불쌍해서일까. 이런 생각을 하기 싫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돈을 받지 말아야겠다.

  당신 지금 뭐해? 남자가 다가와 말한다. 네? 그가 말한다. 지금 뭐 그리고 있냐고. 남자가 말한다. 그는 허벅지를 끌어당겨 스케치북을 감춘다. 이윽고 한 여자가 다가온다. 오빠 왜 그래. 그만해. 여자가 말한다. 놔 봐. 지금 이 사람이 너를 빤히 쳐다보면서 뭘 그리고 있었다니까. 어이 그거 빨리 내놓으라고. 주위 사람 몇몇이 흘끗거린다. 그는 스케치북을 건넨다. 이거 봐. 당신 미쳤어? 왜 남의 여자를 함부로 그리고 난리야? 남자가 말한다. 그냥 그렸을 뿐입니다. 그가 말한다. 무언가 덧붙이고 싶지만 덧붙일 수 있는 말이 없다. 이거 엄연한 초상권 침해야. 알아? 경찰에 잡혀가고 싶어? 남자가 말한다. 그만하라고 진짜. 빨리 가자고. 여자가 말하고 남자는 여자와 그 사이를 번갈아 본다. 종이를 뜯어 박박 찢고 바닥에 버린다. 그를 한번 째려보고 여자의 손을 잡고 간다. 그는 바닥에 버려진 잔해를 줍는다. 사람은 되도록 그리지 말아야겠어. 그는 생각한다.

  어느 날은 자기 또래로 보이는 직장인이 잡지를 산다. 어느 날은 비가 내리고 그는 지하철 출입구 안으로 들어와 바깥 풍경을 그린다. 어느 날은 어린아이가 손에 꾸깃꾸깃 돈을 쥐고 와 잡지를 사고 건네받은 잡지를 옆구리에 끼고 멀리 있는 부모에게 달려간다. 어느 날은 도로에서 자동차끼리 충돌해 사고가 나고 사람들이 몰리고 소방대원이 오고 가는 풍경을 그린다. 또 어느 날은 잡지를 팔고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린다. 다시 어느 날은 잡지를 팔고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고……

  그는 가끔 이 두 가지 행위에 대해 생각한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시간을 보내는 것. 어떻게 나의 삶이 이렇게 단순해졌을까? 그 전에는 너무 많은 행위가 있었지. 해야만 하는 것. 또 해야만 하는 것. 계속 해야만 하는 것. 죽을 때까지 해야만 하는 것. 어쩌면 죽어서도 해야만 하는 것……. 나는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채 살았어.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졌지.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 적어도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있으니까. 그럴 시간이 많으니까.

  밤이 깊어오면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고시원으로 간다. 손과 발을 씻고 세수를 한다. 라면 하나를 끓이고 거기에 밥과 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남은 잡지의 개수를 세고 그림을 좀 더 그린다. 피곤과 졸음이 지배해버릴 때쯤, 불을 끄고 눕는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까? 그는 가늠해본다. 혹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이렇게 사는  옳은지 모른다. 하지만 옳지 않다 하더라도 달리 어떻게  방도가 없다. 적어도 지금으로써는 그렇다. 근데  옳고 그름의 문제일까. 그는 생각한다. 어쩌면 그건 수용의 문제, 납득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예전에는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문득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런 문제를 다룬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내일은 근처 도서관에 한번 들러봐야겠어. 그는 생각한다.

  가끔 그는 직장과 아내와 집이 나오는 꿈을 꾸고 싶다고 생각한다. 꾸고 싶으면서 꾸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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