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는 살아있다:
카세트테이프가 만든 전설

춤과 음악의 나라, 러시아

by 이헌철
image.png 빅토르 초이 @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205829

1990년 6월,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 6만 2천 명의 관중이 한 청년의 기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검은 옷을 입은 28세의 가수가 무대 위에서 노래했다. "변화를! 우리의 심장이 요구한다!" 청년들은 함께 외쳤다. 그들은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 두 달 후, 라트비아의 한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빅토르 초이가 세상을 떠났다. 충격에 빠진 다섯 명의 여성 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전역의 벽에는 "Цой жив"(초이 지프)라는 글귀가 새겨졌다. '초이는 살아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노래는 여전히 울려 퍼진다.


보일러실의 반항아

1974년, 열두 살 소년이 레닌그라드의 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유는 단 하나, 록 밴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소련에서 록 음악은 '서방의 퇴폐 문화'였고, 무허가 음악 활동은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빅토르 초이라는 이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려인 4세였다. 증조부 최용남이 함경북도 성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지 4대째다. 아버지는 고려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으로 혼혈 청년 빅토르는 변방인의 정서를 온몸으로 체화하고 있었다. 러시아인도 아시아인도 아닌, 경계에 선 존재였다. 그러나 레닌그라드는 달랐다. 핀란드가 지척이었기에 암시장에서 서방 음반 비틀스, 조이 디비전, 더 큐어, 더 스미스들을 구할 수 있었다. 빅토르는 이 모든 것을 흡수했다. 기타를 독학으로 배웠고, 작곡을 시작했다.

10대 후반에 그는 낡은 아파트 보일러실의 화부가 되었다. 밤새 불을 지피며 받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살아갔다. 소련에서 '무직자'는 범죄자였고, 공식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는 무직자였다. 보일러실은 그가 음악을 하면서도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기타를 쳤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하실에서 미래를 꿈꾸었다. 밤새 불을 지피던 그 보일러실은 지금 팬들의 성지가 되었다.

image.png 빅토르 초이가 1986년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 칸테미롭스카야역 입구로 들어가고 있다. / 모스크바멀티미디어미술관 소장 출처:weekly.khan.co.kr/article/2022


키노, 영화가 시작되다

1982년, 스무 살의 빅토르는 '키노'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러시아어로 '영화'라는 뜻이다. 짧고 간결한 이름이고, 전 세계 어디서나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두 음절이다. 그들의 첫 앨범 《45》는 재생 시간이 45분이라는 단순한 이유로 이름 붙여졌다. 음악은 포크에 가까웠다. 빅토르는 전기 기타를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노랫말은 날카로웠다.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유였다.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카세트테이프에 담겨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언더그라운드에서 키노는 전설이 되어갔다.

1987년, 전환점이 왔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검열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키노의 일곱 번째 앨범 《혈액형》이 발표되었다. 때마침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혈액형은 소매에 새겨져 있고, 내 별자리는 어깨에 있네”라는 가사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운명을 노래했다.

image.png 빅토르 초이 Ⓒnamu.wiki

소련 전역이 키노에 열광했다. ‘키노매니아’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영화 《아싸》에 키노의 라이브공연이 삽입되었고 빅토르는 영화 『이글라』의 주연까지 맡았다. 빅토르의 음악은 복잡하지 않았다. 멜로디는 단순했고, 코드 진행은 직선적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뜨거운 진심이 있었다. 절규하지 않으면서도 절규했고, 저항을 외치지 않으면서도 저항했다. 《변화를 원해》라는 노래는 단순한 가요가 아니라 시대의 구호가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그 순간의 사운드트랙이었다.


전설이 되는 방법

1990년 8월 15일, 빅토르 초이는 라트비아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놀랍게도 차량에서 온전히 건진 것은 단 하나,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뿐이었다. 동료들은 이 목소리와 자신들의 연주를 합쳐 《검은 앨범》을 완성했다. 키노의 가장 인기 있는 앨범이 되었다.

35년이 지난 지금, 왜 사람들은 여전히 "초이는 살아있다"고 말하는 걸까? 그의 음악은 특정 이념을 외치지 않았다. 정치 구호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대신 인간의 본질적인 갈망을 노래했다. 자유, 사랑, 진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였다. 그래서 소련이 무너진 후에도, 공산주의가 사라진 후에도, 그의 노래는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변화의 시대,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바로 그 순간에 빅토르 초이가 나타났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는 그 꿈의 목소리가 되었고, 《변화를 원해》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시대의 외침이 되었다. 그리고 28세에 떠났다. 제임스 딘처럼, 커트 코베인처럼, 늙지 않았고, 변절하지 않았으며, 타협하지 않았다.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 속에 남았다. 만약 그가 50대, 60대까지 살았다면, 어쩌면 평범한 중년 가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가장 찬란한 순간에 멈췄다.

무엇보다 그는 경계인이었다. 고려인이자 러시아인, 레닌그라드의 보일러실 노동자이자 록스타, 변방의 이방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사람, 바로 그렇기에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그에게 투영할 수 있었다. 소외된 이들, 변두리에 선 이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 우크라이나 키이우, 카자흐스탄 알마티, 타타르스탄 카잔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긴 이유다.

보일러실에서 전 세계로

오늘날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누구나 음악을 만들고, 누구나 발표할 수 있는 시대이다. 검열도, 허가증도 필요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에 빅토르 초이의 음악이 더욱 빛난다.

2010년, 한국의 록밴드 윤도현밴드가 키노의 《혈액형》을 러시아어로 불렀다. 유튜브를 통해 러시아인들이 이 영상을 보았다. "빅토르가 살아 돌아왔다"는 댓글이 달렸다. 2019년, 한국계 독일인 배우 유태오가 영화 「레토」에서 빅토르 초이를 연기했다. 칸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2023년, 우크라이나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빅토르 초이의 노래를 불렀다. 러시아어 사용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불렀다. 카세트테이프는 사라졌지만, 그 정신은 계속된다. 진실을 담은 목소리는 어떤 매체를 통해서든 전해진다는 것이고, 억압이 오히려 더 강한 울림을 만든다는 것이다. 빅토르 초이가 보일러실에서 기타를 치며 꿈꿨던 것처럼, 오늘도 세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고 있다.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에는 여전히 빅토르 초이를 기리는 벽이 있다. 팬들이 모여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벽에는 여전히 스프레이로 쓴 글귀가 남아있다. "Цой жив"(초이 지프) - 초이는 살아있다.

그렇다. 초이는 살아있다. 보일러실의 검은 연기 속에서 태어난 노래가 이제는 전 세계를 울린다. 카세트테이프에서 유튜브로, 레닌그라드에서 서울까지 울려 퍼진다. 진실을 노래하는 모든 이의 목소리 속에서, 변화를 꿈꾸는 모든 이의 심장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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