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 영혼의 목욕

러시아 정교회 예배

by 이헌철
러시아 정교회의 고해성사 Ⓒnamu.wiki

모스크바의 겨울은 혹독하다. 영하2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 속에서도 사람들은 성당으로 향한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입김을 내뿜으며, 그들은 문턱을 넘어선다. 성당 안은 따뜻하다. 촛불이 흔들리고, 이콘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진다. 그리고 구석진 곳, 작은 십자가 앞에서 한 사람이 사제에게 속삭인다. 고해성사가 시작된 것이다.


영혼을 드러내는 의식

러시아 정교회에서 고해성사는 ‘이스포베드(исповедь)’라 불린다. 이 단어의 어원은 ‘고백하다’, ‘밝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독특한 영적 전통이 천 년 이상 이어져 왔다. 고해성사는 대개 성찬례 전에 이루어진다. 신자들은 이른 아침 성당에 도착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 자체가 준비의 과정이다. 서방 카톨릭 교회의 고해소와 달리, 정교회는 열린 공간에서 이콘 앞에 선다. 신자와 사제는 이콘을 향해 나란히 서며, 사제는 이콘과 신자 ‘사이’가 아니라 ‘옆’에 선다. 사제는 중재자가 아니라 증인이다. 고백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사제는 그 고백을 함께 듣는 형제일 뿐이다. 사제는 신자의 어깨에 에피트라힐(성직자가 목에 두르는 긴 띠)을 얹는다. 이 천 조각 하나가 신자와 사제를 연결하며, 물리적 접촉이 주는 위로를 전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신자는 말하기 시작한다.

image.png 러시아정교회의 고해성사 Ⓒnamu.wiki


죄의 목록, 영혼의 지도

고해성사 전 신자들은 자신의 죄를 준비한다. 러시아 정교회에는 ‘준비 기도문’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이를 미리 읽으며 양심을 성찰한다. 어떤 이들은 종이에 적어 오기도 한다. 떨리는 손으로 쓴 죄의 목록, 그것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가장 사적인 문서다. 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생각의 죄, 말의 죄, 행동의 죄로 구분한다. 러시아 정교회는 외적 행위만큼이나 내적 상태를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생각, 교만한 태도. 이 모든 것이 고해의 대상이다. “저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를 판단했습니다. 기도에 게을렀습니다. 금식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 정교회가 ‘금식’과 관련된 죄를 상당히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정교회는 일 년의 거의 절반을 금식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수요일과 금요일은 육식을 금하며, 사순절과 같은 대금식기에는 유제품과 기름진 음식도 피한다. 이를 지키지 못한 것도 고해의 내용이 된다. 서구인의 눈에는 지나치게 세세해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육체와 영혼의 분리할 수 없는 연결을 강조하는 정교회 신학의 표현이다. 고해는 형식적 나열이 아니다. 사제는 때로 질문을 던진다. “그 일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죄가 당신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이는 심리상담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목적은 다르다. 자기이해가 아니라 회개,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즉 마음의 전환이 목표다.

사제의 역할 : 의사이자 동반자

고해를 듣는 사제의 역할은 미묘하고 복잡하다. 그는 판사가 아니다. 최소한 정교회 신학은 그렇게 가르친다. 그는 영적 의사다. 러시아정교회는 죄를 법적 위반이 아니라 영적 질병으로 이해한다. 고해성사는 법정이 아니라 치유의 장소다. 사제는 절대적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고해에서 들은 내용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소비에트 시대, 비밀경찰이 사제들에게 신자들의 고해 내용을 밀고하라고 강요했을 때, 많은 사제들이 이를 거부하고 수용소로 끌려갔다. 침묵은 단순한 직업윤리가 아니라 성사의 본질이었다.

