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슬라브주의와 러시아 정교회의
위험한 동맹

세게속의 러시아 정교회

by 이헌철
image.png 러시아 정교회 내부 @pixnio.com/ko/media/ko-2465198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을 때,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 키릴 총대주교가 이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 부르며 적극 지지한 것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는 러시아 병사들에게 “그 희생이 모든 죄를 씻어준다”고 설교했다. 종교 지도자가 왜 전쟁을 축복하는가? 이 의문의 답은 ’러시아 세계(Russkiy Mir)‘라는 이념과 그 뿌리인 범슬라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에 태어난 위험한 꿈: 범슬라브주의

이야기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 바람이 불었고, 슬라브 민족들 사이에서도 ‘우리는 하나’라는 의식이 싹텄다. 1830년대에 본격화된 범슬라브주의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슬라브 민족들이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순수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이 사상을 자신의 팽창 야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시켰다. 러시아는 스스로를 ‘모든 슬라브 민족의 보호자’로 자처했다. 19세기 러시아 사상가들은 슬라브 민족을 나무에 비유하며, ‘작은’ 슬라브 국가들은 가지에 불과하고 러시아가 그 중심 줄기라고 주장했다. 이미 이 시기부터 범슬라브주의는 문화 운동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가면이었다.


image.png 러시아정교회 사제 @pravlife.ru/epitimiya/


종교와 정치의 위험한 결합

러시아 정교회는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988년 키예프 루스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된 러시아 정교회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러시아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자, 모스크바는 스스로를 ‘제3의 로마’, 즉 정교회의 마지막 보루로 자처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적 자부심이 아니라, 정치적 패권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근거가 되었다.

19세기에 범슬라브주의와 결합한 러시아 정교회는 ‘동방 정교회 대 서방 가톨릭’이라는 문명 충돌의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러시아는 ‘신성한 동슬라브 정교회 공동체’의 수호자를 자임하며,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 정교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종교적 감정이 정치적•군사적 목적을 위해 철저히 도구화된 것이다.

소련 붕괴 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했다. 1990년대 후반, 크렘린 주변의 지식인들이 고안하고 2001년 푸틴이 공식화한 ‘러시아 세계(Russkiy Mir)’ 개념은 바로 이 공백을 채웠다. 2007년 푸틴은 정부 예산으로 ‘루스키 미르 재단’을 설립하며 이 이념을 전 세계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세계’란 무엇인가? 키릴 총대주교의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동방 정교, 러시아 문화와 언어, 공통의 역사적 기억이라는 세 기둥 위에 세워진 문명 공간”이다. 이 공간에는 러시아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리고 전 세계 어디에 있든 러시아어를 사용하거나 러시아 정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문제는 이 개념이 국가의 주권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키릴 총대주교는 노골적으로 “국경은 러시아 세계 민족들에게 불필요한 장애물”이라고 선언했다.

이 이념의 핵심은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이 실제로는 ‘하나의 민족’이며, 따라서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교회, 하나의 지도자(푸틴)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가 아니라 ‘러시아 문명의 일부’이며, 키이우는 ‘모든 루스의 어머니’로서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중심지라는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논리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러시아 세계’의 비극은 종교가 정치에 종속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사랑과 평화를 가르쳐야 할 교회가 전쟁을 축복하고, 화해를 중재해야 할 성직자가 증오를 선동하며, 생명을 귀히 여겨야 할 신앙이 살상을 정당화한다. 민족과 문명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그 본질은 타국의 주권을 짓밟는 제국주의에 불과하다.

한국도 무관하지 않다. 종교가 특정 정치 세력과 결탁하거나,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배타성을 띨 때, 우리 역시 비슷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러시아 세계’의 교훈은 명확하다. 종교는 권력의 도구가 아니라 양심의 목소리여야 하며, 신앙은 분열이 아니라 화해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위대한 이념’도 한 국가의 주권과 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폐허 위에서, 키릴 총대주교가 축복한 포탄이 교회와 학교를 파괴하고 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 비극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신앙은 생명을 살리는가, 아니면 죽음을 정당화하는가?

이 위험한 이념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다음 장에 나오는 <550년 묵은 꿈이 만든 21세기 비극>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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