고해를 들은 후 사제는‘에피티미야(епитимья)’를 부과한다. 이는 카톨릭 교회의 ‘보속(補贖)’과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이것은 처벌이 아니라 영적 처방이다. “앞으로 한 달간 매일 시편 50편을 읽으십시오.” “가난한 이에게 자선을 베푸십시오.” “당신이 해한 사람과 화해하십시오.” 에피티미야는 신자의 영적 상태에 맞춰 개별화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제는 사죄경을 읽는다. 이것은 형식적 문구가 아니다. 사제는 십자가와 복음서를 신자의 머리에 얹고 기도한다. "주님, 당신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의 죄를 사하시고 용서하시며 너그러이 보아주소서..." 목소리는 낮고 진지하다. 신자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 눈물을 흘린다. 무게가 내려가는 느낌. 짐을 내려놓는 경험. 이것이 고해성사의 핵심이다.

개신교와의 갈림길: 중재자의 문제

종교개혁은 고해성사를 둘러싼 신학적 지진이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을 때, 그 중심에는 고해와 사죄의 문제가 있었다. 면죄부 판매의 남용, 고해의 형식화, 사제의 권위 독점 등이다. 루터는 외쳤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사제는 필요 없다. 신자는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개신교는 고해성사를 폐지했다. 정확히 말하면, 사제에게 하는 의무적 고해를 거부했다.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다.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했다. 중재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인간 사제가 죄를 사할 권한을 가졌다는 주장은 성경에 없는 것이며,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앉히는 오만이라고 개신교는 선언했다. 개신교에서 본다면, 정교회의 접근은 사제 권위의 남용 가능성, 신자의 수동성, 형식주의의 유혹 등으로 위험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은 “서로 죄를 고백하라”(야5:16)고 했지, “사제에게 고백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또 다른 인간을 세우는 것은 복음의 단순함을 흐린다.

필수인가, 선택인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고해성사는 이론적으로는 필수다. 성찬례에 참여하기 전 반드시 고해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실천은 늘 이론보다 복잡하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러시아 정교인들은 일 년에 한두 번, 사순절이나 크리스마스 금식기에 고해했다. 매주 고해하는 것은 수도자나 매우 열심인 신자들의 실천이었다. 소비에트 시대 70년간의 억압은 이 전통을 더욱 약화시켰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이 일 년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만 고해한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해서 정기적 고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특히 젊은 사제들과 영적으로 각성된 공동체에서 고해는 다시 부활하고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토요일 저녁이면 고해를 기다리는 줄이 늘어선다. 흥미롭게도 현대 러시아에서 고해성사는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심리치료를 받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다. 반면 고해성사는 무료다. 물론 고해는 치료가 아니며, 사제는 심리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판단하지 않으며, 영적 조언을 주는 존재이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된다.

빛과 그림자

영적 차원에서 고해는 겸손의 학교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타인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도움을 구하는 행위이다. 이는 현대 사회가 강조하는 ‘강한 자아’와는 정반대다. 정교회는 진정한 강함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공동체적으로 고해는 신자와 사제, 신자와 교회 사이의 유대를 강화한다.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나눈 사제와의 관계는 특별하다. 그는 단순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영적 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그림자도 있다. 고해성사는 남용될 수 있다. 권위주의적 사제는 고해를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신자의 약점을 알고 있는 사제가 그것을 이용해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러시아정교회 역사에는 이런 사례들이 존재한다. 또한 고해는 강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나치게 세세한 죄목을 나열하고, 사소한 실수에도 죄책감을 느끼며, 끊임없이 고해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신자들이 있다. 이는 건강한 영성이 아니다. 정교회 전통은 이를 ‘스크루플로시티(scrupulosity)’, 즉 병적 양심의 예민함이라 부르며 경계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결국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것은 공식적 고해성사가 아니었지만, 본질은 같았다. 침묵을 깨고, 어둠을 빛으로 가져오고, 고립을 공동체로 바꾸는 행위였다. 죄는 우리를 고립시킨다. 고백은 우리를 다시 연결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러시아정교회가 천 년 동안 고해성사를 지켜온 이유다. 이 제도가 개신교적 시각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부족해 보이지만 연약한 인간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므로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다면 심리적으로 유익한 부분도 분명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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